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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 주체

2023.
3. 31. Cartel
자끄 라깡 핵심이론과 임상 (J-D 나지오, 2019)

무의식적 주체의 개념

연단에 오르니 거의 자동으로 라깡 박사의 세미나에 참석한 여러분들께 관대함을 바라게 됩니다. (269p)
청중의 관대함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나지오는 자신의 주제가 무의식적 지식과 그 해석에 대한 것에서 결국 주체의 문제로 변화해왔으며 라깡 선생이 강연 하루 전에 던진 주제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나지오에게 청중이 관대한 것은 자신이 라깡 선생의 갑작스런 주제 요구에 느낀 불편함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자연스레 무의식의 주체로 다가가는 자신을 알아본 무의식에게 던진 놀라움일까.
정신분석 자체의 출발점, 그것은 언어이며 언어행위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270p)
무엇인가 말하는 “나”와 알지 못하는 “나”는 같은 나일까? 언술하는 “나”를 “내”가 알고 있음은 자명한 “나” 즉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 “나”이다. 이것은 데카르트다.
알지 못하는 나는 알기를 원한다. 그것은 히스테리적 주체의 욕망의 모양이다. 거세된 나는 S1에게 S2의 생산을 요구한다. 알지 못함의 지식을 요구하는 것의 진리의 자리에는 대상a가 있다. 나지오는 이 기표의 시장에서 흘러나오는 부가가치(잉여향유)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다시 지식의 문제로 돌아간다.
지식에 대한 요구… 지식을 요구하고 제공하는 착각적인 이러한 거래가 어떤 향락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가…(271p)
지식에 대한 요구, 히스테리라는 무의식의 유형은 정신분석의 시작이며 생산되는 지식은 결국 붕괴되는 “알지 못함”으로 향하는 여정의 시작이다.
시니피앙은 무엇입니까? (271p)
그것은 무지에 대한 놀람을 통해 드러난다. 이미 시니피앙을 알고 있는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기에 시니피앙을 드러낼 수 없다. 그것은 의미의 기호들 속에서 은폐된 유물이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말에 아무런 놀람이 없다면 그건 라깡을 이미 ‘잘 아는’ 청중들의 기호다. 그 말이 실수라면, 놀라서 바로 정정한다면.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라고. 그것은 시니피앙이다.
시니피앙을 가르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주체의 죽음과 부활의 무대다. 알고 있는 “나”로 부터 발화된 말이 알고 있는 “나” 속에 그것을 가르키는 바로 그것임을 믿고 있는 주체X가 등장한다. 확신에 찬 X는 자기가 가진 그 말의 단검을 꺼내 능수능란하게 휘두른다. 그러나 주체(아닌)Y가 등장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Y의 칼은 Y와 떨어져 혼자 춤춘다. Y는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칼이 스스로 X가 휘두르는 단검과 싸우고 쓰러지는 X를 보며 Y는 자신도 모르는 승리를 거둔다. Y는 단지 칼이 춤을 추는 그곳에 따라와 있었을 뿐이다.
Y의 칼,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과의 관계로서 있다. 마치 나에게는 태어나기 이전 부터, 그리고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고 형이 있고 누나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있다. 100일, 돌, 어린이집, 초등학교, 중학교…. 중2병, 사춘기, 수능과 성인식, 대학과 연애, 이성, 군대, 철듦, 밥벌이, 직장, 결혼, 아이, 가족….. 시니피앙은 “나”의 탄생 이전 부터 이미 나의 삶의 자리를 마련해 둔다. 다만 자리만 있을 뿐 그곳에 의미를 채우는 건 아는 (알고 싶은) “나”의 몫이기에 나는 마치 그 자리를 알고 있는 듯 채워간다. 엄마의 말, 아빠의 말, 선생님의 말, 친구의 말, TV의 말, 신문의 말, 책의 말, 인터넷 속의 말… 무한대의 말들이 나에게 ‘선택은 자유이니 너는 이것이나고 저것을 고를 수 있고, 이것과 저것을 합치고 빼고 변형시킬 수 있으며, 모든 걸 의심할 수도 있는 아는 “나”다.’라고 계속 말해 준다.
“아는 나”는 언제나 그 선택들에 대하여 말한다.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은 또 거기이며 거기는 여기이고 여기는 그곳이고 그곳은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모르는 것이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았고 검색을 해보았고 “아는 자”에게 물어보았으니 항상 이어반복(동어반복) 속에서 “앎”의 순환고리를 멤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순환고리일까? 왜 앎을 말하는 여정은 끝을 만나 다시 시작으로 돌아오는 지도를 갖는가?
“시니핑앙이 대타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그것이 장차 다른 곳에서 옆에 있는 다른 시니핑앙과 결합 될 거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 그것은 대타자로부터 출발해서 대타자에게로 되돌아갑니다.” (275p)
나는 “이것이 저것이 아니고 이런 것이며 그것과도 다르다”라고 의미를 설명하지만 이미 “이것”이 있는 위치는 차이를 설명하기 이전에 이것과 저것을 통해 자리잡혀 있다. “그녀는 달라요. 그녀의 눈은… 목소리는… 태도는… 손목은 … 피부는… 나를 보는 눈은….”라고 스스로에게 사랑을 설명하는 자가 있다. 이번엔 또 다른 사랑을 이야기한다. “오늘 만난 여인은 이전에 그녀와는 다릅니다. 이번엔 진짜에요.” 또 다른 사랑을 고백하는 이 사람은 몇 번의 “그녀”를 만나고 헤어지며 자신이 찾는 “그녀”에 점점 다가가는 것일까? 시행착오를 통해 진정 자신이 알던 “그녀”를 변별해 내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주체는 욕망하는 대타자를 세우게 됩니다. (274p)
그가 찾고 있는 “그녀”는 누구일까? 없다. 아니 대타자는 알고 있다. 프로이트가 제안한 상상처럼 아이가 자기 자신의 통일된 몸틀을 보며 성충동이라 불리는 그 무엇을 하나의 욕망으로 통합하는 순간 그것은 그 무엇(성충동)을 던지는 “엄마”라는 이미지가 된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또 다른 압도적인 이미지, 좀 더 거대하고 체계적인 그것에게 자리를 내준다. 그것은 통합된 욕망을 이름하고 설명할 수 있는 “나”를 만들면서 “성충동”으로서 (비)존재하던 나를 퇴장시키고 무한의 말로 설명할 수있는 “나”(자아)를 무대로 등장시킨다. 거대하고 체계적인 그것이 대타자로서 연출하는 그 무대에서 대사는 이미 연출가(극본가)의 대본에 있을 뿐이다.
말하는 “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마치 “나는 거짓말을 한다”라는 명제가 진실일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나”를 알지 못한다는 진술도 진실이다. 거짓말을 하는 “나”는 “거짓말을 하다”는 명제의 주어일 뿐이어서 거짓말을 하는 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나”를 의식하는 “나”의 존재다. “말하는 나”, “거짓말하는 나”를 의식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말” 이전에 이미 있는 더 근원적인 “나”인가?
갈림길 앞에 선다. 데카르트 처럼 “말하는 나”를 의심하는 근원적인 “나”의 존재를 통해 주체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주체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구조화되어 있는 그것을 통해 주체를 살해할 것인지. 아쉽게도 답은 “나”를 부정하며 “나”찾는 형식 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다. “나”의 부정이 더 근원적인 “나”를 세우고 다시 그것의 부정이 더 더 근원적인 “나”를 세우고…”의심하는 나”를 의식하는 나가 또 그것을 의심하는 영원한 부정의 형식인 대타자 속에서 이미 “나”는 영원히 부정되고 있다.
우리 자신이 주체로서 주체의 이 두터운 이중성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주체에 대해 숙고할 수 없으리라. (278p, 자끄 라깡)
영원한 (주체의) 부정 형식 속에서 자끄 라깡은 주체를 부활시키고자 한다.
<작가를 찾는 6명의 등장인물>이라는 극이 등장한다. 6명의 인물은 연출가에게 말을 건다. 한 남자가 창녀를 유혹하는데 그는 그녀가 자신의 의붓딸임을 모르는 상황이 등장한다. 남자가 의붓딸을 강간하려는 순간 그가 모르는 상황을 정의(의미를 세우는)하는 아내의 시니피앙이 등장한다.
안 돼, 안 돼, 내 딸이야! (278p)
당황한 아버지는 마치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취한 사람인냥 대타자(연출가)에게 변명(항의)한다.
그녀는 그녀가 보지 말았어야 할 그러한 장소와 모습으로 있는 나를 봐서 나를 놀라게 했고, 내가 그녀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나를 보고 말았어요. 그녀가 내게 정해주려고 했던 현실은 내가 그녀에 대해서 떠맡아야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죠. (280p)
그의 대사(말)는 상황이 만든(연출이 만든) 의도하지 않은(알지 못하는) 주체와의 마주침의 당혹감을 항변한다. 그것은 연출가가 만든 주체이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다. 어쩌면 자기가 만든 주체는 없으므로 만들어진 주체를 떠 안아야만 하는 괴로움 그리고 부끄러움은 의붓딸을 강간하려 한 행위의 주체의 것일 뿐 그것이 “나”가 아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끄럼움은 대타자의 것이다. 나는 대타자를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주체화 하는 것, 다시 말해 주체가 구성되는 것은 다른 주체, 즉 대타자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대타자는 연출가의 구성물이므로 나는 그 배역의 자리를 맡는 순간 나의 배역이 되고, 배역의 자리 밖에 나는 다시 사라진다.
역할을 살기, 메소드 연기의 중요한 개념이다. 극본 속에서 처음 마주치는 인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 보다 수많은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어떤 연출이 해석한 인물이며, 어떤 배우가 연기한 인물이며, 나의 상상이 만든 전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역할을 맡은 배우가 가장 먼저 요구받는 것은 그 인물(이미지)을 살해하는 것이다. “네 상상 속에 꼬스챠(체홉의 갈매기의 인물)는 없다.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꼬스챠는 없는 것이다.”
배우는 다시 대본으로 돌아간다. 상상 속에 꼬스챠는 니나(꼬스챠가 만든 연극의 주연이자 꼬스챠가 사랑하는 연인)를 사랑하고 엄마에게 인정을 원하고 뜨리고린(유명한 작가이자, 꼬스챠의 엄마 아르까지나의 애인이자 니나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질투하며 작가로서의 인정을 원한다. 그러나 대본은 다시 묻는다. 꼬스챠가 사랑하는 것이 니나인가? 꼬스챠는 왜 새로운 연극의 형식을 고민하는가? 꼬스챠가 엄마인 아르까지나를 끝까지 애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뜨리고린은 왜 니나를 버렸고 성공을 동경하던 니나는 왜 성공한 작가가 된 꼬스챠에게 돌아가지 못하는가. 그리고 니나가 떠난 후 꼬스챠는 왜 자살을 하는가….
상상 속 꼬스챠가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질문이 배우의 머릿 속을 맴돈다. 배우는 “알지 못함” 속에서 개별 장면과 상황에서 벌어지는 대사(기표)와 행동, 상대 배우의 대사(기표)와 행동, 표정에서 오는 감각과 반응에 집중한다. 그리고 배우는 상상의 꼬스챠가 아닌 글자(기표)로서 대사를 건조하게 읽고 또 읽는다.수 많은 에쭈드 속 말들의 오고감과 행동들로 부터 내 감각이 어떤 자리를 찾기를 기다린다.
배우는 반복되는 즉흥극(에쭈드)과 드라이 리딩을 통해 결국 어떤 진실 하나를 발견한다. 배우의 삶 속에서 섬세하게 느끼고 기억한 그 감각과 말의 질감들이 즉흥 상황에서 건저 낸 실제와 마주한 배우는 그것에 자신을 건다. 그것은 꼬스챠가 갈매기를 죽여 니나 앞에 던지는 그 순간일 수도 있고, 엄마에게 붕대를 감아달라고 고백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대사가 없는 침묵의 순간일 수도 있으며 마샤(꼬스챠의 영지의 관리인의 딸이며 꼬스챠를 사랑한다)의 눈 빛을 마주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배우는 작은 진실 하나가 열어젖힌 그 인물을 떠맡으며 과거의 상상과는 다른 꼬스챠가 된다.
대사는 1막부터 4막까지 원래 있는 그대로 그렇게 흘러간다. 배우는 계속 흘러가는 대사들 속에서 새로운 인물을 발견하고 받아들인다. 그 인물은 상상의 꼬스챠로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죽는 것이다.
주체화 하는 것, 다시 말해 주체가 구성되는 것은 다른 주체, 즉 대타자 속에서 일어난다. (281p)
결국 대타자에서 대타자에게로 가는 시니피앙의 연쇄 속에서 그것을 나른 메신저인 내가 나를 살해하는 순간 주체의 가능성은 열리고 살해한 공간에 다른 시니피앙을 받아 넘어가는 순간 자신도 살해 되는 것이다. 마치 배우가 상상 속 인물을 죽이고 다른 상상의 인물을 만들어내는 그 순간에만 역할일 수 있는 것처럼말이다.
정신분석가로서 우리는 주체가 사임하고, 대타자에게로 가서 사라짐으로써 무의식적인 시니핑앙들의 연쇄를 다시 작동시킬 것을 요청하고 기대합니다. (281p)
정신분석가는 분석수행자에게 자아의 죽임을 요구하고 있으며 대타자 자체와 대화하는 (연쇄되는) 무의식의 말을 듣고자 한다. 의미를 넘어 드라이한 담화의 유형(구조)을 바라보며 연극 속 인물은 무대의 환상을 보게되고 그 환상에서 자신이 만든 상상의 인물 이미지를 살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나지오는 주체의 기표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주체는 불가능한데도 명명되고, 명명되기를 너마 ‘하나’로 간주된다는 이론적 방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따라서 영은 불가능한 것의 개념으로서 정의되며 동시에 숫자의 연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요소로 정의됩니다. 또한 주체는 시니피앙의 연쇄로부터 제외되비만 하나의 시니피앙에 의해 표상되고, 따라서 그 연쇄의 요소로 남게 됩니다. (283p)
0, 1, 2, 3, 4, 5, 6, 7, ….
0, 0+1. 0+2, 0+3, 0+4, 0+5, ….
0은 아무것도 아님이지만 그것은 수열의 움직임을 보장한다.
무의식의 주체가 ‘말하는 존재’에 미치는 시니피앙의 효과라고 정의할 때, 그것은 우리를 관통하는 시니피앙들의 행렬이 우리를 0이라는 상수, 즉 하나의 결여, 더 정확히는 연쇄 전체를 떠받치는 결여-지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84p)
시니피앙의 구조 속에서 그 결여의 자리를 표지하는 기능으로서의 기표, 주체는 알겠다. 그러나 결여의 자리를 굳이 ‘있다’라고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 자리를 표지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인간의 역사(환상의 시간성)를 구조의 반복과 대체로 바라보는 구조주의는 그런 자리를 표지할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구조의 자리에 의미가 생겨났다 사라지는 반복의 운동일 뿐, 변화도, 여정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라깡 선생은 주체라는 용어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게다가 그 용어를 사용해서 정신분석과 형식주의를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후자는 주체를 거부하는데 비해, 우리 정신분석가들에게는 주체가 실천(praxis)의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라깡에게 그리고 정신분석가에게 주체는 실천의 자료이다. 곧 주체는 단지 대타자의 자리 속에서 영원히 살해된 상태로 있는 사라진 자리의 표지가 아니라 어떤 실천의 윤리로서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