데카르트 처럼 “말하는 나”를 의심하는 근원적인 “나”의 존재를 통해 주체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주체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구조화되어 있는 그것을 통해 주체를 살해할 것인지. 아쉽게도 답은 “나”를 부정하며 “나”찾는 형식 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다. “나”의 부정이 더 근원적인 “나”를 세우고 다시 그것의 부정이 더 더 근원적인 “나”를 세우고…”의심하는 나”를 의식하는 나가 또 그것을 의심하는 영원한 부정의 형식인 대타자 속에서 이미 “나”는 영원히 부정되고 있다.
문제는 민주주의의 이상, 상징계의 대타자를 향하고 있는 최초의 기표가 “逆”, 주권이라는 사실이다. 주권은 바꾸라는 스스로의 명령이다. (칼 슈미트는 주권을 국가를 거스르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파괴이고 동시에 세움이다. 민주주의의 이상은 파괴를 두려워한다. 평화를 위해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고 선거의례를 통해 혁명이 아닌 교체를 이어간다. 거세된 대타자는 그러한 안정된 변화 속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약속하지만 쾌락을 충동하는 인간은 물질과 이미지가 던저준 쾌락을 탐닉하거나 그게 아니면 죽음충동을 향한다. 스스로 명령하고 파괴하는 逆의 기표는 잉여향유 조차 탐닉할 수 있는 주체에게 죽음충동의 길을 반복하도록 한다. (잉여향유가 불가한 주체는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를 떠올리게 한다.) 위반, 거부, 파괴, 반자본-노동, 독재의 지지, 극단주의의 증상이 민주주의 안전한 도상을 흔들고 파괴한다.
단항기표가 열어주는 지식의 길, 그 영원한 환유의 여정을 끝내는 곳, 그 도착의 지점. 그곳에 신체가 있다. 도착은 빼앗긴 신체의 탈환이다. 그것이 문명 속에서 가능한 이유는 신체가 거세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세계가 아니라 단지 기표의 장치 속에서 잠시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기표는 마치 정교한 기계인 양 빈틈없이 물고 물리며 돌아간다. 무오류의 알고리즘 속에서 열고 닫히는 규칙적인 전류의 흐름을 타고 명령과 수행의 피드백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 알고리즘과 전도체들이 인도하는 도착없는 그 곳만이 욕망기계의 생산물은 아니다. 욕망기계는 주체를 도착없는 그 곳으로 데려가는 여정 속에 수많은 부산물을 생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욕망기계의 동력은 그 부산물을 핥아먹는 주체이기에 기계의 틈으로 나오는 그 오류의 부산물이야 말로 욕망기계의 원동력이리라.
4부 주이상스의 자매로서 진리 (2)
진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식하는 내가 어떻게 나 밖에 실재를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판단과 판단대상의 일치”를 어떻게 보증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판단과 판단대상의 일치의 문제를 일종의 ‘철학의 스캔들’이라고 이름합니다. 그것은 철학이 현존재의 존재를 ‘폐쇄적인 주관적 사유주체’로서 단정하고, 그것 바깥에 있다고 가정된 실재를 직관을 통해 표상하는 장치로 이해한 것에서 시작된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라깡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메타적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가 비판한 철학의 스캔들은 왜 일어났는가? 하이데거 이후 우리의 상식은 왜 여전히 스캔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가?
무의식은 동어반복의 지식이다.
그것은 실재-대상-몸에 표지된 최초의 문자다.
문자는 대상을 표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살해하기에 더 이상 대상-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을 대체하고 스스로 몸이라고 선언한다. 문자는 살해를 통해 표현한다.
“나는 나다”는 죽음의 표지다.
오이디푸스는 무지하지 않았다. 그는 예언자의 지식을 알고 있었기에 행동할 수 있었다. 행동 해야만 했다. 이미 근친상간의 타부는 그에게 강력한 금지의 지식이었다. 그가 모른 건 반만 말해진 지식의 이면이었다. 그가 피해 달아난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가 코린스의 폴뤼보스 왕(키워준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안도하면서도 그 왕위의 영광을 꺼려했던 이유, 즉 저주받은 동침의 대상으로서 두려워 했던 왕비(메로페) 역시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오이디푸스 그는 무지했다. 그는 아폴론(포이보스)의 예언을 알았으나 그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해석대로 자신이 자란 코린토스를 떠나 떠돌았고 테바이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는 무지 속에서 라이오스 즉 아버지를 살해했으나 그것이 곧 어머니와 결혼하는 이유일 수는 없었다. 부친 살해가 곧 주이상스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부친 살해는 주이상스를 금지하는 죽음의 선언이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이디푸스의 존재 조건이다. 그것은 주이상스를 위해 행해진 것이 아니라 주이상스를 낳은 진정한 아버지의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