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자로서의 나의 성향—이를테면 ‘겨자 항아리(fable of the mustard jar)’에 관한 우화를 삽입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기로 결정했다.
자아는 구조의 실패.
그것은 끝나지 않는 구조를 끝내려는 인간의 엔드게임,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실패로 돌아오는 것.
구조란 형식(form)이 아니다.
우리는 구조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위상학(topology)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중앙 자리,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보지도, 걷지도 못하는) 햄이 휠체어에 앉아 (자고)있다.
움직일 수 있는 클로브, 다리를 절지만, 그는 나오고 들어갈 수 있고, 옮기고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정해진 일을 할 뿐이다. 창문을 열고 닫기위해 사다리를 가져오고 가져가가, 커튼을 열고 닫고, 밖을 보고 확인하고, 드럼통 뚜껑을 열고 닫고, 그들을 확인하고, 햄을 덮고 있는 천을 벗기고 씌우고, 부엌에서 곡식을 쌓고 치우고, 햄의 호각 소리를 기다리고…
끝났어, 이건 끝났어, 거의 끝났어.
낟알이 쌓여, 또 쌓이고.. 순간 갑자기 더미가 되고 더미가 말도 못하기 큰 더미가 되고
난 이제 더이상 이렇게 벌을 받을 순 없어.
당장, 주방으로 가겠어. 열걸음, 열걸음 또 열걸음…나를 부르는 그 호각소리를 기다리겠지.
딱 좋은 높이, 비율의 그 테이블에 기대, 벽을 보면서, 그가 나를 부르는 호각 소리를 기다릴거야.”
- 클로브, 엔드게임 -
고정된 두 철제 통 속에 두 사람이 들어 앉아 있다. 넬과 네드, 움직일 수 없고, 움직여지기도 곤란한, 말하고, 듣고, 먹고, 먹여지고, 숨고 나오고, 죽어가고 아직 살아있는… 존재들
이들의 이름과 부름 그리고 생김세, 호칭…은 관계를 형식으로 보여준다.
햄-클로브 (주인-하인, 명령하는-복종하는, 늙음-젊음, 볼수 있는자-없는자, 움직일수 없는자-있는자…)
햄-네드/넬 (자식-부모, 봉양하는-받는, 살아가는-죽어가는…)이이과 기능의 부여(속성처럼)가 인간성의 구조를 관계의 형식으로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이름과 기능의 부여(속성처럼)는 “인간성의 구조”를 관계의 형식처럼 드러낸다.
그것 - 자아 - 초자아
그것은 충동의 저장소이자 끊임없는 생산자
자아는 충동의 조절이자 방어의 장치적 기능
초자아는 조절을 명령하는 권위로서의 기능
그것에서 흘러나와 밖으로 나아가는 리비도, 그것이 조절되는 것을 방어, 그것이 타협하고 안정화되어 자리잡은 것을 자아 라고 부르는 형식화된 기능적 실체로서의 구조는 햄-클로브-네드-넬의 관계를 가족-집안의 갈등과 타협 그리고 사랑이라는 승화를 기다리게 하는 드라마적 클리셰를 예고한다.
엄마를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를 질투하고 증오하다가
자신의 무력함과 아버지의 위협 아래서 아버지를 존경하며 따른다는 반전의 클리셰처럼
결국 삼각-환상을 너머 새로운 가족 환상을 받아들이는 반복의 두번째 시즌을 이어가는 그 오이디푸스 시리즈.
오이디프스의 형식, (구조가 아니라 구조같은 형식), 은 엄마-아빠-아들의 관계가 애증-억압-조절-안정-퇴행-조절-안정-퇴행-조절-안정…. 의 발달 서사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티고네를 낳은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따를테니. 아무튼 안티고네는 결국 태어나겠지만.
프로이트는 그 어떤 체계도, 유기체 내부의 구별된 장치로서의 실재성(reality)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로부터 당연히 이끌어야 할 함의를 종종 잊는다—그것은, 바로 이로 인해 그 어떤 체계도 ‘유기체의 전체성(totality)’이라는 공상적 실재로 되돌려 밀어넣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아들은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탄생 → 건강한 애착 → 정체성과 개성의 발달 → 사회적 인정과 역할 수용 → 성과와 자기 반성 → 자아인정과 죽음의 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그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그 아이는 이미 태어나 있다. 아름다운 삶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태어나 살아갈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으니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자아가 되어가는 아이에게 증상은 “사유”가 되지 않은 “지각”의 잔재로서, 건강한 애착의 과정, 개성과 인정의 과정, 반성과 새로운 성장의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그 문제는 결국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문제다.
하지만,
이미 태어나 있는 아이, 그래서 도래한 아이의 증상은 “사유” (그것은 지각이 발달하여 된 “사유”라기보다는 원래 밖에 있었던 기표들의 사유)가 이미 가지고 있는 공집합 (집합 기호 안에 생략된-되어야하는)의 드러남이고 그것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해결 될 수 없는 것, 그래서 이미 있는 바깥의 “사유”가 아닌 그것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된다.
이미 태어나 있는 아이, 그리고 다시 태어나야 만 하는 그 아이는 구조냐 아니면 형식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To Be or Not to be or Yet to be
아마도 아이가 결정하는 건 아니다.
아이는 형식이라 부여된 그 폐쇄적인 실체를 구조라는 자리-게임으로 드러낼 뿐이다.
햄과 클로브에게 형식이 구조가되는 계기로서 주어지는 기표들,
Finished, 이건 게임이야. 삶도 관계도 그 어떤 진짜도 아니야. 끝내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Whistle, 햄과 클로브의 주종관계의 기표, 상호 의존-기다림의 기표, 호각에 대한 의미가 변화
Laddar, 클로브의 노동, 창 밖에 것을 보는 것, 클로브만이 볼수 있는 것, 노동이자 해방의 가능성, 사다리는 없어져야 노동이 사라지겠지만, 그것 없이는 밖을 보는 클로브만의 행위를 할 수 없는 것.
Pill, 햄이 원하는 것, 클로브가 가져다 줄 수 있으며, 클로브가 시간을 핑계로 줄수도 안 줄 수도 있는 것, 햄이 클로브에게 애걸하여 요청하는 것.
.(침묵), 서로를 없는 것으로, 욕망의 대상으로, 상실로, 불안의 원인으로 만들 수 있는 것, 끝, 죽음, 잠, 다시 시작의 계기로서 있는 그 침묵
관객은 기표를 통해 “말”과 “자리” (또는 말-자리)를 바꾸는 햄과 클로브를 보면서,
“햄”이 원하는 건 뭐지? “햄”은 교활한 자인가 아니면 돌봄을 원하는 괴팍한 노인인가?
“클로브”는 떠나고 싶은 건가? 아니면 “햄”에게 연민을 가졌나?
….
스스로에게 묻는다. 눈도 보이지 않고 걷지도 못하는 교활한 노인이 순진한 클로브를 어떻게 조종하지, 오히려 클로브가 햄을 농락하는 건 아닐까…
두 자아를 하나의 욕망으로 환원하고, 그들의 말-자리를 전략으로 바라보면서 계속 묻고 있다.
“나의 근본적인 욕망은 무엇일까?”
“나의 본질인 그 충동, 비록 그것이 혐오스럽더라도, 그것은 무엇일까?”
“나의 증상은 무엇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지, 증상의 실체를 알면 나는 이것을 조절하고 승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질문들,
나의 자아를 하나의 욕망으로 환원하면 “나”의 증상은 기능의 문제이자 해결을 통해 통합된 자아-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는 그 기대 속에서 하는 질문들.
“아이는 자기 자신 안에, 자기 자신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타인을 통해,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 그는 이미 기대, 기획, 속성들의 극점이다.”
….
이 말이 단순한 상투어가 되지 않으려면, 그가 말하는 ‘기대들과 기획들’이 어떻게 아이의 무의식 속에서 작용하는가를 강조해야만 한다.
관객은 이 질문을 마치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한다고 착각한다.
관객은 “타자”의 눈으로 자신을 객관화하는 방법으로 무대의 캐릭터를 또는 연극 속 자신을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그 “타자”는 누구일까? 타인과 대화하며 그 타인이 나에게 주는 말, 또 다른 타인이 나에게 주는 말,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주는 그 말들을 서로의 끄덕임과 알아 들음의 눈짓, “맞아”라는 음성과 “끝말잇기처럼 이어지는 말의 연쇄”가 증명해 주는 그 상호 인정 속에서 형성되는 “객관”의 이미지가 바로 그 타자인가?
상호 인정의 “타자”를 통해 태어나는 “자아”라는 드라마를 위한 무대라면,
햄과 클로브는 결국 서로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함으로서, 과도한 방어 또는 회피, 또는 퇴행적 나르시시즘 때문에 상호 인정의 “장”을 만들지 못한 고립된 주체,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끝, 호각, 사다리, 약… 기표들의 등장과 기표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햄과 클로브의 말-자리 게임,
그 그리드의 타자 위에서 멈춤과 미끄러짐, 있음과 사라짐으로 드러나는 햄과 클로브라면,
“타자”는 이미 그리드로 “햄”이 끝내려는 것 “클로브”가 끝내려는 것으로서 먼저 있는 것이다.
“끝”이 덮지 못하는 그리드 위에 빈 사각형에 “햄”과 “클로브”가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보다 더 강했고, 그것이 갑자기 나를 엄습했다.
“타자”의 그리드, 타자의 기표들, 그 사이 빈 자리들에 “나”가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감정, 감각, 지각, 의미부여, 공감… 저항, 공격, 회피, 부인…. 이것들이 “타자”로서의 기표들에 대한 “나”의 환상이자 고착의 효과라고 하자.
프로이트는 그것에 대해,
그것(id)은 무구조적이다.
무의식의 요소들은 부정을 알지 못한다. (모순이 그대로 존재한다)
그것에는 ‘침묵(silence)’이 지배한다.
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가득 차 있다고 하는 충동은,
•
원천(source): 신체 내부의 긴장 상태
•
목표(aim): 긴장 완화
•
대상(object): 긴장을 풀어 주는 외부 대상
•
추진력(impetus): 긴장을 유발하는 동력
의 구조 속에서 기능하고 있다고 했다.
이드는 일견 저수지이자 비축고(reserve)와 같다. 그러나 그 안에서 생산되는 것은—기도의 메시지이건 고발장의 서신이건—모두 바깥으로부터 온 것들이며, 내면에 쌓여 있는 것은 거기서 잠들기 위해 그러한 것이다.
“이드 내부에 침묵이 지배한다”고 말하는 텍스트의 불투명함(opacity)은 이렇게 걷힌다.
그 침묵은 은유적(metaphorical)인 것이 아니라, 주체가 기표(signifier)와 맺는 관계에 있어 반드시 추적되어야 할 대립(antithesis)과 연결되며, 그 기표는 명시적으로 죽음충동(death drive)으로 지시된다.
수 많은 편지들을 베고 자고 있는 아이. 눈을 뜨고 있는 사자는 열어보지 않은 기표의 봉투, 어쩌면 그 빈 봉투에 적힌 수신자와 발신자의 이름만을 발음하는 기계처럼 입을 벌리지만, 우리는 그 속에 잠든 아이를 볼 필요는 없다. 주체는 잠든 아이가 아니라 입을 벌린 “말”하는 기계이니까.
주체는 말 속에서 등장한다.
말하는 주체는 코미디언이다. 어쩌면 무엇으로도 변하는 미스틱처럼 무엇이 본 모습인지 알 수조자 없다.
“merde”(똥) - “merdre !”
merde + i (모음 하나 추가) → meirde → Meirdre
- 수비학의 [13, 5, 9, 18, 4, 18, 5] = 72 (바벨에서 흩어진 72가지 언어, 모세의 72인 후계자…)
merde의 자음·모음을 재배열(anagram) → Mairdre (Admirer. 감탄할 만한)
수세기 동안 삶과 문학 속에서 어리석은 자—오, 셰익스피어—에게 진리에 닿는 자리를 열어 두라는 숙명을 프로이트가 밝혀낸 바로 그 자리에 접근 가능케 하는 임무가 부여되었음을 환기하려는 나의 의도로만 받아들여주기 바란다.
주체는 “빈말” 속에서 시끄럽게 침묵한다. 그것이 말하게 하려면, 거꾸로 침묵을 통해 또는 동어반복적 질문을 통해 잠자는 그것을 깨워야 한다.
“je crains qu’il “ne” vienne”(그가 오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가 안 올까 싶어.”
( ) 뭘 원해?
내가 아니면 네가 아니면 아무도? 무엇을 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원하는 것이 “나”인가 아니면 “너”인가 아니면 답변을 들어야 하는 것이 “너”인가 아니면 “나”인가.
이것은 왜 질문이어야 만 하는가? 대답이라는 자리를 남기고 누가 대답해야 하는지는 비워둔 것이어서.
주체가 그 기표를 찍어주는 이 질문은, 다른 어떤 반향도 만나지 못하고 오직 죽음충동의 침묵 만을 마주한다.
햄
클로브!
[클로브 멈추어 서지만 돌아보지 않는다.]
아니다.
[클로브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클로브!
[클로브 멈추어 서지만 돌아보지 않는다.]
클로브
이게 우리가 말하는 퇴장이죠.
햄
고맙네, 클로브. 네 수고에 말이야.
클로브
(제빨리 돌아서며) 아니요. 제가 고마웠죠
햄
서로에게 고마운 거지.
[잠시 멈춤. 클로브는 문 쪽으로 간다.]
하나만 더.
[클로브 멈춘다.]
마지막 부탁인데
(클로브 퇴장)
이 이불 좀 덮어죠.
[긴 정적]
안 되나? 좋네.
[잠시]
이제 내 차례군.
[잠시, 지친 목소리]
오랜 엔드게임은 옛날부터 패배로 끝나고, 또 지고, 지고 지는 일로 마무리되는 거지.
[잠시, 좀 더 기운차게]
어디 보자.
[잠시]
아, 그래!
(그가 전처럼 지팡이를 지렛대 삼아 의자를 움직여 보려 한다. 클로브가 길 나설 준비를 하고 등장한다. 파나마 햇, 트위드 코트, 팔에는 비옷, 우산과 가방을 든 채, 눈은 끝까지 햄을 고정한다. 햄은 포기한다.)
좋아.
[잠시]
(그가 지팡이를 내던지고, 개도 내던질 참했으나 마음을 고쳐 멈춘다.)
편히 쉬게.
[잠시]
자, 이제?
[잠시]
모자를 들고
(그가 중절모를 들어 올린다.)
우리… 이 엉덩이에게도 안식을… !
[잠시]
그리고 다시 쓰고
(그가 다시 중절모를 쓴다.)
빌어먹을.
[잠시. 안경을 벗는다.]
닦고.
(손수건을 꺼내 접지 않은 채 안경을 닦는다.)
그리고 다시 끼고.
(안경을 다시 쓰고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올거야. 이제 몇 번만 더 몸을 비틀면 부를거야.
[잠시]
시 한 구절.
[잠시]
너는 기도했지.
[잠시. 스스로 정정하며]
넌 밤을 울부짖었지, 오고 있어—
[잠시 멈춤. 스스로 정정하며]
내려왔어: 이제 어둠 속에서 울부짖어라.
[그가 되뇌며 읊조린다]
“너는 밤을 울부짖었지; 밤이 내렸어: 이제 어둠 속에서 울부짖어라.”
[잠시]
훌륭하게 표현했지.
[잠시]
자, 이젠…
[잠시]
아무것도 없는 순간들, 늘 그렇듯 지금처럼, 시간은 결코 없었고 시간은 끝났지, 계산은 끝났고 이야기도 끝났네.
[잠시. 이야기체로]
그가 아이와 함께 할 수만 있었다면….
[잠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아이를 버리고 싶지 않지 않아? 네가 시들어 가는 동안 그가 피어나길 바라나? 마지막 수많은 순간들을 달래 주기 위해 거기 있길 원하나?
[잠시]
그는 알지 못했지,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올 죽음만을 알 뿐. 하지만 그대여! 요즘 세상이 어떤지 알아야 하지 않나. 아, 내가 그에게 책임을 알려주었는데…
[잠시. 평상시 목소리로]
그래, 그게 우리고, 그게 나지, 그걸로 충분하네.
(그가 호루라기를 입술에 대고 망설이다 떨어뜨린다.)
그래! 진짜!
(그가 호루라기를 분다. 잠시. 더 크게 분다. 잠시.)
좋아.
[잠시]
아버지!
[잠시. 더 크게]
아버지!
[잠시]
좋아.
[잠시 멈춤]
이제 가는군.
[잠시]
마지막은?
[잠시]
버려라.
(그는 개를 내던지고, 목에 걸었던 호루라기를 떼어낸다.)
내 경의를 표하네.
(그가 호루라기를 객석 쪽으로 던진다. 잠시. 고요히 숨을 들이쉰다.)
클로브!
[긴 정적]
안 되나? 좋아.
(그가 손수건을 꺼낸다.)
자, 우리가 이렇게 놀기로 했으니…
(손수건을 펼친다.)
…그렇게 놀자…
(다시 펼친다.)
…그리고 더는 말하지 말자…
(완전히 펼친다.)
…더는 말하지 말자
(펼친 손수건을 가슴 앞에 펼쳐 든다.)
고집 센 늙은이 같으니.
[잠시]
너는… 남고…
[잠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팔걸이에 팔을 얹은 채, 정지.]
(짧은 정지)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