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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사건 강해서, 성찰 3

성찰 3 p.75 ~ 79
언어가 실재를 현시하지 못함.
언어가 존재로서의 존재를 현시할 수 없음이라는 것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나.
집합론이 원소, 다수의 실재를 드러내는 논리로서가 아니라 가정된 실재 (순수 다수)를 분리하고 재구성 할 뿐이라는 명제는 집합론의 가정이 결국엔 모순에 직면하고 무모순성 혹은 오류성 증명이 불가하다는 현상을 통해 증명될 수 있다. 언어가 어떠한 속성을 갖는 (또는 부여된) 원소들 (셈해진 대상들)을 귀속관계로 재현하는 것이라면 집합에서의 증명불가능한 현상에서와 같이 귀속관계의 논리 안에서 언어 역시 설명 불가능성(공백)을 드러낸다. 러셀의 역설처럼 속성으로서 정의된 원소는 자기 자신을 포함할 수도 안할 수도 없는 난제 안에서 방황하게 된다.
언어가 실재를 현시하지 못함. 실재는 언어와 분리된 것 혹은 관계없는 것. 실존은 언어로서 현시되나 실존은 실재와 분리되어 있고 언어로서 현시되고 재현되기에 언어가 스스로 모순을 내재하고 붕괴의 지점을 갖는다. 언어가 언어 자체로서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왜 모순을 내재하고 있을까. 모든 체계가 일종의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또는 완벽한 체계는 있을 수 없다는 일반적인 믿음 때문일까?
모순이 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언어논리 스스로가 가정하는 근본원리 (공리)와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상의 명제를 언어가 스스로가 연역해 낸다는 것이리라. 애초에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의 논리적 금지(공리)는 그 자체로 실재가 아니니(분리되어 관계없으니) 언어가 환유의 연쇄 속에서 생산하는 논리의 말들은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그 금지의 선을 넘어 초과하게 되는 것이다.
(귀속관계가 아닌 언어의 현시는 소통할 수 없는 현시의 차원에 머무르기에 논외로 해야 하는가? 시에는 문학에는 논리가 없는가?)
언어가 실재를 현시하지 않으며 언어의 집합론적 체계가 오류를 내재한다는 것. 그래서 언어는 매번 실패한다는 것. 도대체 무엇에 실패하는 것인가? 공백의 봉합에 실패한다?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마체 균열되어 세어나 아오는 댐이나 용기의 틈을 메우는 것을 (나에게) 상기 시킨다. 비유적 상황 속에서는 이것이 분명 문제해결(세는 틈을 메우기)에 있어서 실패이다. 그런데 언어의 실패가 용기의 금간 틈을 메우는 그런 것일까?
봉합에 실패함이란 것은 정동의 문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불안” 을 해소하는데 실패하는 것 , 즉 모든 언어는 그리고 그 언어가 구성한 체계로서 불안을 최소화 아니 멸소하려고 하지만 결국 그 노력이 언어가 만든 규범과 논리의 체계를 흔들어 다시 “불안”을 도래하게 하는 것. 이 반복이 실패의 정체일까?
콘크리트 유토피아, 언어의 봉합과 실패 그리고 불안이 다시 도래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 체계의 세계 속에서 황궁아파트 사람들은 기존의 “아파트 규범”의 체계를 다시 세우려고 한다. 자가, 임대, 입주민과 비주민, 브랜드 아파트,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 부녀회장, 주민대표…. 와 같은 언어가 가정하고 있는 범주의 구분과 셈해짐의 논리는 주민회의라는 이름을 통해 아파트에 잔류하는 “비주민”을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물론 아파트 규범의 언어에도 균열이 내재한다.
주민은 누구인가?
소유자, 점유자, 주민등록상 거주자? 그들의 직계 가족? 친구나 손님은?
부녀회장의 입주민 명단에 적힌 사람들, 이웃사이에 증언될 수 있는 아파트 사람
왜 비주민은 나가야 하는가?
개념도 불명확한 주민이 황궁 아파트에 살수 있는 배타적 권리는 어떤 근거 또는 권위 위에 서 있는가?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와 안전의 위험 속에서 비주민을 사지로 모는 결정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가? (주민투표… 결국은 주민대표의 결단…)
불편한 마음
아파트에 거주 공간이 현재 모자란 것이 아닌데 왜 이미 안에 잘 생활하는 비주민을 사지로 몰아야 (죽여야) 하는가?
결단의 효력과 권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외부인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주민-비주민” 선언은 폭력의 위기에 직면하고 주민대표 김영탁(가짜)은 그 과정에 비주민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고 피를 흘린다.
그 흥분의 폭력과 이벤트는 결국 주민을 실존적으로 정의한다! 현장에 차마 내려가지 못하고 아파트 위에서 내려다 보던 “불안한 주민”들도 이 순간 비주민들에게 돌을 던지며 나가로고 외친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
드디어 강력한 믿음에 근거한 폭력적 언어가 이 모든 불안한 상황을 봉합한다.
S1이 선포되고 혼한을 주민-비주민의 규범아래 재현의 체계를 갖는다.
새로운 상황 아래에서 황궁 아파트 주민은 환유되는 언어 (기존의 체계를 모방한)을 통해 불안한 상황을 최대한 안정된 상태로 전환시킨다.
하지만 안정된 체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욕망의 초과)
자원의 부족 / 더 편해지고 안정되고자 하는 욕망 / 특권에 대한 욕망….
재난상황이 지속되면서 커져가는 내부 갈등 속에서 희생제의가 시작된다.
여전히 잔류하고 있는 외부인들을 축출하고 이들을 숨겨준 주민들을 처벌한다.
“저런 바퀴벌래 (외부인들은 주민 수색대를 공격한 다른 외부인들 바퀴벌래와 동일시 된다.)
여기서 르네 지라르희생양의 독특한 지위가 상기된다.
문제의 원인으로서 이질성
어떤 희생도 정당한 대상 (바퀴벌래)
기존 욕망 (규범)의 상징 (그 이면)
내재한 불안이 서서히 다시 찾아오고 더 강력한 규범의 논리와 실행은 오히려 그 불안을 더 드러낸다.
외부인을 숨겨준 주민들은 주민들 앞에서 “잘못했습니다” 200번 외치는 도덕적(불안에 대한 대체로서의 가해자 만들기와 이를 통한 대한 자기 처벌)을 받는다.
이러한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도균이라는 주민은 다른 주민들 앞에서 자살을 한다. (초과)
결국 “황궁아파트 체계”의 가장 근원적인 모순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파트는 누구의 것인가?” 주민은 누구인가?
902호 영탁의 집 옆집에 살던 혜원의 등장
높아지는 내부 갈등 (희생제의) 속에서 점점 불만의 타깃이 되어가는 가짜 영탁
내부 갈등은 부녀회장 김금애의 아들이 수색중 사망하면서 극단에 이른다.
혜원과 명화는 902호에 들어가 진짜 김영탁의 시신을 찾아내고 주민들에게 공개하며 가짜 김영탁의 정체를 밝힌다.
정체가 밝혀진 영탁은 혜원을 절벽으로 던져버리고 반항하지만, 그 순간 들이닥친 외부인들의 공격에 사망한다.
결국 영탁은 죽고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된 영탁의 죽음은 마치 어떤 상황을 종결하는 듯한 뉘앙스로 표현된다. 황궁아파트는 아마도 또 누군가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고 그들은 새로운 규범을의 체계를 정립하고 공동체를 구성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종결되었고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민성이 죽고 홀로 남은 명화는 다른 외부인 (바깥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내부자가 됩니다.
“그냥 살아도 되는 거에요. 왜 우리한테 물어봐요. 살아있으면 사는거지!”
새로운 규범이 선언된 곳에 내부자로 인정받은 명화는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규범의 개방성에 당황한다. (핵심은 명화에게 주어진 곳은 또다른 넘어진 아파트라는 사실.)
“아파트 사람들”은 사람도 잡아 먹는다면서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
새로운 공동체 속에서 아파트는 외부로서 “괴물”로 상상되고 있었다.
모두가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들은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새로운 공동체의 내부와 외부가 있으며 그 속에서는 또 다른 규범(폭력)이 존재할 것이고 그 규범 역시 내재된 모순 속에서 다시 불안에 직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