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11. Cartel
백상현, 라깡세미나17 <정신분석의 이면> 강해
6강 과학의 기원, 도라의 승리, 종교의 승리 (2)
무의식은 동어반복의 지식이다.
그것은 실재-대상-몸에 표지된 최초의 문자다.
문자는 대상을 표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살해하기에 더 이상 대상-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을 대체하고 스스로 몸이라고 선언한다. 문자는 살해를 통해 표현한다.
“나는 나다”는 죽음의 표지다.
$ ≡ S1
최초의 살해, 대상을 살해함으로써 문자와 실재의 동일시 신화가 시작된다.
라깡에게 신화란 관계없는 것의 동일시다. 대상과 기표의 동일시, 기표와 기의의 동일시, 기의와 대상의 동일시. 이 모든 관계없는 것들 사이의 동일시가 담화를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한다.
사물과 신체의 실재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소쉬르적 기표연쇄의 세계를 살아가기 위
해서는 사물의 살해가 필수적이다. 여기서 사물이 살해되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언
어가 사물-실재를 대상으로 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상
의 부재가 사유의 상징계적 영토를 개시하며, 그곳에서 욕망의 주체가 발생한다는 것이
다. - 강해서 187p -
대상을 살해한 문자가 다른 문자들과의 연쇄로 일관된 체계를 이루는 것을 담화 또는 지식이라고 말해 보자. 라깡은 완전히 대상과 독립된 추상화된 기표 체계의 대표적인 예로서 수학을 든다. 그것은 개별성의 신화적 지식 즉 대상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어지는 개별 지식에 보편성을 추출해 낸 주인의 지식이다.
수학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권력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주인을 위해 만들어진 보편성의 권력적 수단이다. 수학은 신화적 지식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상징계의 문법을 가졌으나 그것의 숙명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주인이 주인임을 근거해주는 근본 지식으로서의 신화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모순을 갖는다. 주인을 위한 철학이 대상-실재 속(또는 초월하여)에 이데아로서 순수한 수학의 논리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 이유다.
a → $ ≡ S1 → S2 → a → $
표지될 수 없는 a를 살해하여 S1과 동일시(주인된 환상)하는 주체는 세계와는 독립된 체계로서의 보편 논리인 S2를 생산한다. S2는 다시 그 상징계의 영토를 넘어 대상을 장악하려는 표지의 폭력을 행사하며 a를 살해며 대상을 살해한다. 문명의 신화는 대상의 연쇄 살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의식의 무대는 S2 → a → $ , 신화적 지식이 행하는 살인 사건에 집중한다. 살인의 목적은 망각이며 최초의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연쇄 살인이다.
무의식의 무대는 a → $ ≡ S1, 문자의 살인이 행해지는 장소다. 그것은 동일시를 위한 것이며 문자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전시다.
무의식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S1의 탄생신화
의식의 무대 위에 S2의 지배 신화
이 둘은 S의 죽음 (살해사건)이라는 것을 공유하지만 서로 독립된 무대에서 상연되는 연극이다.
a → $ ≡ S1 / S2 → a → $
잘 짜여진 플롯에 의한 스토리의 전개가 아닌 임의로 편집될 수 있는, 하지만 하나로 편집되면 그것이 원래 그런 스토리인 듯 신화처럼 자연스럽게 되어버린다. 어머니와 주이상스를 위해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오이디푸스의 플롯과 이를 포기하고 아버지가 되려는 (또는 아버지의 대상이 되려는) 신경증자의 플롯이 자연스레 원형 신화가 되어버리 듯 말이다. 왜 일까? 왜 자연스러울까?
그것은 무의식의 지식이라고 해석된 것이라고 해도 결국 S2-의식의 지식이 제공하는 한 유형의 지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의 연극은 이미 무의식의 연극의 스토리를 자신의 지식으로 채워버렸다. 라깡은 이를 인류 공동체의 근본적 구조를 탐사하는 Ethnography가 존재의 근본 구조를 탐사하는 정신분석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공동체 속 인간이 발화하는 말과 행위, 기호들의 구조를 밝히는 작업은 이미 발화하는 말, 행위, 기호의 기의-구조이기 때문이다. 기의와 떨어져 있는 기표의 최초의 살인 사건은 민족지학의 구조보다 더 상징화되고 추상화된 형식의 담화 구조로 설명될 뿐이다.
메타 형식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정신 분석의 설명은 민족지학의 탐사를 구체화해줄 무엇이 되지 못한다. 민족지학의 구체화된 구조를 정식분석에 적용한다면 이 역시 거꾸로 정신분석을 하나의 개별사례를 보편적 신화(과학담화)로 이끄는 왜곡이 될 것이다.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신화처럼 말이다.
다만 존재를 탐사하는 공유된 진리의 여정 속에서 민족지학자, 정신분석가, 즉 과학자에 요구되는 것은 분석가의 태도라고 라깡은 말한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부정이며 지식과 주체의 동일시에 대한 부정이다. 기존의 지식을 낯설게 바라보며 부정 안에 머무는 태도, 대상 a로 남으려는 태도 속에서 자기 스스로 (또한 분석 주체) 새로운 문자를 통해 새로운 살해를 도모한다.
a → $ ≡ S1 → S2 / a → $ → S1
(a → $ ≡ S1 → S2 → a → $)
즉 최초의 상실을 S2의 지식으로서 보상받으려는 연쇄살인의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최초의 살해를 계획하는 태도이다.
새로운 살해를 위해 분석가는 우선 S1과 S2의 단절을 꾀한다. S1→S2의 연결 (신화)가 주는 쾌락의 약속을 뒤로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단절을 꾀할 때 S1의 실체, 머리없는 지식이자 근거없는 파편으로서의 문자의 표지를 불러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지식에 다가가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히스테리화 된 주인의 모습이다. S2에게 반기를 들고 S1을 부르는 은폐된 $, 죽은 몸의 유령이다. 이 유령은 감춰진 S1을 불러낸다. S1은 드러날 수 없다. 이미 S2에 의해 재현되었기에 재현된 대상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S2가 온전히 존재한다. S1은 언제나 죽은 몸 $와 함께 드러날 수 밖에 없기에 $의 반기는 그 자체로 S1을 부르는 죽음의 방언이다. 무당은 죽은 자를 불러냄과 동시 죽인 자를 함께 불러내어 산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도라는 안티고네는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승리한다.
마지막으로 라깡의 세미나 17의 지식을 부정하고 S1→S2의 연쇄를 단절하기 위해 우리가 공백화 해야하는 기표는 무엇일까?
주체 그리고 S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