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현, 라깡세미나17 <정신분석의 이면> 강해
4강 주이상스의 자매로서의 진리 (3)
인간의 욕망은 결여없는 대타자를 욕망함 - 진리를 향한 죄책감
진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식하는 내가 어떻게 나 밖에 실재를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판단과 판단대상의 일치”를 어떻게 보증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판단과 판단대상의 일치의 문제를 일종의 ‘철학의 스캔들’이라고 이름합니다. 그것은 철학이 현존재의 존재를 ‘폐쇄적인 주관적 사유주체’로서 단정하고, 그것 바깥에 있다고 가정된 실재를 직관을 통해 표상하는 장치로 이해한 것에서 시작된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존재자가 존재자를 인식하는 방식 즉 존재자의 인식 표상이 바깥의 실재(존재자)와 일치하는지의 판단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자신이 존재구조로서 안고 있는 세계를 열어밝힌 현존재, 즉 세계-내-존재이므로 세계 안의 존재자에 대한 판단은 사유 주체의 인식의 표상과 발화된 명제의 일치 여부가 아니라 현존재가 세계-존재자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 등 뒤에 있는 그림이 비스듬히 걸려 있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내 등 뒤에 걸려있는 그림이 실재로 비스듬히 결려있는 것을 향한 발화이지 내 머릿 속에 표상된 비스듬히 결려 있는 그림의 이미지와의 일치성의 판단을 요구하는 명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미 진리는 발화의 순간 세계-내-존재자를 개시한 현존재의 발화로서 존재자를 향한 진리일 뿐 인식론적 판단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진리 가운데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라깡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대한 메타적 질문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가 비판한 철학의 스캔들은 왜 일어났는가? 하이데거 이후 우리의 상식은 왜 여전히 스캔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가?
“왜 언어도 진리에 대한 진리를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진리는 진리가 말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렇게 근거지어지기 위한 다른 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21p)
«La science et la vérité» (1966), dans Écrits, Paris, Seuil, p. 867~868.
라깡은 하이데거의 스캔들 문제를 인간의 진리에 대한 죄책감의 차원에서 다룹니다. 인간은 진리를 발화하는 순간 나 밖에 존재하는 실재를 상상하고 그 실재를 인식하는 인간의 존재역량을 의심합니다. 모든 게 가짜고 환상이며 그 환상 밖에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한 실재가 있기에 나는 그것의 파편인 표상을 가질 수있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그 파편적 표상이 바깥에 고정불변한 실재에 닿아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의심하는 것이지요. 이 문제에 관하여 인간이 취하는 태도로서 라깡은 두가지를 제시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정신증의 편집증은 대타자에 대한 불신 속에 있다. 강박 신경증도 마찬가지다. 끝없는 의심의 지옥 속에서 대타자의 언어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121p)
(Jacques LACAN, Séminaire XI. Les quatre concepts fondamen- taux de la psychanalyse [1964], Paris, Cerf, 1973, p. 215-216).
즉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 표상과 실재의 일치를 보장해 줄 진리의 실재 - 대타자의 언어를 찾아 헤매거나, 의심을 거두고 그냥 믿어버리고 망각하는 신경증의 태도가 그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진리란 오직 신경증자들의 것이다. 진리는 대타자에 지배되는 억압된 주체들이 사로잡히는 발화의 형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언어의 진리는 그 내부에서 균열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공백을 생산하는 진리 발화의 속성이다. 무한에 연결되는 진리의 속성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적 사물로서의 “그것이 말할 때” 주체는 소환되어 “나는 말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게 되며, 이 때 주체는 무한성에 연결되는 것이다. (121p)
라깡은 명제로 부터 그 인식의 표상을 그리고 그 표상에서 실재를 분리해내는 짓은 생산적인 어리석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짓이지만 그 어리석은 헛짓을 통해 분리될 수 없는 것 즉 언어와 실재를 분리하는 시도를 통해 실재라고 믿는 것 자체가 언어의 효과임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자를 이름하는 현존재의 진리 발화를 일치성이 아닌 발견함으로 말 한 것처럼 라깡은 세계 내 존재자는 이미 산물로서 모조된 언어의 공산품이기에 언어는 이미 진리를 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라깡의 질문은 하이데거 표현으로 하자면 현존재가 세계를 개시한 세계-내-존재임을 밝히는 지점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라깡은 현존재가 개시한 세계 즉 언어적 상징계에는 균열이 있으며 그 세계의 개시성은 언제나 그 균열과 대면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와시간에서 순수이성비판의 칸트적 존재론을 인식론적 진리관의 스캔들로 비판했다면 라깡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의 윤리적 대타자에 대한 환상을 비판적으로 다룹니다. 칸트가 정념의 족쇄로 부터 인간의 사유를 해방시켜 자유(자율)를 주고자 순수이성을 탐구했다는 관점에서 이성과 실천은 인식과 윤리(의지)의 문제로서 구분되지만, 이미 인간의 사유는 그 자체로 언어의 산물이며 언어가 만들어낸 산물을 대상으로 발화하는 것이라면 인식으로서의 이성 그리고 실천으로서의 의지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개시한 현존재, 라깡의 주체에게는 구분되어 다뤄질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라깡은 ”사드와 함께 칸트를“이라는 텍스트에서 대타자의 상징계가 자신의 논리를 극단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도달하게 되는 지점이 큰사물의 장소라는 사실을 칸트와 사드를 비교하며 해명한다. 여기서 칸트는 자신의 엄밀한 논리적 윤리학이 도달하는 곳이 죽음충동의 장소라는 사실을 외면하려 한다. 반면 사드는 바로 여기서부터 자신의 기이한 윤리학을 출범시키고 있었다. (123p)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정언명령으로서의 위 실천이성의 최상의 법칙은 그 어떤 근거나 논리적 증명을 요하지 않습니다. 명령은 그 자체로 타당하며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진리의 다른 이름으로 ‘너의 의지의 준칙’ 즉 주관적 도덕 주체가 당위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명령일 뿐입니다. 단항기표의 성격으로서 이것은 오직 정언명령을 발화하는 완벽한 “나”만 드러날 뿐이지요.
진리의 발화가 인간의 실재에 대한 욕망에 기인한다면 그것은 상징계의 논리가 무한히 뻗어나가는 보편성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욕망이 그러하듯 보편성을 향한 여정이란 언제나 좌초하기 마련입니다. 보편성 자체가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그 좌초의 지점에서 진리 언어 그 자체는 영원성과 보편성의 환상을 잃어버리고 다른 환상을 가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대타자입니다. 그것은 상징계의 대타자에 덧씌어진 빗금을 들어내고 진자 대타자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 자신 위에 빗금에 의해 포개지는 S, 이러한 기표가 가리키는 절대적 의미 말입니다. 그곳에서 표지되는 것을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이 장소에 응답할 수 있는 기표는 단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나>, 초월적인 것으로서의 <나>인데요, 그러나 그것은 또한 환영적이기도 합니다.” (126p)
상징계의 진리언어, 즉 지식이 가정하는 완벽한 메타 진리의 위치는 완벽한 대타자의 환상이 자리하고 그것은 빗금친 S, 진리의 발화자인 주체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결국 환상의 대타자에 근거한 S1은 연쇄되는 지식의 기표와 그 의미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대타자의 환상은 신의 말씀으로, 이데올로기적 진리로, 무오류의 정언명령으로, 공동체의 시조 신화로… 무수한 형태로 변형되어 퍼져나갑니다.
“초월적 ‘나’는...그 누구에 의해 하나의 지식이 발화되건 간에 어떤 의미에서 S1을, 주인의 ‘나’를 진리로서 은폐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서의 ‘나’는 아주 정확히 말해서 순수 명령형의 S1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나’가 자신을 숨기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명령형은 언제나 2인칭이기 때문이지요.” (127p)
하이데거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면 존재물음을 망각한 현존재가 세인들의 호기심, 잡담, 애매성 속에 빠져있는 상태, 즉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가 비진리 속 즉 “알지 않으려는 의지” 속에서 살아가는 망각의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진리에 빠져있는 Dasman (세인)으로서의 존재양태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죽음이라는 부조리한 기표를 마주한 현존재의 불안때문이라고 표현합니다. 라깡은 이를 상징계 대타자의 결핍 즉 지식을 진리로서 말하는 S2의 은폐된 자리의 S1의 정체가 시시 각각 증상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S1의 정체란 결국 발화의 주어와 실제 발화의 주체의 간극, 즉 명령하는 2인칭 속에 숨은 1인칭의 주체입니다. 그리고 그 주체가 발화하는 것은 발화하는 무근거의 정언명령의 내용과는 거리가 먼, 반대의 거짓, 오류, 무의미, 실수로서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렇게 거짓말하고 실언하는 주체는 타자의 그림자로서의 자아가 아닌 진리의 순간에만 드러나는 절대적 주체입니다.
진리는 어떻게 말해지는가? 그리고 어디에 있는가?
진리는 언어적 술어일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자신의 주체로서의 모든 삶으로부터 반박되고 또한 아주 기이하여, 그 자체로서 문제시되기에 충분한 사실이 있는데요, 그것은 진리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식으로서 표현되는 속성과 같은 것으로 분리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진리는 분명 그 자체로서 파악된 언어의 효과로부터 분리 불가능합니다. 그 어떤 진리라 해도 분명 그것이 할 수 있는 한 발화되는 영역에만 위치될 수 있습니다.” (125p)
진리는 주체의 발화에 있지만 말해진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그래서 무의미한 말이자 동시에 침묵하는 주체를 요구합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진리는 현존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다만 진리가 현존재와 있을 뿐 그 진리의 내용으로서의 지식-명제가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명제가 된 발화는 주체를 필요로하지 않고 상품처럼 유통될 뿐입니다.
진리의 문법
“[...] 나는 진리에게 “나, 진리, 나는 말한다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진리가 “나, 진리, 나는 진리를 나에게 의미하도록 말한다”라는 식으로, 또는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말하도록 말한다”라고 말하게 하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진리가 말한다는 사실 꼭 그것이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말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말하고 있는 것에 관해서는, 그것은 여러분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이지요”
- 세미나16, 1969년 2월 12일 강의 -
“나, 진리, 나는 말한다.”
“나, 진리, 나는 진리를 나에게 의미하도록 말한다.”
라깡의 이 문장은 진리의 발화는 의미의 표현이 아니라 진리 자체의 표현일 뿐임을 이야기합니다. 진리는 발화될 뿐 기존 담화의 논리 안에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분석가가 내담자에게 주어야하는 해석의 한계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내담자의 무의식이 말하며 움직이는 운동 자체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것이 분석가의 일인 것이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내용에 해석을 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130p)
전이가 형성되고 상호적 무의식 관계 속에서 내담자의 잉여향유를 분석 상황 안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해석일 뿐 분석가의 본질은 진리의 발화이지 진리의 의미화(해석)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해석은 그것이 내담자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면 타자의 지식이며 진리의 발화를 억압하고 왜곡하는 주인담화나 대학담화의 구조로 상호주체적 무의식을 이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해석이 아닌 발화 그 자체를 위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리의 문법이고 그 문법을 통해 분석가는 내담자의 진리발화의 욕망을 자극해야 할 것입니다. 라깡은 아이가 매맞고 있어요라는 프로이트의 유명한 사례를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진리의 발화는 뒤집힌 방식을 취한다고 라깡을 말합니다. 아이는 매를 맞고 있는 대상인데,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의미화 될 경우 그 아이는 아버지와의 주이상스를 탐닉하는 금지된 나가 됩니다. 금지된 나는 다른 아이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누가 때리는가인데,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주이상스의 주체를 표지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이면서 금지를 넘어선 완벽한 나의 환상이기도 할 것입니다. 대타자-주이상스의 대상으로서 “나”는 이렇게 다른 아이가 매맞는 것을 엿보는 형식으로 허락된 주이상스(잉여향유)를 발화합니다.
그렇다면 주이상스는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대체된 매맞는 아이의 것인 동시에 얼굴없는 때리는 “너”일 수 있는데 얼굴없는 “너”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따라옵니다.
“하나의 신체는 형상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아버지 또는 그게 뭐가 되었든 대타자와 같은 역할과 기능을 하는 것이 여기에 주이상스의 자리를 부여하기 때문인데요, 그것은 전혀 명명된 것이 아닙니다. 형상 없는 신, 그게 바로 그런 경우인데요, 그럼에도 그것은 신체로서가 아니라면 포착 불가능합니다.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신체를 갖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은, 대타자입니다.” (132p)
얼굴없는 너는 대타자입니다. 그러나 그 대타자는 ( ) 괄호를 쳐서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문장에는 괄호이지만 그것은 분명 주이상스로서 몸이 드러내는 물질적인 것입니다. ( )로서 발화되는 숨은 주어의 문법은 그것이 정의기를 거부하는 기표로서의 S1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나)다. 라고 발화되어 ( )의 환유공간을 여는 동시에 영원히 ( )로서 남아 있는 문법 말입니다.
다시 하이데거의 현존재를 생각해 봅니다. 세계-내-존재로서 세계를 미래를 향해 개시하는 존재자로서 현존재는 그 세계를 개시하는 방식으로 염려(Sorge)를 합니다. 현존재가 존재자를 발견하는 심정성, 이해, 말이라는 구조 속에서 이미 열여 밝혀진 세계는 라깡의 관점에서 대타자의 주이상스가 발화하는 ( ) 문법이 여는 상징계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법이 물질로서의 몸과 연결되는 잉여주이상스의 대상으로서 “인간” 또는 빗금친 S가 탄생하는 것이겠지요.
주이상스는 분명 하나의 실체다. 그것이 유물론적 대상이라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라깡은 유일하게 정통적인 신앙인이란 18세기 유럽에서 득세했던 유물론자들의 그것뿐이라고 강조한다. 오직 존재하는 물질로서의 신체만을 존재로서 인정하는 태도가 대타자-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접근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체는 단순한 물질로서 끝나지는 않는다. 그것의 주이상스 효과로서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들이 산출되
기 때문인데, 언어가 그것을 자극하는 한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라깡은 우리 인류가 언어 사용의 결과로서 산출된, 잉여향유로부터 태어난 존재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 nous sommes des être nés du plus de jouir, résultat de l'emploi du langage.
물론 여기서 언어의 사용자는 언어 자신이다. 우리 인류는 그것에 의해 사용된 존재, 한 없이 대상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133p)
말은 어떻게 신체와 접속하는가? 상징계가 실재와 닿는 접점과 경계에 잉여주이상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징계의 대타자가 ( )의 문법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 )는 상징계의 환유를 촉발하지만 동시에 환유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라깡은 모세의 십계명을 설명하는 세미나7에서도 십계명의 명령이 금지하는 것, 즉 다른 신, 안식일, 근친, 살인, 간음, 탐심, 거짓에 대한 부인의 문법은 금지된 행위가 가장 근본적인 큰사물에 대한 무의식적 쾌락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지킬 수 없는 명령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사드의 반십계명, 간음하고 살인하고 빼앗고 거짓말하라는 명령 역시 큰사물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며 지킬 수 없는 명령이 된다는 점에서 이 두 명령의 끝에 있는 명령의 주체, 즉 ( )를 드러내는 발화라는 것이지요.
십계명
1.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2.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마라.
3. 너희는 주 너의 하느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4.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5.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마라.
7. 간음하지 마라.
8. 도적질 하지 마라.
9.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10. 네 이웃의 아내나 재물을 탐내지 마라.
결국 모세의 십계명, 칸트의 정언명령의 진리 내용은 현실원칙의 문법 (부인)으로 잉여향유의 신체를 불러내고 그것은 실재계의 대타자라는 주어를 은폐하는 방식으로 불러냅니다. 사드는 똑같이 신체를 불러내지만 쾌락원칙의 문법을 횡단하지요. 즉 대타자의 주이상스를 정면으로 대면하면서 그 불안의 긴장도를 극한으로 몰아가는 방식입니다. 쾌락원칙을 넘어가는 그 지점을 위해 신의 ( )를 환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물신화하고 불안을 넘어가려는 것입니다. 사드에게 신은 물질로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드는 도착의 방식으로 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안프로스페르 드 로네, 민나 베르나이스…. 진리의 이름
“그러나 이것은 바로, 금지된 주이상스의 자매입니다. 나는 “그것은 자매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다음의 관계 속에서만 [금지된 주이상스와] 친족관계를 맺는 것인데요, 이렇습니다. 만일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서의 논리 구조들이 이와 같이 주이상스로부터 떨어져 나온 절편에 실질적으로 관련된다면, 이와는 반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됩니다. 즉, 오늘날의 논리학에서 이루어낸 업적들에 관하여 어떤 향유가 응답할 것인
가... 그리고, 이와 같은 이름의... 예를 들자면 그게 얼마나 미약한 것이든 간에 논리적 시스템의 정합성일 뿐이라고 말해지는.... 그 자신의 한계점을 표지하는, 불완전성의 사태들의 힘을 지시하는 그러한 것에 대해서.
이처럼 그 자체로 논리적인 정립이 저절로 노출하게 되는 그러한 방식은 어떤 주이상스에 응답하는 것일까요? 달리 말해서, 여기서의 진리란 무엇일까요?” (136p)
자매는 어머니의 대체물인 아내의 절편입니다. 프로이트는 “사랑이 있는 곳에서 남성은 욕망하지 않고 욕망하는 곳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금지된 것에 대한 대체를 이야기합니다. 갑자기 금지된 사랑-대의 대체로서 자매를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진리의 위상이 바로 금지된 큰사물의 대체로서 주이상스의 절편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는 언어인 이상 사물이 아닌 모조품의 산물일 뿐이나 그것이 ( )의 형태로 상징화(환유의 지식)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발화되기에 산물이 아닌 사물의 절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라깡은 금지된 성충동의 명령 아래 사랑의 형식을 진리의 위치로 이야기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 사랑에 대한 금지를 비켜가는 방식으로 선택되는 사랑의 대상 즉 어머니의 대체로서 선택된 아내가 아닌 그 아내의 자매가 진리의 위치가 된다는 것이지요. 프로이트가 강박증자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애정과 성욕의 분리를 이야기합니다. 즉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에 대한 금지가 과대화된 애정의 대상으로 어머니의 대체를 아내로 그리고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문란한 여자)을 성욕의 대상으로 삼는 분열적 사랑 선택입니다.
애초에 진리에 대한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 완벽한(공백없는) 대타자를 욕망하는 것이라는 라깡을 말을 기억해보면, 이것은 진리의 강박증이 선택하는 상징계의 사랑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강박적 태도가 결국 분열된 주체를 ( )의 지점, 빗금친 S로 이끄는 것이라면 자매를 선택한 사랑은 잉여향유로서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진리의 위상을 갖는다고도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라깡은 사드와 프로이트가 그들의 처제와 은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진리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싶은 것이었을까요. 어쨌든 문제는 법의 상징계에서 그 관계는 단지 비정상적 위반으로 부인될 것이지만 상징계를 흔드는 히스테리적 담화에서 금기의 명령은 다시 ( )괄호의 대타자를 소환하고 상징계를 흔드는 진리의 위상을 갖게 될 것이라고 아래와 같이 예고합니다.
“제가 주이상스에 관점에서 진리의 포지션을 자매관계로 보는 것이 헛되거나 우발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히스테리의 담화와 관련하여 그것을 논증하고 언표화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니까요.” (137p)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