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 그가 나에게 암퇘지! 라고 했어요. 순간 나는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죠.
a: 그가 왜 그런 말을 했죠.
P: 내가 그의 여자친구와 사이가 안 좋기 때문이겠죠. 그 여잔 내 욕을 했을 거에요.
a: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P: 내가 이혼했기 때문이겠죠. 여자들이 그렇자나요. 처음엔 동정하는 척 생각하는 척 하지만 결국 잡아먹지 못해서… 시댁하고 다를 게 없어요.
a: 시댁도 그렇군요.
P: 그랬죠.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어요. 뭐든지 나 때문이라고, 남편 일이 잘 안되는 것도, 시누이도 시어머니도 모두 나를 비난했어요. 남편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런 시골 구석으로 시집가는 건 정말 실수였어요. 엄마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a: 엄마가 무슨 말을 했나요?
P: 엄마는 처음부터 이 결혼을 반대했어요. 결혼은 비슷한 집안이 해야 한다고 했어요. 엄마도 아빠와 맞지 않는 집안 수준때문에 평생을 괴로워 했어요. 너는 그러지 말라고 언제나 말했죠. 나처럼 살지 말라고. 처음 그 남자를 데리고 왔을 때 엄마가 그랬어요 “그 남자하고는 안돼. 도시에서 산 니가 어떻게 그 시골에 가서 산다고해. 거기 가면 너만 고생해. 널 식모처럼 만들 거야. 그 촌놈들이 널 조각 조각 내서 잡아먹을 것라고 이 등신아. 넌 엄마를 보고도 그걸 모르니….”
a: 엄마의 삶처럼 될 것이라고 했군요. 조각 조각
P: 조각 조각 정육점 고기들 처럼…. 그 때 정육점에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a: 언제 말입니까?
P: 그 남자를 만났을 때요. 이웃집 여자의 남자친구. 나는 왠지 모르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난 지금 정육점에서 돼지 고기를 사오는 길이라고…
a: 왜 그런말을 했을까요?
P: 모르겠어요. 나를 이상한 눈을 보는 것 같아서… 비웃는 것 같기도 했고. 이혼녀라고 비난하는 것 같은… 해서는 안될 것을 한 사람처럼 쳐다 보는 것 같아서… 난 그냥 정육점에 다녀온 것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a: 그리고 그 가 암퇘지라고 말했나요?
P: 네 그렇게 말했어요. 분명히 그 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곤 무심하게 그냥 지나가 버렸죠. 나쁜 놈!
a: 그냥 지나갔다고요. 당신도 그냥 지나갔고요?
P: 저는 멈춰 섰죠. 몸이 떨려서. 뭔가 날카로운 것이 나를 관통해 들어가는 느낌이었어요. 그냥 지나가다니… 그런 말을 해놓고.
a: 왜 따지지 않았지요? 모욕적인 말인데.
P: 말이 나오지 않았아요. 뭐라 말할 수는 없는데 마치 엄마가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
p: 엄마가 나를 돼지라고 부르지는 않아요. 언젠가 엄마는 자기가 도마 위에 올라있는 고기같다고 했어요. 차라리 자기가 토막난 고깃덩어리처럼 잡아 먹히는게 낫겠다고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해요. 엄마를 정확히 이해해요. 나도 시댁에 있을 때 매일 그런 생각을 했어요. 시골 구석에서 식모같이 사느니 차라리 고깃덩어리 처럼 먹혀버리는게 났겠다고…
a는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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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는 왜곡된 지각을 한 것 같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 대해 투사라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활성화한다. “나는 부끄럽다.” “너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너는 나를 공격한다.” “나는 욕을 듣는다.” “그가 나에게 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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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엄마의 공격적 투사의 대상이 되었다. 엄마는 자신의 삶의 불안과 불만을 아이의 잘못으로 돌렸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의 동일시 감옥 속에서 엄마의 자기 비난을 자신의 자아로 내면화 했다. 아이는 엄마와의 동일시가 주는 쾌락과 고통 속에서 근본환상을 구성하고 그것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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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의 환청은 엄마의 자기비난을 내면화하고 동일시하는 P주체의 근본환상이 P와 시댁, 이웃과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상황에서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이 타인의 공격성으로 투사되고 이웃여자의 남자친구로 부터 자신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환상은 그 남자의 입에서 암퇘지라는 환청을 만들어낸다.
a는 치료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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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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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많았군요. 정말 힘들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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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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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불쌍한 삶을 사셨군요. 당신은 그런 삶을 반복할 필요가 없어요. 스스로가 자신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 보세요. 긍정하고 받아들이고 위로하고 관계 속에서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가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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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존재만으로도 소중해요. 그리고 이미 충분히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엄마의 비난하는 목소리는 당신의 환상이지요. 지인들에게 당신의 긍정적인 면을 물어보세요. 당신이 얼마나 그들에서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았으면 좋겠네요. 물론 저에게도 당신은 소중합니다.
P는 엄마의 비난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는다. a 존재가 주는 중력은 P를 안정적으로 현실의 땅에 발 디딜수 있도록 강력히 당겨준다. 그녀는 치료되었다.
지각하는 자(percipiens)의 동일성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지각된 것(perceptum)**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 지각 주체의 기능은 문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perceptum의 구조적 다양성은 단지 감각체계(sensorium)의 다양성, 즉 percipiens의 등록 체계(register)의 다양성 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 감각체계의 다양성은, percipiens가 현실 수준에 부합하는 한 원칙적으로 언제나 극복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환각이란 객체 없는 지각물(perceptum)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저 지각하는 자(percipiens)에게 이 지각물을 설명하라고 요구할 뿐, 이때 하나의 단계를 건너뛰고 있다는 점—즉, 이 지각물이 과연 그것을 설명하라고 요구받는 지각자에게 일의적인(univocal) 의미를 전하는지를 묻는 단계를—깨닫지 못한다.”
프로이트의 왜곡을 하나의 질문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안에 것은 어떻게 바깥으로 던져지는가?” how can the inside be shifted outside?
a의 해석에 따르면, 엄마의 초과하는 욕망의 투사를 내면화한 잘못된 대상관계의 산물로서의 강력한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그 환상의 반복 속에서 죄책감과 수치심을 경험하고 그 방어기제로서의 투사가 환청으로 재현된다는 것이고, (즉 내면화된 엄마와의 나르시시즘이 투사된 것이 환청의 원인)
이는 최초의 잘못된 대상관계에 대한 해석자의 지식을 통해 내담자가 자아의 왜곡을 바로잡고 해석자가 제시하는 또는 보여주는 자아의 개선과 성장으로 나아가는 것 의지를 통해 치료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선 프로이트의 질문을 오해했다는 문제가 있다.
프로이트의 질문은 히스테리 증상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통합된 주체가 인지적 기능장애를 일으켰다는 관점이 아니라, 무언가가 인간을 고통스럽게 억압하고 왜곡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말로 드러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주체는 이미 견고하게 짜여진 말(명령, 경고, 유혹…) 속에서 그것을 온전히 받아 복종하기도 하고 때론 그것에 저항하고 마치 자신의 말이 아닌 듯한 분열과 소외를 경험한다는 사실때문에 프로이트는 흔들린다.
주체의 본질이 말이라는 매개물과 갖는 관계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프로이트는 그 본질에 성충동이라는 도착적 경험을 제시한다. 성기 이전에 분절된 신체나 사물에 달라 붙어있는 쾌락 그리고 그것이 심리적 에너지로 발산되고 제어되고 해소되는 긴장의 널뛰기를 묘사하면서 그는 성충동과 규범의 말이 관계하는 기계장치와 같은 심리 기제를 발명합니다.
마치 유아의 생물학적 본능 처럼 오해될 수 있는 충동의 리비도가 아버지의 금기에 의해 눌리고 찌그러지는 이미지는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어떻게 투사되는가”라는 직관적인 질문으로 이어지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이미지를 잠시 거두고 프로이트의 텍스트로 돌아가면 충동과 본능의 차이를 언급하는 논점을 발견하게 된다. 젖을 향해 돌진하는 유아의 입이 일정량의 모유를 목으로 넘긴 후 다시 젖으로 부터 멀어지는 모습은 명확한 대상과 목표 그리고 긴장의 완화라는 본능총족 모델에 부합한다.
그러나 아이의 성충동은 포르트-다 놀이처럼 반복되는 회로 속에서 드러난다. 성교와 생식이라는 번식 기계적 관점의 종족 (또는 유전자) 번식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성기라는 대상, 성교후의 긴장의 완화라는 방식이 아니다. 아이의 성충동은 이미 바라보는 눈의 있음과 없음, 입에 물려진 것의 있음과 없음, 나를 부름의 있음과 없음, 내 몸의 절편이 있음과 없음…의 자리에 붙여진 이름들, 그리고 그것에 다가가고 멀어지고, 그것이 올 것이고 아직은 오지 않았음을 통해서 만족을 지속하거나 유예하는 닫혀진 반복의 회로로 구성된다.
충동은 몸과 이름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고 욕망은 이름의 자리가 구성하는 닫혀진 회로를 따라 흐르는 리비도처럼 돌고 도는 것, 그렇기에 프로이트의 욕망은 상승과 하강의 경제적 메커니즘 처럼 묘사되고, 그 플러스 마이너스의 현상은 쾌락원칙이라는 함수로 말해 질 수 있는 것이다.
통합된 주체를 위한 인지적 기능 장애의 관점을 버리면 프로이트의 질문은 명확히 드러난다.
바깥에 있는 그것이 어떻게 “나”가 되는가? “나”라는 주체는 바깥의 그것과 어떻게 어떻게 만나고 관계하는가?”
프로이트가 던지는 단서는 아래와 같다. (발달심리학과 대상관계이론을 오가는 이들이 프로이트의 아래 설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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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루스의 상상적 기능(imaginary function of the phallus)이 양성 모두에서 동일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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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성차로 이해된 남녀가 각자의 성적 쾌락을 담당하는 핵심 기관인 남근과 질의 존재를 중심으로 성욕이 구성된다면 그것은 번식의 진화론적 계기 속에서 필연적으로 또는 우연적으로 (진화론의 선택은 오히려 우연적이기에) 욕망의 주체가 발달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성교의 기관이 아니라 남근이라는 이미지를 가졌는가, 가질 수 있는가, 잃었는가, 잃을 수 있는가 라는 포지셔닝을 통해 결정되는 성욕을 이야기한다. 남근 이미지의 자리를 두고 만들어진 자리에 주체가 앉게 되는 의자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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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 콤플렉스(castration complex)가 주체가 자신의 성을 긍정적으로 수용[assomption]하는 데 있어 규범적 단계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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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 이미지가 없다” “그것은 원래 없었다”는 진리 앞에서 그것이 없음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불안 속에서 그 상상적 팔루스에 매달리는 모습, 더 나아가 불안한 상상적 관계 보다는 더 견고한 팔루스의 체계 (팔루스를 가진 자의 이미지-이상과 그것을 갖게 되는 약속된 허구)를 받아들이는 소외 과정이 주체를 결정하고 동시에 분열의 자리로 데려가다는 것, 대상관계에서 공격 즉 위협과 불안으로 여겨져야 할 거세가 오히려 지속적인 (지치지 않는 동일한 종합적 인지 기능의) 주체로 이끈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기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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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개인의 역사 속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구조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아버지 살해’의 신화를 필연적으로 도출해낸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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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아니라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모든 개인사의 근본에 자리하는 발달적 단계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그건 가능할 것이다. 대상관계이론이나 발달 심리학 모두 그것이 근친상간적 충동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억압을 받아들이는 사회화 단계의 은유로서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왜 그 사회화 단계의 금기에 “아버지의 살해”라는 끔찍한 공격성이 수반되어야 하는가이다. 대상관계의 환상 속에서 또는 사회적 환상의 이미지를 상정하고 그 이미지와의 정상적인 동일시 속에서 욕망을 지속하는 정상인에게 사회적 이상이 “살해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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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적 규범이 상상적 자아 이미지와의 동일시가 아닌 언어적 체계로서 수용되어야 한다면 그 언어 이면에 있는 상상적 아버지는 살해되어야 마땅하다. 오히려 살해되지 않은 살아있는 이미지는 상징화-사회화를 방해하는 장애처럼 (구멍처럼) 남아있게 되면 주체는 안정화되지 못하고 계속 그 구멍을 향한 반복의 여정 즉 죽음충동의 증상이 나타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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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삶 속에 나타나는 ‘분열(splitting)’ 즉 ‘되찾아야 할 고유한 대상으로서의 대상(objet)’이 반복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야기되는 분열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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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충동이 발달심리와 대상관계, 자아심리학자들에게 주는 혼란을 상상해 보라. 부적절한 부모-자식 관계의 치료가 매우 어렵다는 변명 외에 반복되어 돌아오는 내담자의 증상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퇴행이라는 개념이다. 인간의 심리적 발달이 선형적이기 보다는 정상과 비정상을 오가는 긴장 안에서 건강한 자아의 에너지를 통해 정상의 버팀 근육을 만들어야 한다는 방식의 설명, 심신의 약화와 환경적 자극에 의한 비정상으로의 퇴행은 치료자의 버팀 근육 코칭을 통해 근력운동의 방식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설명은 매일 운동을 하며 근육의 퇴화에 저항하는 우리에게 아주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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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무기물로의 회귀성, 긴장을 무화하려는 궁극의 쾌락으로 이해하려고도 했으나 결국 그는 문명 속의 불만을 통해 상징화의 불완전함 속에서 주체가 자신을 드러내려는 충동, 즉 의자게임에서 의자를 찾는 주체로 상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기이한 단서들을 쫓아가면 결국 주체와 말의 욕망 구성의 문제를 너머서게 되면서 결국 새로운 질문을 구성할 수 밖에 없다. 라깡의 문제의식들을 참고하여 다시 질문하자면,
“이미 바깥에 만들어진 말의 체계 즉 언어-상징적 체계 속에서 위치지어진 “나”가 주체인가?”
“상징적 주체는 어떻게 위치지어지는가? 형식과 법칙이 존재하는가?”
“불완전한 상징적 주체의 증상은 상징적 형식과 법칙에 따라 해석될 수 있는가?”
“슈레버의 사례를 통해 해석된 증상 구조가 던지는 새로운 질문은 무엇인가?”
주체는 상징계, 기표 연쇄 속에서 드러나는 환상인가?
언어적 체계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일견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만도 않은 문제인 것 같다. 마치 미키17의 인간 복제 장치처럼 언어체계가 주체라는 심리적 실체를 구성한다는 것이라면 최소한 설명할 수있는 논리적 방법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하이데거적 존재론적 논변구조를 떠올리게하는 공리적 논증 형식이 등장한다. 주체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은 언어의 말하기와 듣기 행위를 통해서이고, 언어는 기억이라는 신경망 구성을 통한 시간현상을 만들어 내어 단기 또는 장기적 실체라는 환상(잔상)을 만들 수 있다.
즉 우리가 주체라는 현상을 논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론은 그것을 “보기 말하기 듣기의 물성”인 기표와 그것을 기억의 연결망 구조로서 고정할 수 있는 의미-기의로 다루는 것이다. 다만 기의가 먼저 있고, 기표가 그것을 지시하기 위한 형식으로 기능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기표가 먼저 있고 기의는 그것에 자의적으로 또는 어떤 인과적 원리에 의해 연결되는 구조인지의 문제는 언어학의 성과를 따르기로 한다. 소쉬르와 야콥슨의 연구 성과에 따라 기표의 배열이 먼저있고 기의는 자의적으로 (기표의 차이에 따라 발생하는) 연결되는 구조라고 본다. 결국 우리가 주체 또는 욕망하는 분열된 “나”라는 현상으로 대상으로서 다루기 위해 우리는 주체를 상징계적 기표 배열의 구조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바라 볼 수 밖에 없는 지적 내기에 합류 하게 된다.
주체의 문법이 있는가?
이제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 그리고 코드 현상과 메시지 현상의 논의가 등장한다. 언어적 상징계에서 구성되는 주체는 최초의 말-기표에 의해 일단 고정된다. ____야! 라고 부르는 음성, 그것은 마치 시에서 유혹의 대상을 뱀으로 대체하 듯 실재를 기표로 대체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이를 은유라는 개념으로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왜 유혹이 뱀으로 은유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역사적, 문학적 맥락은 성경의 이브가 만난 그 뱀과 숲 속에서 기이한 무늬로 먹이를 유혹하는 뱀의 이야기까지 다양하게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유혹이 뱀이어야 하는 필연성은 없기에 설명은 끝이없이 이어질 수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환유라는 개념으로 부를 수 있다. 주체는 그렇게 은유로서 일단 기표를 부여받고 그 기표를 다른 기표로서 배열하는 과정을 통해 기의라는 시간성과 상상적 대상과의 연관성을 부여 받는다. 주체는 그렇게 이름을 부여 받고 이름은 가족의 전통속에서 “성”을 그리고 “이름”- 돌림자 속에서 서열을 그리고 다른 환유 속에서 서사도 부여 받는다
주체를 구성하는 문법으로서의 은유와 환유는 소통이라는 대화의 구조 속에서 코드와 메시지의 형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코드는 주어_술어_목적어, 시제, 대명사 등의 문법 속에서 어떤 자리에 주체가 위치해야 하고 어떤 자리에 은유와 환유가 들어서는지 그리고 어떤 자리는 규정되지 않은 채 지시어(Shifter)의 자리로 남아있을 수 있는지를 규정한다. 우리가 “그것이 생각한다” 는 문장에서 그것에 자리에 “나” “너” “사람”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이미 그 자리는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로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며, 기계가 들어갈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이유도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한계 설정의 규범 속에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드가 마련한 자리에는 메시지로서의 무궁 무진한 기의의 도구들이 들어선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의미의 환유들이 들어서고 소통이라는 행위에 있어서 내용을 형성하는 건 이 자리에 들어서는 기표들의 기의 연결망들의 의해서다.
슈레버, 정신병의 문법은 무엇인가?
주체의 문법, 은유-환유, 코드-메시지의 현상 속에서 프로이트의 슈레버 판사 사례 역시 해석될 수 있다. 사실상 정신병의 증상의 임상 속에서 오히려 더 분명하게 주체의 문법이 틀어지는 지점을 보게 된다. 신경증의 구조는 임상의 경험 속에서 이미 보편적으로 공유된 상징의 문법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강박이나 히스테리의 증상이 탈문법화되는 현상을 관찰하기 어렵다. 그것을 겨우 말실수나 꿈에 대한 주체의 문법적 설명과 해석이 대부분이다. 메시지 현상 속에서 그 내용의 기이함이나 연결되는 의미망의 뒤틀림은 주체를 구성하는 언어체계에서 일어나는 자리 바뀜 정도로 설명할 수 있으나 그건 동시에 자아라는 통합 주체의 필터링의 오류, 현실 지각 기능의 문제, 나르시시즘적 과도한 동일시나 또는 자기 대상화의 과잉 현상으로 설명하더라도 문제가 없다. 오히려 상징계의 대타자의 의미망 구조에서 주체가 자리 이동을 하거나 자리를 잠시 찾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은 더 작위적이고 기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병은 아예 상징계의 문법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질적 차이를 갖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해 보인다. 통합적 자아의 기능장애 관점에서는 정신병의 단절적 증상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망상과 환청, 환각의 실체적 감각은 기능의 장애의 혼동의 수준을 뛰어넘는 경험이며 신의 말, 누군가의 말이 그 자체 실체적 명령과 감각으로 전환되는 것은 과잉된 동일시나 방어 기제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상징계 언어체계가 부정되고 주체가 되지 못한 사람에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완전한 상징계의 부정은 불가능하지만 정신병적 주체에게 주어지는 상징계는 불완전한 코드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완전한 체계로서 주어지기를 거부한 상태이기에 부분적인 메타 문법의 형식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곧 나는 ______.
너는 _________ 해야해.
나는 _________ 하고 싶어.
저것은 나에게 _______________.
나는 ______________ 되었어.
코드가 부분적으로 주어짐은 사실 통사론적 자리를 마련하고 거기에 주체와 타자, 명령과 질문, 미래와 현재 과거의 열린 지시어 (Shifter)가 주체의 자리를 대충 설정한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주체는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나는 누구라는 것인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지? 저건 뭐지? 내가 뭐로 변한거지….? 끊임없는 의심과 불안정의 감각 속으로 빠져든다. 이때 어떤 말이든 날아드는 우연 속에 정신병적 주체는 자신을 부여잡기 위한 말잡이를 시작한다.
곧 나는 죽을 것이다. 너는 나를 죽여야한다. 나는 너를 공격하고 싶다. 저것은 나에게 무한한 힘을 줄 것이다. 나는 천사가 되었다.
편집증 환자는 그의 세계를 다시 짓는다. 더 화려하게 세우지는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가 그 안에서 다시 살 수 있도록 짓는다. 그는 자신의 망상으로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우리는 망상의 형성을 병적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회복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재건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노력은 그러나 전체를 재건축 할 수는 없다. ….. 내부적으로 억제되었던 인식이 바깥으로 투사된다고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사실은 지금 보듯이 내부적으로 없는 것이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것이다.
- 편집증 환자 슈레버, 프로이트 -
그 어떤 인지적 기능 오류로도 해석할 수 없는 정신병적 주체의 끊없는 질문과 자의적인 기의적 연결은 결국 메타 문법의 부분적 붕괴와 그 균열 속에 허용된 무한한 연결의 가능성 그리고 프로이트라 리비도라 이름했던 주체의 상징화 의지 (정말 강력한 그 의지)는 정신병적 주체의 망상과 환청을 설명하는 해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질문한다. 왜 실재는 그렇게 상징화되어야만 하는가? 주체는 상징화 없이 존재할 수 없는가? 실재가 견디기 어려운 고통(주이상스)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봉합하는 상징체계를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주이상스가 견기기 어렵다는 건 억압이라는 의미망 속에서 나오는 자동 개념이 아닌가? 주체는 그 자체로 상징체계 속에서 만 드러날 수 있기에 당연히 상징체계의 구멍을 메우는 것으로만 말해 질 수 있기 때문인가? 결국 동어반복과 같은 말의 말의 말이 나열된다. 주체는 상징체계 속에서 드러나기에 주체는 실재를 부정함으로서만 드러난다는 말. 그리고 그 상징체계에서의 기표의 연쇄가 욕망의 길이니 우리는 실재를 상징화하는 욕망을 갖는다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슈레버의 주체-상징화 의지는 새로운 문법의 발명일까?
정신병적 주체로 부터 우리는 불완전한 코드화 속에서 이름을 부여하고 기표들의 자리에 자신만의 논리를 구성하여 스스로의 언어체계적 위치를 잡는 상징화 의지를 볼 수 있다. 슈레버는 자신의 이야기에 주석을 달고 지시어 사이에 위계 (상위 신과 하위 신, 천사의 서열 등)를 정하며 그 위계나 순서에서 벗어나지 않는 의미망을 구성하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자신이 여성이 되고자 하는 이유를 환유 속에서 설명하면서 그는 인류의 구원이라는 신을 소환하고 그 신의 대상으로서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위치로 놓기도 한다.
환자의 망상 체계는 결국, 자기가 세상을 구원하여 인간이 잃었 던 천국의 행복을 찾아 주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는 예언자들에게 그랬듯이 신이 직접 신령으로 인도하여 그 일을 맡겼다고 주장했 다. 그의 신경은 오랫동안 매우 흥분되어 있었는데, 그런 흥분 상태는 신을 끌어 당기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그에게 신령이 내려올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경험에 속하지 않는 일이고, 또 그에게만 보였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는 거의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먼저 그가 여자로 변형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여자로 변형되 기를 바란다고 추측하면 안 된다. 이것은 《만사의 법칙》에 따라 《그래야만》 되는 일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개인적으로는 인생에서 명예롭고 남성적인 상 태에 있는 자신의 처지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지만,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 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나 인류는 그가 여자로 변형되지 않고는 보다 나은 생활을 다시 얻지 못하므로 그가 여자로 변형되는 것은 신성한 기적에 의해 일어날 것이며, 수년 혹은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는 자 신에게만 신성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확신했고, 그래서 자기가 지구상에 살았던 어떤 인간보다 비범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 편집증 환자 슈레버, 프로이트 -
상징계의 상상적 도입과 그것의 균열에서 드러나는 실재의 재 상징화 의지… 슈레버의 사례 속에서 우리는 (라깡의) 정신분석이 통합된 자아이론이나 인지적 기능 장애 관점의 심리학에서 왜 거리를 두고 언어적 주체 (무의식적 주체)에 지적 내기를 걸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거기엔 균열이라는 공백과 재상징화의 기회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즉 능동성과 주체라는 어쩌면 메타언어가 부여한 주어의 자리를 부여잡으려는 정신병적 의지를 윤리적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인 자의 삶의 결단이지 않을까? 거기에 쾌락이 있다는 유혹도 곁들여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