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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이상스의 존재론 (3부 진리와 분석가)

백상현, 라깡세미나17 <정신분석의 이면> 강해

3부 진리와 분석가 (2)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복음의 말을 빌려 태초에 단항기표가 있어다고 말해보자. 태초는 역사적이라기 보다 우리가 상상으로 가정하는 그 태초이다. 그것 외엔 태초를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 실재도, 신체도, 주이상스도 아닌 기표가 태초의 자리에 놓이는 까닭은 기표의 표지 이전엔 그 어떤 것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이상스, 신체, 실재는 표지되기 이전엔 표지(거세) 이후 드러나는 주이상스가 아닌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공백, 무, 말해지기 이전의 그것이라는 의미없는 말들로 말해질 뿐이다. 하지만 단항기표가 신체에 표지되는 순간 모든 것은 동시에 일어난다. S2로의 의미-지식의 생산, S2로 대리하면 탄생하는 주체, 상징화의 불완전함, 잉여향유, S1으로의 회귀와 반복…. 이 모든 현상은 S1의 등장과 함께 일어난다.
태초의 단항 기표의 등장과 함께 죽은 대타자(팔루스)의 기표의 환유 속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면 우리는 안정된 삶을 살고 있겠으나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완정성의 환상이다. S1은 S2로 끊임없이 환유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실패하며 세어들어오는 실패의 주이상스를 마주한다. 주체는 바로 이 실패의 순간이자 실패의 사건이며 그 주체를 잉여향유로서 감각한다.
결국 우리가 주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익숙해야만 하는 죽은 대타자의 대상인 자아 (증상적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그 익숙함을 빠져나가는 낯선 것으로서의 그것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으나 외부로 부터 온 기표에 의해 표지되어 인식되었으니 외부에 의해 익숙해진 낯선 내부(외밀한 것)이리라. 따라서 이웃은 외계인일 수 없다. 외계인은 오히려 외부에서 온 익숙한 기표의 지식이 만든 상대적 낯선 존재자이다. 오히려 이웃은 이해할 수 없는 나이며 이해할 수 없는-그래서 매일 익숙한 듯 망각하며 살아온 나와 내 주변이다.
“라깡이 이해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란 동일시가 불가능한 대사으 동일한 일자의 권력에 의해 셈해지지 않은 대상, 상징화에 저항하는 대상에의 욕망에 대한 명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주이상스에 대한 사랑이며, 절대적 차이에 대한 사랑이다. -p.74-
분석의 무대에서 주체는 S2의 실패의 순간 드러나는 모든 것이며, 분석가는 팔루스의 자연스러운 논리적 환유를 위해 그것을 감추거나 재빨리 해석해 사라지도록 놔두지 않는다. 분석의 무대에서 분석주체(배우)로 부터 분석가가 찾고 있는 것은 배우가 대사를 익숙하고 완벽하게 말하는 순간이 아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대사를 다외운)배우가 대사를 버벅대며 무대에서 익숙해진 자신을 낯설게 느끼는 순간(흔히 무대 위에서의 패닉)이다.

글쓰기의 주이상스

반복적 글쓰기, 그것은 쓰고자하는 것을 향해 다가가려고 할 수록 쓸 수 없게 되는 글쓰기이다. 매번 같은 형식의 글을 소재를 바꾸어가며 이해하기 쉽게 써주는 존재망각 속의 글쓰기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표의 무한한 환유로 흘러가는 것이다.

대상a라는 유령

다시 태초에 S1있었다. 그걸 기억하는 반복(지식)이 잉여향유를 생산한다. S1으로의 반복적 회귀(S2의 실패)는 결국 상실의 자리를 드러내는 반복이며 그것은 우리가 S1과 함께 탄생시킨 주이상스의 기억(환상, 모든 기억은 환상이다)을 소환한다. 잉여주이상스가 소환되는 그 자리를 우리는 대상a라고 부르고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S1 이전에 그것을 나타내려는 유령같은 기표다.
거세된 신체는 팔루스를 욕망하거나 잉여향유를 탐닉한다. S1의 도입이 요구한 건 S2로의 환유를 통해 도달할 것이라고 가정되는 그 완벽하고(그래서 죽은) 대타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지식이 가정한 대타자는 죽었기에(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은 결국 S1으로 다시 돌아올 테지만 어쩌면 죽은 대타자를 향한 환유의 영원한 여정을 멈추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환유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매번 실패를 경험하고 매번 대상a로의 자리를 곁눈질 하길 멈추지 않는다. 그 곁눈질이 보여주는 반팔루스적인 환영은 사막같은 팔루스의 여정에 오아시스다. 어쩌면 우리는 팔루스의 여정을 근엄하게 이야기하면서 대상a의 쾌락을 몰래 즐기고 있는 것이다.
“모두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요.”
“네. 무대와 역할 속에 몰입하며 빠져든 환상도, 반쯤 가려진 거울에 비친 추한 모습 (다시 응시 아래 웅크리고 앉아 두려워하는 아이)의 모습도 모두 환상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더 실재에 가깝습니까?”
“반복되는 것이 후자라면 그것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익숙한 환상입니다”
연극 무대를 중심에 두고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쾌락의 경험을 준 환상의 막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나는 익숙한 환상을 마주한다. 다시 그 추한 모습, 사기꾼, 모자라고 언제나 한 발 물러서 되지 못하는 모습. 연습실 한쪽 벽에 커다른 거울, 커텐 뒤에 감춰진 그 거울이 살짝 열린 틈으로 나의 모습을 비추었다. 난 얼어붙고 아무 말도 못한다. 입을 여는 순간 모두가 속으로 나를 비웃고 경멸할 것이다. 싸늘한 응시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무 말도 어느곳도 바라보 못한다.
상징계 속에서 마주하는 경험이 주는 환상은 매번 실패한다. 새로운 언어를 도입하는 순간 내게 드러난 이해할 수 없는 쾌락 (그것은 환청이자 환영이자 자아를 잊어버리는 환상)으로 다가왔으나 곧 그 경험이 자리한 상징계의 지식이 파고들어 그 환상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환상의 여분이 남아 나에게 쾌락을 주지만 한편으론 팔루스가 인도하는 욕망의 길(인정받는 배우가 되는 길)로 그 쾌락을 미루고 인내하고 노력하고 겸손하라고 명령한다. 그 명령은 익숙했던 팔루스의 기억을 소환하고 하나의 지식으로 (단일한 지식으로) 나의 경험을 통합하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익숙했던 성공(인정)을 향한 팔루스 속에서 매번 실패의 지점을 발견하고 사기꾼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우울함과 허무함 속에 빠져드는 그 순간도 반복되어 버린다.
“아빠로서, 시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아” 주차장에서 사고를 낸 나에게 아내가 던진 말이다. 그 말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어떤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는지 나는 해석할 수 있으나, 그 목소리는 익숙한 환상의 막을 열어 젖히고 무대 위로 나를 다시 올려 놓는다. 그 목소리는 나를 다시 초자아 앞에 웅크린 아이의 역할로 아주 쉽게 바꾸어 버린다. 그것은 아마 무대로 부터 흘러나온 이해할 수 없는 쾌락이 배우라는 사회적 자리의 팔루스적 욕망으로 해석되는 그 실패의 지점에서 다시 찾아온 초자아의 목소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무대와 그 익숙한 환상이 하나가 되고 초자아 앞에 나는 다시 우는 아이가 된다.

문명 속 잉여향유 (앙트로)

이런 실패와 익숙한 환상의 반복은 엔트로피의 법칙이라 부를 만하다. 엔트로피가 무질서를 향하 듯 인간의 문명 역시 죽음충동, 즉 실패를 향한다. 당당히 퍼지는 물 속의 잉크처럼 엔트로피는 거침이 없다. 물론 항상성을 위한 반대의 힘, 장력이나 구심력 같은 것이 있으나 그것도 압력, 열 등의 조건에 따라 무너져 내린다.
인간 문명은 머뭇거린다. 곁눈질의 엔트로피다. 인간은 당당히 무질서해지기 보다 일상의 항상성, 팔루스의 반대 힘에 이끌려 곁눈질하며 찔끔 찔끔 세어나가는 용액처럼 흘러나오는 무질서를 향한다. 그러나 마치 압력이 터져나오 듯 거침없이 죽이고 파괴하고 가지고 노는 반문명의 엔트로피 역동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도착, 욕망기계의 도착지

단항기표가 열어주는 지식의 길, 그 영원한 환유의 여정을 끝내는 곳, 그 도착의 지점. 그곳에 신체가 있다. 도착은 빼앗긴 신체의 탈환이다. 그것이 문명 속에서 가능한 이유는 신체가 거세되어 완전히 사라지는 세계가 아니라 단지 기표의 장치 속에서 잠시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기표는 마치 정교한 기계인 양 빈틈없이 물고 물리며 돌아간다. 무오류의 알고리즘 속에서 열고 닫히는 규칙적인 전류의 흐름을 타고 명령과 수행의 피드백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 알고리즘과 전도체들이 인도하는 도착없는 그 곳만이 욕망기계의 생산물은 아니다. 욕망기계는 주체를 도착없는 그 곳으로 데려가는 여정 속에 수많은 부산물을 생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욕망기계의 동력은 그 부산물을 핥아먹는 주체이기에 기계의 틈으로 나오는 그 오류의 부산물이야 말로 욕망기계의 원동력이리라.
기계가 고장의 이면인 것 처럼 알고리즘이 오류와 이면인 것처럼 팔루스의 환유와 도착의 은유 역시 같은 것이 앞 뒷면이다. 팔루스가 줄것 처럼 하다 다시 빼앗아 던져버리는 그 것을 도착은 잡아챈다. 팔루스가 “네 몸엔 그것이 없다”고 경고하지만 도착은 그것을 자신의 몸에 새긴다. 팔루스가 의미를 흔들며 손짓해도, 도착은 의미를 해석의 놀이가 이닌 감각의 놀이로 가져와 신체를 애무한다. 그렇게 팔루스의 욕망기계가 주체를 의미의 여정으로 데려가지 못하고, 주체는 은유된 하나의 기표를 붙잡고 신체에 도착한다.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대상

태초에 다시 기표가 있었다. 기표가 데려가는 곳, 내가 기표를 잡아 데려가는 곳. 신경증적 주체가 끌려가는 곳, 도착적 주체가 도착하는 곳. 결국 그곳은 모두 대타자-주이상스의 대상 자리다. 단지 그 자리로 다가가는 주체의 모습이 팔루스(그들, 상식과 정상의 세계)가 주는 이정표의 연상-길 따라가는가 아니면 최초의 기표 감각-기억에 연접한 그곳으로 직접 다가가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결국 주체는 대타자의 향략의 대상이 되는 최초의 기억(지식) 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 기억의 장소로 부터 펼쳐지는 상상의 무대가 다를 뿐이다. 그것은 기표와 기표를 연결하는 욕망 장치를 따라 작가없는 세인들의 유령이 쓴 작품의 무대이거나 우연히 기억된 그 기표의 감각지식이 신체 위에 펼친 무대이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그 근본 환상 속에서 떠다니는 무수한 기표들 무질서 속을 방황한다.
분석의 무대에서 분석가가 행하는 것은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대상이라는 원본의 작품 안에서 분석주체인 배우가 하나의 역할-이미지에 고정되어 끌려가는 고집을 막아 서는 것, 그 이미지는 죽은 역할일 뿐이며 그런 역할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하도록 시간-공간을 주는 (보존과 기다림)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