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캭텔, 존재와시간 강해_성찰5

(16~19 _유일성) 이강원
집합론은 공백의 선언 = 일자의 부정을 근거로 한다.
최초에 다수가 있었다. 그것은 알아볼 수 있는 다수가 아니었다. 알아볼 수 없는 다수란 사실 알아볼 수 있는 다수로 부터 추론되었다. 셈하기의 효과로서 드러난 다수가 존재하고 있기에 셈하는 것 즉 근거를 설정한 근거의 근거를 가정했다. 알아 볼 수 있는 다수가 셈하는 자에 의해 셈해 진 실체로서의 다수 인지 아니면 셈하기 자체가 만든 효과로서의 다수인지는 모른다. 셈하는 자는 보이지 않으니 셈하는 자의 창조가 아닌 보이는 다수를 선택하자.
셈하는 자는 없고 셈하기의 효과로서 다수만 있다. 다수는 셈하기의 효과로서 우리에게 일관되게 보여지므로 셈하기의 효과가 제거된 다수를 가정해 보본다. 그것을 순수다수라고 다소 칸트적으로 표현해보자. 그것은 셈하기의 효과가 없는 다수. 다수가 아닌 다수. 유일한 다수. 셈해지지 않는 하나. 모순이다.
셈해지지 않는 있음을 다수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불편하다. 여럿은 셈해질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β) [~(∃α) (α∈ß)]
순수 다수 즉 셈해지지 않는 여럿은 “어떤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어떤 것이 있지 않음’ 귀속된 어떤 것이다.” 즉 있지 않음이 있다. 공집합이 있다.
순수 다수는 이제 다수로서 있지 않음을 명명하는 “공집합”에 의해 현시된다. 다만 그것은 셈하기를 부정하는 형태로서 “있다 - 없다, 1 - 0, fort-da”와 같은 놀이 처럼이 명명된다. 즉 일자-신이 없다는 “부정의 신”이 태어난 것 처럼 그렇게 명명된다.
공집합의 공리는 집합론을 탄생시킨다. 집합론이 공집한을 탄생시킨 것이 아니라 집합이 가능하려면 집합 이전의 무엇 즉 셈하기 이전의 무엇이 설정되어야만 하는 것이기에 속성을 부여하는 기능의 함수가 속성없는 것들을 묶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집합의 기원이된다.
{ }
속성없는 것에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거울이다. 공집합은 귀속관계를 탄생시킨 거울이다. 그것은 기능이자 원소의 셈을 가능하게 하고 함수관계의 속성을 부여할 수 있음을 즉 법의 재생산을 허용하는 동시에 절대적 법 자체의 부정을 상기시키는 반복이다. 법은 “재정하는 주권”이라는 이념에 비추어 반사된 진리의 법을 생산한다. 주권은 다른 권리와의 차이를 말할 수 없다. 자유권, 주거권, 표현권…의 차이는 법을 생산하는 근본 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상에 있는 것이다.
주권은 그럼 어디서 왔는가? 이 물음이 바로 일자에게로 우리를 이끄는 유혹이다.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주권의 정당성, 근거율은 무엇인가?
주권을 가진 주권자의 탄생. 공집합을 포함하는 집합의 탄생. 부분집합 속 공집합의 돌출을 다시 봉합하는 멱집합의 탄생. 주권자임을 주장하는 부정된 존재들의 외침을 봉합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탄생.
공백(공집합)은 (부정의) 선언을 통해 그렇게 새로운 주체를 (집합을) 만든다.
“나는 내가 아니다”
19세기 누군가 자아의 부정을 선언한다. 타자의 대상이자 닮은 것으로서의 자아 이미지를 넘어 알 수 없는 그것을 명명한 그 순간 무의식이라는 공집합을 중심으로 정신분석이라는 멱집합이 구성된다. “나”는 그 자명함을 근거해주던 신이자 진리의 빛으로 부터 멀어져 “거울”이라는 권력-욕망 장치의 점멸하는 효과로서 설명된다. 정신분석 집합 안에서 자아의 증상들은 더 이상 영혼-타락의 증거가 아니다. 기계론 적인 물리-언어의 은유를 가져와 내적 증상은 억압 기제의 망가짐으로, 충동과 아름다움은 에너지의 흐름의 과잉과 배출과 승화의 현상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멱집합은 여전히 일자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원집합의 명령은 여전히 “자아”의 원소들 부분집합 속에서 그동안 놓쳐온 “무의식”의 정체를 밝히려고 집착한다. 한 인간의 잃어버린 기억 (심지어 자궁 안에서의 기억까지)과 환상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것의 정체를 밝힌다. 유아의 성충동에 대해 오이디푸스적 환상,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가져와 신화의 언어가 만든 정신분석의 집합을 정교화하고 정합적인 속성의 인과론으로 설명해 낸다. 결국 정신분석의 집합은 내가 모르는 “나”의 공백을 봉합한다.
하지만 정신분석의 집합에 여전히 공집합이 있다. “모름” “나는 내가 아니다” 라는 그 선언은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 자체를 부정한다. “나는 내가 아닌 동시에 앎의 대상 조차 아니다.”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앎의 욕망은 “나를 사랑해달라” 요구의 변형으로 그것은 “너를 사랑해”로 전이되고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너를 미워해.”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나는 나를 사랑해.” “사랑하는 나는 이것이야”…… 끝없는 환상의 변형과 뒤틀림으로 가려지고 덮어진 주이상스의 두꺼운 외투이다.
{정신분석}의 멱집합이 다른 봉합의 집합과 다르다면, “나는 내가 아니다”의 “모름”의 선언을 봉합하는 {정신분석}-멱집합은 그것의 멱집합을, 또 그것의 멱집합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이는 기이한 (반)집합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쾌락의 상실이라는 명명을 통해 끊임없이 보상의 언어를 불러들이는 무한 집합이라고 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