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치료의 변형태들(2) - 어떤 의도에 대하여 (2025. 2. 28.)
그들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이요? 아니요 거리를 두기 원합니다. 그들이 나를 욕망하기 바라지요. 내가 안다고 그들이 믿는 그 지식을 가장 신비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감추고 싶습니다. 그들의 욕망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말은 그들을 통해 들리는 말이군요. 무엇을 받고 싶습니까?
인정이요.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지요. 그들이 모여 있고 그들이 듣고 욕망하고 교환이 아닌 선물로서 그들의 시간과 돈을 내어놓는 그 행위 속에서 나는 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곳이 군요.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해 주는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는 것, 사랑해 주는 것 모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사랑이 있을까요?
분열된 사랑 같군요. 사랑을 받을 수도 할 수도 없는, 단지 사랑받는 환상 속으로 영원히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아이처럼 빠져버릴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사랑인가요.
가능합니다. 그게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불가능한 사랑은 가능합니다.
왜 분석가가 되려고 하십니까?
내가 아는 분석가는 당신뿐이니 당신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환상을 횡단하고 진정한 쾌락이 있는 곳에 가고 싶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했고 그런 것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나도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싶습니다.
저에게 분석가, 즉 쾌락을 알고 있는 그 분석가를 보시는 군요. 마치 나의 쾌락을 알고 있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그에게 사랑받는 자신을 상상하는 사람처럼 분석가의 인정을 원하시는 군요.
Ecrits 358 (5)
사람들은 분석가와 교육분석주체 간의 관계 (스승과 학생) 속에서 교육분석의 장애물을 찾으려고 하지만 정작 핵심이 되는 장애물은 교육분석의 주체가 권력,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교육분석을 받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육분석 주체의 이 욕망이 신경증자의 사랑의 욕망- 그 이율배반적인 사랑-을 다루는 것처럼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제가 그것이 당신의 진정한 쾌락이라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요. 내가 괴로운 건 무언가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건 근본환상 즉 대상을 향한 내 최초의 사랑의 구조라고. 그 주이상스에 다가가지 못하고 그것 주위를 돌며 욕망하기 위해 꾸며진 거울의 방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것이 반복되는 쾌락의 구조라고요. 고통이 쾌락이라고 말해지면 정말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된다고 말한 사람 때문에 고통이 쾌락이 된 것입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엄마는 약사였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엄마는 약국에 있었고 나는 엄마를 기다렸죠. 군대에 갈 때까지 병원에 가본 기억이 없습니다. 엄마는 약을 주었죠. 나는 두통, 속쓰림, 피부병, 소화불량, 민감대사장애, 변비, 역류성 식도염을 돌려가며 엄마의 약을 먹었죠. 엄마는 약을 주는 걸 좋아했어요. 한약, 생약, 식이요법, 한방즙… 많은 걸 먹었죠. 나는 치료되길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아픔과 불편을 돌려가며 살았습니다. 고통이 쾌락이 된 이유가 엄마라는 생각이 듭니다.
병-약 병-약, 프로이트의 외손자처럼 게임을 한 거군요.
프로이트가 포르-다로 들은 거겠죠. 병-약의 게임도 분석가가 던져준 말 속에서 만들오진 것처럼요.
분석가의 말을 되돌려 준거군요.
나는 분석가의 거울처럼 되는 건가요? 그리고 언제가 분석가가 되는 겁니까?
분석가는 거울이 맞습니다. 다만 반투명 거울 처럼 반사되고 투과되는 거울이지요.
나는 당신의 말을 반만 되돌려 준다고 말합니다.
해석을 주기도 하고 동시에 문제를 주기도 하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제 뭘 하면 됩니까?
말을 하십시오. 진실된 말을 하십시오.
Ecrits 351 (6)
말은 타자가 진실하게 돌려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주체가 전도된 형태로 자기 메시지를 말할 뿐만 아니라 이 메시지와 동일한 사람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자기를 변형시키는 커뮤니케이션으로 드러난다. …. 진실된 말은 진실된 담화와 역설적으로 반대된다. 진실된 말은 주체가 그 말 속에서 투자되면서 존재의 주체성을 인식하는 반면, 진실된 담화는 주체가 대상의 현실을 겨냥하면서 그 현실의 지식에 의해 구성된다. … 진실된 말은 진실된 담화에 그것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기호로 밖에 나타내어 질 수 없는 하나의 의미는 결국 또 다른 기호-의미를 가리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진실된 말은 진실된 이야기를 이렇게 오류 속으로 빠지게 만든다.
말이요? 진실된? 여기서 하는 말들은 진실일 수 없어요. 내가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했고 무슨 말을 했고 그 다음에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려고 온 것이 아니죠. 왜 그랬을까? 이것이 아니고 왜 저것을 하려고 했을까? 이건 왜 싫고 저건 좋을까? 온통 모르는 걸 말하고 싶은 거죠.
그럼 모르는 걸 말하십시오. 그게 진실이니까 괜찮습니다.
사기꾼. 나는 나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모른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까봐 아니면 내가 알고 있다고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봐 불안해 하죠. 스스로 사기꾼이라 말하면 조금 안심이 됩니다. 다만 무언가 확신하거나 내 이름을 걸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하기는 두렵죠. 어쩌면 그래서 그렇게 아버지들에 매달렸는지 모릅니다. 법은 가장 권위있는 아버지일지 모르죠. 법. 하지만 그건 가장 가식적인 아버지였죠. 스스로 아버지라 외치는 가장 나약한 아버지. 철학은 공격하고 잘난채 하는 그러나 결국 의심하는 아버지. 가장 권위있는 아버지는 정치 아니면 예술의 영역에 있는 아버지죠. 동시에 가장 적나라한 사기꾼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런 아버지들을 통해 욕망하며 살아왔죠.
사기꾼이라면 무언가 알고 있는 자 이겠군요. 최소한 자신이 모른다는 걸, 아니면 완벽하게 아는 사람만 사기꾼이 될 수 있나요 속이기 위해서?
몇 일전 연극을 봤어요. 체홉의 갈매기. 체홉극단이 아닌 다른 극단이 하는 체홉작품은 왠만하면 보지 않아요. 실망을 많이 했었죠. 근데 예전에 좋아했던 배우가 연출을 한 거였어요. 미투 때 사라진 극단에 에이스 였던 배우였죠. 연기는 훌륭했습니다. 그녀는 아르까지나 역할을 했고 완벽했어요. 마치 자기가 하는 연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 같았죠. 관객이 무엇을 보고싶어하는지 아는 것 같았습니다. 근데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마샤 역을 맡은 젊은 배우였죠. 몰입하고 집중하는 연기였지만 좀 과하다 싶거나 불필요한 눈 움직임이 거슬리긴 했어요. 하지만 매력적이었죠. 그 배우는 자신이 정말 마샤인 줄 착각하는 것 같더군요. 다만 관객이 그 착각을 온전히 받아들이진 못했죠. 관객은 배우의 착각이 아니라 자신이 착각하기를 바라니까요. 아르까지나 역을 맡은 중년 배우는 자기가 아르까지나가 아님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관객들은 그 반대였고요. 나는 그 배우가 사기꾼 같이 연기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진리 아닙니까? 자기가 그 역할이 아니고 결코 될 수 없음을 아는 게 사기입니까?
믿지 못하지만 믿는다고 믿게 만드는 건 사기죠. 그렇지만 그게 진리인 건 맞다고 생각합니다. 분석가가 진리를 말하는 사기꾼인 것 처럼요. 나는 분석 초기 부터 분석과 연극을 구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분석가님도 그걸 거부하지 않는 것 같았죠.
네 분석은 연극처럼 말해질 수 있습니다.
네 분석도, 연극도, 언어와 말이 부딪히고 짓이기며 쓸리고 땀에 미끄러지는 몸싸움 같습니다. 어쩌면 분석의 담화를 통해 연극의 담화를 이해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체홉과 베케트의 텍스트를 읽게 된 사건 때문일 수도 있겠고요. 배우가 대본 위에 인쇄된 텍스트를 통해 말하는 주체를 만들어가 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몸싸움입니다. 텍스트는 마치 인물의 역할과 정체성을 강제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왕, 잉여인간, 질투심과 복수심에 찬 아이, 망상을 보는 신경쇠약자, 허무주의적 난봉꾼 처럼 이미지와 할 일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인물들의 담화 속엔 어떤 강력한 의미의 사슬이 있죠. 그런데 체홉은 그 연결된 사슬 이곳 저곳에 끊어진 고리와 엉켜버려 무엇과 무엇이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를 복잡한 얽힘을 만들어 놓아요. 배우는 벽을 만납니다. 가장 단순한 해법은 이미 만들어진 인물의 캐릭터를 따라하는 겁니다. 권위있는 그 인물의 이미지를 따르는 거죠. 연출이나 선배 연기자는 그 권위를 보증해 주는 대타자의 대리인처럼 말 할 겁니다. “그건 그렇게 연기하게 아니지.” “그 인물은 이렇게 풀어내면 이해할 수 있어!” 탁월한 죽은 연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해되는 말은 진실된 담화, 관객이 쉽게 의미를 파악하고 몰입할 수 있는 연기를 만들어냅니다.
언어는 담화의 수단을 제공하고, 이 담화를 통해 환자의 인격이 구제되고 창조되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서 타인에게 자신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언어는 사회화된 구조이며, 발화를 통해 개인적 목적이나 주체 상호의 목적에 이용되므로 언어에는 새롭고도 순전히 개인적인 의도가 추가된다. 언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체계다. 한편 담화는 메시지의 전달체이자 동시에 행위의 도구다. 이러한 의미에서 발화의 형상은 언어를 통해 실현되지만 그것은 매 순간 유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에게는 담화와 언어 사이에 이율배반성이 존재한다.
- 에밀 벵베니스트, 일반어어학의 여러 문제1. 7장 프로이트가 밝힌 언어기능에 대한 고찰 -
다른 길도 있어요. 배우가 진실된 말 속에서 인물을 만들어내는 길. 텍스트가 열어준 끊어짐, 생략, 모순 속으로 들어갑니다. 망막하고 우울한 곳으로. 길어야 한 두 달 주어진 시간 동안 한 인물의 삶을 온전히 상상하는 건 불가능해요. 결국 텍스트를 자신의 말로 가져옮니다. 그 텍스트를 섣부르게 이해하기 보다는 그냥 외우고 말해보고 그 말이 불러내는 심상을 이렇게 저렇게 상상해봅니다.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카페에서 다투는 연인들을 보다가, 길에서 사람과 부딪히고 나서 갑자기 그 말이 툭튀어나오거나 그 말이 하고 싶어지거나 그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상상이 일어나거나 하는 그 순간이 옵니다. 그분이 오신다고도 이야기하죠. 그 순간은 오늘도 내일도 다음주에도 또 다른 방식으로 올 겁니다. 그래서 매일 연습할 때 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죠. 매번 다른 인물과 상황을 제안해 보기도 합니다. 연출도 상대배우도 죽을 맛이죠. 그래도 어떻게든 나아가고 타협하고 나아가고 포기하기도 하며 공연 날을 맞습니다. 그날 무대 위에서 배우가 하는 연기는 그 과정의 한 시점에 진실된 말의 박제된 모습을 보는 거에요. 진실된 말을 하고자 하는 배우는 무대를 위해 연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텍스트가 가져다 주는 상상 속에서 자기의 진실된 말을 찾는 순간, 비록 그게 공연을 준비하고 상연하는 기간 동안 만이라도 그 순간을 살고 싶은 겁니다. 근데 이 과정이 그냥 자연스레 오고 가는 건 아니죠. 이해로 부터 거리를 둔다는 건 벙어리처럼, 장님 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거죠. 그러고 싶을 수 있을까. 그게 문제에요.
배우는 왜 그래야 합니까?
그러니까요. 나는 왜 그래야 하는 거죠?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고 싶도록 만들고 계신 것 아닌가요? 그게 윤리라고. 정언명령처럼. 그것으로 가야한다!
그렇죠. 사랑때문입니다.
분석가의 사랑. 애초에 분석가는 의사였죠. 프로이트처럼. 히스테리 증상의 원인을 찾고 그것을 임상적으로 치료해야 하는 의사. 분석가는 고장난 리비도 조절기를 수리해야 했고, 꽉 막힌 의미화의 파이프를 뚫거나 끊어진 배관을 잇는 기술자였죠. 언어의 감옥 속에 갇혀있는 사람을 구하는 정신나간 간수이기도 하고. 분석가는 치료사, 기술자, 구원자로서 살아가는 윤리를 가진 자인가요?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분석가를 이해하는 가장 편한 길이지만 불가능한 길입니다.
분석가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입니까? 분석가는 그렇게 주체가 될 수도 있습니까? 분석가의 사랑은 분석주체의 사랑과 다른가요? 분석의 담화는 분석가를 대상 a 라는 아무것도 아닌 것인 동시에 모든 것이어서 의미를 지울수도 만들 수도 있는 사랑할 수도 증오할 수도 있는 빈칸 처럼 남겨 놓습니다. 그것은 말이 만드는 환상이지만 말을 만드는 환상이기도 하고요.
Ecrits 358 (3)
무지는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사랑 및 미움과 같은 정도로 존재에의 정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랑 및 미움처럼 그것이 존재가 형성되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열정이 바로 모든 교육분석에 부여해야 하는 의미다. 분석상황을 결정짓는 것이 이 열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깡이 사랑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나는 너를 때려’라고 말하 듯 ‘나는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는 언어 사용이 유감스럽습니다.” 분석가도 주체도 무엇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죠.
매주 이 시간 저는 그것을 확인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무능력. 핍진하고 사막과 같은 삶.
…
만약 내가 사랑할 수 없다면, 사랑이 무엇을 할 수는 있겠네요. 분석담화의 행위자의 자리처럼 사랑이 주어가 되는 문장은 가능하겠군요.
그래서 무엇이든 가능하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사랑이 하는 것은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나는 사랑한다가 아니라 사랑이 한다라고 말하는 것, 분석가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으로서의 분석가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사랑의 말을 통해 주체가 되는 자리.
그 자리는 비워놓아야 합니다. 분석가는 그렇게 있지도 않은 자리를 내어주는 역할로 존재해야 합니다.
Ecrits 359 (3)
이것이 분석가가 그의 존재와 동일시되는 그의 말의 주인됨을 열망해야 하는 이유다. 분석가는 분석 과정에서 주체가 자신의 존재 법칙을 이해하는 바로 그 말을 바로 앞에서 발음하는 것을 듣기 위해 그리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사실 거의 아무말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주체의 그 말은 신의 도움 즉 주체 자신의 도움을 통해 말해지며 분석을 끝으로 가져갈 것이다. … 그의 테크닉은 테크닉이 드러내는 말 자체가 무의식적 주체와 관련되어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분석가는 말 속에서만 자기 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지금 분명 당신은 앞에 강력한 이미지로 벽처럼 앉아 있으세요.
이 자리는 주체가 있을 자리는 아닙니다. 분석가가 내어줄 자리는 여기가 아닙니다.
실질적인 이유로 인해, 이러한 분석은 짧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 그러나 이 분석이 만약 학습자로 하여금 무의식이 실재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한 확신을 갖게 하고, 억압된 자료가 자신의 정신 속에서 떠오르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던 정신적 과정을 직접 지각하도록 하며, 정신분석을 수행하는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으로 입증된 기법의 첫 사례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이는 충분한 교육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학습자가 자신의 분석 과정에서 받은 자극이 분석이 끝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작용할 것이며, 자아 변형의 과정이 저절로 진행될 것이라 기대하고 믿는다. 또한, 그는 이러한 새로운 통찰을 모든 이후의 경험에 적용할 것이다. 이는 실제로 발생하는 일이며, 그러한 과정이 이루어질 경우, 분석을 받은 학습자는 분석가가 될 자격을 얻게 된다.
- 프로이트, 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