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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상스의 존재론

2023.
4. 28. Cartel

백상현, 라깡세미나17 <정신분석의 이면> 강해

1부 지식, 진리, 주이상스

1강 주이상스의 존재론 (1969. 11. 26.)

이미 해석된 세계, 담화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지식은 상처가 된다. 그 지식은 피흘리는 것으로서의 가르침 (en-seignement) 또는 시위로서 해석에 저항하는 반해석적 지식이다. S1→S2…로 이어지는 일관되고 안정된 지식의 구조 안에서 반-해석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이미 해석적 구조 속에 있다. S2의 지식의 담화가 만든 의미의 맥락을 붕되시키는 그 기원, S1으로 다가갈 수록 해석을 수행하던 의미 연관의 한계를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은가? 왜 언어의 시원, 그것에 대해 묻지 않는가? 우리는 지식이 올바르게 건설되기 위해사는 그 누구도 시원에 관해 질문하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L. Seminar 17 1-3, 18 -
시원을 묻지 않는 건 지식을 온전히 보존하는 핵심적 (비)실천이다. 그것은 은폐함으로서 드러내는 이해 속 현존재의 일상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그 모든 지식의 주인이자 그 넘어 대타자의 말처럼 느껴지는 그 기원의 장소로 가려는 S2→S1으로의 반이해적 여정을 이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라깡이다.
S1, 그리고 S1이 궁극적으로 욕망하는 a에 대해 이야기하자. 우선 시작이자 끝인 S1에 대해서.
지식은 S1→S2의 메타 구조를 가진 추상적인 자리에서 교환되고 생산되는 의미다. 따라서 S1은 당연히 S2로 향하는 것이다. S2로 S3로 향하는 환유 속에서 S1도 끊임없이 해석된다.
그러나 세미나 17에서 일방향의 환유 역동은 은폐된 자리를 드러낸다. S1이 가리고 있는 거세된 주체가 드러나고 은폐된 자리에 있는 그 주체가 S1을 통해 드러내는 욕망은 S2 아래 가려진 그것임을 고백한 것이다.
S1은 이제 주체를 살해하여 S2에게 공양하는 것이 아니라 S2 뒤 있다고 상상되는 상징계 대타자를 불러내고 모욕하는 개입자로서 새롭게 등장한다. 라깡은 자신의 강의가 이미 청중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된 것이 말해지는 것이며 자신은 세미나 17이 행해지는 법대 강의실 공간이 만든 해석 속에서 시위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하듯 법의 기원에 대해 질문하는 도전을 시작한다.
법은 담화가 만든 세상의 모습이다. 기표가 연결되어 이어지는 법의 구조 속에서 주체는 쾌락을 안전하게 탐닉한다. 쾌락의 어머니는 법이기 때문일까. 법이 태어난 그 최초의 지점은 기원의 말이 있었을 것이다. 말이 체계로서 변화하는 그 순간의 지점에 기원적 법이 있다. 그것은 S1이다. 그리고 그것은 S1 이전에 실재하던 잔인한 대타자를 거세한다. 동시에 실재의 대타자의 대상으로 주이상스인 주체 역시 함께 거세된다.
대타자와 그것의 주이상스를 거세하며 표지하는 S1은 태고의 지식이다. 태고의 지식은 거세하는 동시에 상실의 자리를 표지하고 그곳에 대타자의 주이상스가 있음을 알리는 깃발이 된다. 거세된 주체를 표상하는 S1은 두 방향으로 나아간다.
상실의 자리에 있는 대타자의 주이상스로의 길은 죽음의 길이다. 공동체의 법, 거세된 대타자가 주는 욕망의 바른 자리를 벗어나 타락하고 부적절하며 건강하지 못하고 위험한 죽음의 길로 반복해서 인도하는 죽음충동은 거세가 만든 흔적의 지식, 무의식이다. 반면 거세된 상징계의 대타자로 향하는 길은 안전한 쾌락의 길이다. 그 길은 언제나 안전바, 친절한 표지판을 통해 자칫 상실의 자리로 넘어갈 위험을 적절히 제한한다. 그 안전바와 표지판의 지식도 역시 무의식이다.
“계속해 보죠. 주이상스의 교차점(그냥 주이상스가 아니라 그 교차점에 있는 주이상스 말입니다)그것은 분명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겁니다. 주이상스의 교차점에 있는 그 특별한 주이상스는 그것이 성적 주이상스이기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성적 주이상스를 상실한 곳에 위치한 주이상스, 즉 거세이기 때문입니다. 성적 주이상스와 만나는 그 지점에서 몸에게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그 래디칼한 것을 생성되는 것 (프로이트가 말하는 반복의 우화 속에 있는)이 함께 나타납니다.” - 세미나 17, 1-3, 18 -
라깡은 S1을 통해 S2로 재현되는 주체 뿐 아니라 S2에게 상실의 자리를 표지하는 S1을 드러내는 주체 또한 동시에 이야기하며 특별한 단항 기표의 기능을 부여한다. S1은 상징계의 입구인 동시에 상징계의 출구로서 삶의 시작이자 죽음의 시작인 지점이다. 그것은 법, 거세된 대타자 앞에서 주체의 존재를 반복해서 증거한다. S2를 반복해서 흔들고 불안하게 한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제23조  ①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②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
③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ㆍ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
법의 무의식적 반복을 이야기해보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확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국가-정부의 기원에 가까운 S2로서 헌법 1조의 근본적이고도 추상적인 기표 역시 두 방향으로 흔들린다. 굳이 최초의 S1-기표를 꼽으라면 그것은 逆(역)일 것이다. 군주제의 기표가 흔들리며 잔인한 왕을 드러내고 국가의 폭력이 성군으로서의 군주라는 상징적 대타자를 흔들어 댈 때 민중이 찾은 반복의 자리는 왕을 죽이는 잔혹한 대타자의 자리, 그것을 표지하는 “逆”의 기표였을 것이다. 군주제-S2가 대역죄라는 금지로 해석하고 울타리 친 그 공백에 자리에 민중은 易姓혁명의 무시무시한 새로운 S1과 헌법 1조의 S2를 긴 시간 동안 피로 써나갔을 것이다.
인민주권-S2의 연쇄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 평등과 자유라는 물렁한 기표로 환유-생산되고 그것은 재산권과 공공복리의 제도로 이어진다. 모든 인간의 존엄성, 그것을 떠바치는 주권이라는 개념은 逆의 표지가 향하는 민중이 상실한 그 자리에 이데아로 자리잡는다. 문제는 그 이데아의 자리는 영원히 먼 쾌락 만이 있을 뿐, 오늘 현실은 사막과 다름 아니라는데 있다.
민주정체의 이데올로기는 그래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 속에서 쾌락의 자리를 마련한다. 내 것, 더 많이, 더 높이, 더 특별한 곳으로 가는 욕망 여정 속에 우리는 먹고, 만지고, 입고, 보고, 냄새맡고, 보여지고, 보고, 부시고, 만들고, 지배하고, 복종하고, 속삭이고, 들으며 逆의 기표와는 거리가 먼 쾌락에 빠져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한다. 그 쾌락이 너무 과도하여 넘어갈 것 같으면 적당히 나누고, 끌어내리며 평등이라는 안전대이자 표지판이 민주주의 이상으로 가는 여정을 지킨다.
문제는 민주주의의 이상, 상징계의 대타자를 향하고 있는 최초의 기표가 “逆”, 주권이라는 사실이다. 주권은 바꾸라는 스스로의 명령이다. (칼 슈미트는 주권을 국가를 거스르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파괴이고 동시에 세움이다. 민주주의의 이상은 파괴를 두려워한다. 평화를 위해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고 선거의례를 통해 혁명이 아닌 교체를 이어간다. 거세된 대타자는 그러한 안정된 변화 속에서 모든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약속하지만 쾌락을 충동하는 인간은 물질과 이미지가 던저준 쾌락을 탐닉하거나 그게 아니면 죽음충동을 향한다. 스스로 명령하고 파괴하는 逆의 기표는 잉여향유 조차 탐닉할 수 있는 주체에게 죽음충동의 길을 반복하도록 한다. (잉여향유가 불가한 주체는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를 떠올리게 한다.) 위반, 거부, 파괴, 반자본-노동, 독재의 지지, 극단주의의 증상이 민주주의 안전한 도상을 흔들고 파괴한다.
헌법의 최초 선언은 군주를 죽이고 그 파괴의 리비도를 인민이라는 상상적 존재에게 던져준다. 주권은 그렇게 뜨겁고 위험한 것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었으리라. 국가(법인격)는 인민이라는 거세된 대타자의 대표(Representative)로서 리비도를 독점하며 쾌락원칙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라 가정되었으나 대표(재현된 상상의 인격)로 머물 수 없는 자연인은 주권이 표시한 경계의 구멍을 찾아 그 선을 넘어간 것이다.
결국 헌법의 지식, 그 지식 앞에 있는 주권, 최초의 표지로서 逆은 헌법의 주인이자 헌법을 흔드는 이방인이다.
그러나 매번 헌법이 헌법 자신의 체계를 흔들어대지는 않는다. 앞서 죽음충동이 아닌 안정된 변화의 체계, 헌법의 지식 속에서 쾌락을 탐닉하는 주체는 逆의 기표로 돌아오기 보다는 어중간한 곳에서 헌법이 준 쾌락을 즐기고 있다. 그것은 적당히 금지의 금을 밟고 교도소 담장을 걷 듯이 S2의 지식이 마련한 자리에서 먹고, 만지고, 입고, 보고, 냄새맡고, 보여지고, 보고, 부시고, 만들고, 지배하고, 복종하고, 속삭이고, 들으며 욕망의 도상에서의 차선을 교묘히 유지한다. 그것은 분명 逆을 넘어 들어오는 주이상스의 냄새가 나지만 그것(사물)과는 거리가 먼 상징계의 산물이다.
라깡은 이것을 잉여-향유라 이름한다. 그리고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의 담화 속에서 그것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S1→S2의 기본 구조에 은폐된 자리를 드러내며 4가지 담화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두드러진 주인-노예의 관계 비유를 통해 주인 담화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역시 가장 중요한 논점은 대상a, 즉 지식 속에서 쾌락이 생산되는 방식의 문제다. 지식은 어떻게 쾌락을 낳게 되는가? 고대 주인과 노예는 오늘날의 계급으로서가 아닌 사회적 기능으로서 공동체의 일부였다.
고대에는 이것(노예)은 우리 시대의 노예처럼 단지 계급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동체에 새겨진 하나의 기능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노예란 도시국가의 일부이자 가족의 일부였습니다. 국가보다는 가족의 일부가 더 적절하겠네요. 그 이유는 일종의 실용적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식이라는 것이 알려지기 전, 전체로서 지식 자체에 투명한 지식에 의해 주체가 발견되기 이전, 노하우라는 기원에 있는 그것이 어떻게 닦여사라지는지를 아는 건 중요합니다. … 즉 철학의 탄생 직전의 그것 말입니다. 운 좋게도 우리는 플라톤으로 부터 그 순간을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 그것은 주인의 계략을 통해 노예의 지식(노하우)를 훔치고, 납치하고, 강도질하는 것이 었습니다. - 세미나 17, 1-4, 21 -
라깡은 담화 곧 질서지어진 말로서 지식이 발명되는 순간은 단지 한 개인 특히 노동하는 노예가 가진 그만의 노하우가 주인에게 말로서 전달될 수 있도록 세공되는 착취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전달될 수 있는 지식의 제조 역할을 철학이 맡았다. 철학은 개별 노예의 노하우를 보편화하여 주인에게 지배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하는 말-노동이다. 지식은 그렇게 주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적절한 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것이 에피스테메 (스스로 적절한 자리에 놓음)이다. 노예의 노하우는 주인이 가질 수 있는 지식으로 전환되었으나 문제는, 주인의 욕망이 지식을 가진 노예에게 원하는 것은 노예의 지식을 스스로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은 단지 노예를 지배하기 위해, 일이 문제없이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한 권력으로서 지식을 욕망할 뿐이다. 지배하는 주인에게 지식의 에피스테메가 주는 것은 주인됨의 보증이며 주인은 보증없는 대타자로서가 아닌 노예의 지식의 의존하는 거세된 주체로서의 자신을 숨긴 채 지식을 통한 권력의 쾌락을 욕망한다.
세미나 17의 첫강의는 지식을 욕망하는 주인의 진짜 욕망을 드러내며 그리고 철학자가 그 진짜 욕망을 어떻게 지식을 통해 자극할지를 질문하며 마친다.
앞으로 음미하게 될 라깡의 4개 담화 구조에 대한 지금 생각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왼쪽 상단은 욕망의 자리다. 그것은 무언가를 욕망하는 주체이자 동시에 대타자의 대상이고자하는 주체의 자리다.
왼쪽 하단은 그 욕망하는 주체의 은폐된 주이상스다. 욕망하는 주체는 진짜 원하는 것을 은폐하며 왼쪽에 서있다. 오른쪽 상단은 욕망의 대상의 자리다. 그 자리의 대상은 수동적이지만 동시에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기도 한다.
오른쪽 하단은 왼쪽 상단의 욕망의 대상이된 오른쪽 상단의 자리의 주체가 생산하지만 역시 그에 의해 은폐된 자리이다.
상징계의 모습은 상단의 관계를 드러내지만 무의식의 실재는 하단의 환상관계를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담화 거세된 주체를 은폐하는 주인은 자신이 지식을 욕망하는 것처럼 S1으로서 욕망의 자리에 위치한다. 당연히 그 욕망의 대상의 자리에 S2가 자리한다. 그러나 은폐된 자리의 거세된 주체는 S2의 지식이 아닌 a를 욕망한다. 주인은 거세된 몸이 상실한 쾌락을 보상받길 원할 뿐 지식을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지식의 생산은 권력의 대타자를 불러내며 주체에게 대상으로서의 쾌락을 보상하는 것이다.
히스테리담화 욕망하는 자리에 거세된 주체가 있다. 이미 S1의 거세를 통과한 몸이지만 무언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다. 가부장의 지식 속에 살아가는 남자아님의 존재는 새로운 “나는 누구입니까. 내 몸에 맞는 옷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 지식이 아닌 명령을 요구하는 욕망의 대상의 자리엔 S1이 자리한다. S1은 자연스럽게 S2를 지니고 있으나 그것은 기존의 S2와 다른 것인지 알수 없다. 거세된 주체의 욕망은 명령을 요구할 뿐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몸에 맞는 옷을 달라고 욕망하는 주체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옷 자체를 벗고 나체 있고 싶어하는 이해되고 싶지 않은 a다. 무의식 실재 속에서 a는 대타자를 유혹하고 대타자는 a의 대상으로서 흔들린다.
대학담화 안정된 지식이 욕망의 자리 들어서면 더 완벽한 지식을 요구한다. 그것에 대상은 이해되지 않는 것, 즉 상징화를 거부하는 그것이다. 끊임없이 이론화하고 설명하는 해석의 상황 속에서 지식의 욕망이 은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의 기원인 폭력의 S1이다. 엄밀함을 추구하는 강박의 상징계 속에서 과학(대학) 욕망의 대상이 된 a는 거세된 주체를 낳고 있으나 이 역시 은폐된다. 무의식 속에서 숨겨진 S1의 욕망주체는 끊임없이 거세된 것을 꿈꾸며 권력의 환상을 쾌락한다.
분석가 담화 욕망의 자리에 대상a가 자리한다. 대상a가 무엇을 욕망한단 말인가? 그것은 실천으로서 드러난다. 대상a는 욕망의 자리에서 지식을 은폐한다. S2를 은폐하는 a는 우울한 몸의 주체다. 그것은 거꾸로 거세된 주체를 대상의 자리에 놓는다. 거세된 히스테리적 주체에게 지식을 은폐한 대상 a는 매력적이다. 대상의 자리에 있는 히스테리적 주체가 은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자. S1을 대상으로 놓는 대신 거세된 주체를 대상으로 놓기에 그 관계 속에서 거세된 주체는 스스로 자기도 모르게 명령한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주체가 모른다는 욕망 앞에서 나는 나다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은폐된 지식, 의미가 아닌 존재를 향한 지식이 사랑하는 반해석적 S1을 꿈꾸는 무의식적 지식의 사랑이다.
세미나 17의 기표를 처음 만나는 지금 해석으로서 자리하고 있는 말들을 써 놓았다. 이것들은 또 변화하고 다시 무너지며 새로 쓰여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계속 붙어다니는 의심하나, 과연 잉여향유의 탈타자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주체적인 잉여향유의 발명, 즉 도착과 승화의 어느 지점을 찾아 주체의 가능성을 여는 실천이 윤리적인 것일까 라는 질문을 보존하며 쓰기를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