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3 (2) p.57 ~ 61
죽느냐 사느냐, 아니
타자에 귀속될 것이냐 스스로에게 귀속될 것이냐
그것이 문제일까?
집합은 바디우가 발견한 일자의 셈하기. 무엇에 속함이라는 귀속과 포함의 논리를 통해 속성을 부여하고 같음과 차이를 드러낸다. 집합은 속성의 부여임과 동시에 속성없음을 드러낸다. 집합은 연역적 논리에 따라 그 모순으로 향해 나아간다. 자기귀속의 금지는 공집합의 멱집합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공집합의 멱집합은 공집합을 원소로 갖는 집합이고 동시에 그것은 공집합일 뿐이다. 공집합은 공집합에 포함되고 동시에 귀속된다. 자기귀속금지는 이렇게 균열을 드러낸다. 괴델은 하나의 집합 체계 안에서 그것의 정합성의 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고 했으나 코헨은 오히려 공집합의 자기 모순은 모든 집합의 속성으로 선언했다. 모순은 집합의 속성으로서 보편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집합이 일자의 셈이며 그로 인해 부여되는 속성은 본질이 아니고 오히려 그 집합은 일자의 한계로서 모순 즉 공백을 드러내고 본질은 집합에 내재하는 속성없음에 있다”는 내용의 텍스트.
내게 크게 문제 될 것도 이해되지 못할 것도 없는 문장들이다.
언어가 즉 일자가 실재를 셈하기에 불완전함은 이제 상식처럼 들린다. 공백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것이 진리의 여정을 여는 문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것은 자연스럽기에 이미 하나의 바디우적 또는 라깡적 일자이자 억압이고 동시에 진짜 공백을 봉합하는 또다른 상실의 보상을 즐기는 것 같다.
진짜 문제는 속성없음 즉 스스로에게 귀속되는 자기귀속 금지, 즉 집합의 내재적 균열이 아니다. 그것은 그 균열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속성없음이 새로움의 속성으로 축성받게 되는 그 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살아가는 매일의 삶이 진짜 문제다. 나는 속성없음에 매달리는 삶이 무엇인지, 그 강박적인 방황의 히스테리, 프로이트의 자손들 마저 두려워한 그 죽음충동이 주는 삶의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을 뿐이다.
신에 대한 실험적 인식으로서 신비주의는 신의 속성을 부정하며 그것을 나약함으로 해석한다. 그 나약함은 곧 신의 사랑이며 그것은 상실에 대한 고통을 끝까지 안고 사는 것이다. 상실의 슬픔 속에서 고통을 가로지르며 그것이 어린아이의 무정형의 쾌락의 기억임을 이해하는 정신분석의 환상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는 도래하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은 곳을 멤도는 말들이 계속 된다. 일자와 다수, 무한과 공백의 말들은 지극히 강박적이다. 그렇게 강박적으로 집합론의 모순과 공리라는 또다른 봉합적 이로를 트고 또 다시 공리 체계에 대한 메타적 강박으로 증상을 옮긴다. 그 강박적인 반복은 정말 어떤 “새로움”이라는 속성에 도달 할 수 있는가? “새로움”이라는 속성은 기존의 일자의 셈하기로 부터 일탈한 완전히 다른 속성으로 새로운 일자를 구성한 것인가?
WHAT IS THE WORD
Samuel Beckett
folly -
folly for to -
for to -
what is the word -
folly from this -
all this -
folly from all this -
given -
folly given all this -
seeing -
folly seeing all this -
this -
what is the word -
this this -
this this here -
all this this here -
folly given all this -
seeing -
folly seeing all this this here -
for to -
what is the word -
see -
glimpse -
seem to glimpse -
need to seem to glimpse -
folly for to need to seem to glimpse -
what -
what is the word -
and where -
folly for to need to seem to glimpse what where -
where -
what is the word -
there -
over there -
away over there -
afar -
afar away over there -
afaint -
afaint afar away over there what -
what -
what is the word -
seeing all this -
all this this -
all this this here -
folly for to see what -
glimpse -
seem to glimpse -
need to seem to glimpse -
afaint afar away over there what -
folly for to need to seem to glimpse afaint afar away over there what -
what -
what is the word -
what is the word
광기 —
광기…라는 —
…라는—
어떻게 말할까—
광기…이…라는—
…이래로—
광기…이…이래로—
주어진—
광기…주어진…라는 이—
보아—
광기…이…로 보아—
이…—
어떻게 말할까—
이것
이 이것—
여기-이것—
이 모든 여기 -이것—
광기…주어진 이 모든 …으로—
보아—
광기…이 모든 여기-이것으로 보아…라는—
…라는—
어떻게 말할까—
보기—
얼핏 보기—
얼핏 본다고 믿기—
얼핏 본다고 믿으려고 하기 —
광기… 얼핏 본다고 믿으려고 하는… 무엇을—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그리고 어디서—
얼핏 본다고 믿으려고 하는…무엇을…어디서—
어디서—
어떻게 말할까—
저기—
저기 저—
멀리—
저기 멀리 저기 저기서—
겨우—
저기 멀리 저기 저기서 겨우…무엇을—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모든 이것으로 보아—
이 모든 여기-이것으로—
본다는 광기… 무엇을—
얼핏 보기—
얼핏 본다고 믿기—
얼핏 본다고 믿으려고 하기—
저기 멀리 저기 저기서 겨우 무엇을—
광기…거기서 얼핏 본다고 믿으려고 하는 …무엇을—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어떻게 말할까
베케트의 시작(마지막 시,1989)은 어떤 “새로움”에 도달 했는가? 쓰여진 시 그 자체는 새로움인가? 베케트의 시작 활동과 분리된 그의 시적 “새로움”은 없다. 그저 말의 나열 일 뿐. 그의 새로운 말하기에 대한 열망과 멈추지 않는 작품의 생산만이 그의 새로움에 대한 광기-어리석음을 드러내고 그의 말들을 “새로움”을 향한 도약으로 해석하도록 이끈다.
새로움은 공백에 대한 광기-어리석음의 계속을 표상하는 ‘작품’에 의해 그 속성을 축성받는다. 그리고 그 ‘계속’은 일종의 미쳐가는 과정이리라. 마치 사랑처럼.
사랑의 강박과 그 증상 그리고 그 “새로움”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왜냐하면 그것은 일자의 귀속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공백의 고통과 “새로움”의 발명이라는 진리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만남
만남은 속성으로의 환원을 통해 가능한다. 성격, 외모, DNA 매칭, 배경, 유머코드, 취미생활… 무엇되었든 그 끌림의 상황을 어떤 속성들의 집합으로서 “인연”으로 또는 “운명”으로 해석하도록 이끈다. 둘이 하나되는 환상, 나의 빠진 부분을 메워줄 무엇으로서 해석되어야 하는 운명으로서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는 무질서하고 거칠었다. 그렇지만 과감하게 나아갔고 두려움이 없어보였다. 공감이 깊었고 다정하지만 전장에선 잔인했다.
그녀는 불안했다. 그래서 섬세했고 사려깊은 행동을 했다. 취향에 숭고함이 있었고 화려하기 보단 단순하면서 고풍스러웠다. 항상 계획을 했고 안정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그녀에게 그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강한 이였고 그에게 그녀는 안정적인 보금자리 같은 이였다.
사랑은 그 기원에 있어서 우연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파트너 안에 있는 증상과 정동과의 만남, 각자가 성관계로 부터 유배된 흔적을 표시하는 모든 것과의 만남이다.
- 세미나 20, 자끄 라깡, 박영진, 라깡, 사랑, 바디우 p.87에서 재인용-
전이-관계
관계는 증상이 이끈 전이를 사회적으로 해석하며 안정화된다. 각자가 해석한 사랑의 이유를 구성하고 거기에 머물고자 한다. 안정된 권력구도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고 무언가를 보상받는 거래를 지속하고자 애쓴다.
그는 그녀의 불안이 경제적 안정 그리고 이를 통한 그녀의 가족 환상을 실현하는 것임을 (잘 못)알고 있었다. 그 환상은 세상이 욕망하는 것과 닮아있었고 그의 욕망의 방향과도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성공과 가부장적 가족환상, 그리고 자본주의적 행복 이데올로기 안에 머물고 있었다.
갈등의 원인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장애물과 같이 보였다.
그가 사회에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은 극복해야 하는 과정이자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욕망의 테스트장이었다. 그녀 역시 가부장적 환상과 자본주의적 욕망에 쏟아 붇는 과도한 의무의 강박 속에서 괴로워 해야 했다. 그 모든 것에 해법은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성공에 있다고 믿으면서…
증상
사랑의 극단, 진정한 사랑은 존재에 대한 접근에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증오에 무너집니다. …굳건한 증오가 존재에게 건네집니다. … 우리는 질투 섞인 증오, 주이상스에 대한 질투로 부터 돌출되는 증오라는 관념의 차원에 갖혀 있습니다.
- 세미나 20, 자끄 라깡, 박영진, 라깡, 사랑, 바디우 p.88에서 재인용-
사랑은 전이가 만든 오해의 환상 안에서 각자의 보상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실패한다. 이데올로기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랬던 두 사람은 증상 안에서 분리되고 불가능한 성관계에 다가갈 수록 증오를 통해 그 슬픔의 정동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행복의 약속이 불가능한 허구임을 말한다. 우울하고 때론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춘다. 세상의 이데올로기가 그를 괴롭히고 그것과 함께 그녀의 이데올로기적 비난이 쏟아진다. 그것은 세상의 비난이자 그녀의 증상을 은폐하는 말이다. 그녀는 다시 불안과 마주한다. 아버지의 부재가 주는 견딜 수 없는 불안 앞에서 그녀는 더욱 강하게 세상의 요구에 집착한다. 그는 퇴락하고 있으며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 신을 찾는다. 공동체가 함께 한다.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협업 체계는 그녀의 든든한 군대이며 압도적인 전력으로 전진한다. 그는 저항하고 항복하고 다시 저항하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그가 가족의 자리에 있는 동안 지치지 않고 계속된다.
그는 증상 안에 머물기로 한다. 완전히 머무는 건 불가능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는 적당한 해법을 찾는다. 역시 그 해법은 돈에 있다. 자본주의 사랑은 돈으로 보상되고 유지된다. 그는 운이 좋았다. 증상 안에 머무는 시간에도 돈이 만든 방어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고 믿은 환상을 떠나 새로운 환상 안에서 즐길 것을 찾는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의 주이상스의 착취라고 믿는다. 세상의 말로는 그것을 적절히 비난할 말이 찾아지지 않았다. 그가 즐기는 것이 다른 여성이었다면 그것은 “불륜”이라는 거대한 비난으로 명명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즐기는 것은 그냥 그녀가 원하는 환상 밖에 있을 뿐이다. 그녀는 그것을 “배신” 또는 “사기”라도 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증상과 마주한다. 그녀도 그 익숙하고 낯선 불안이 그를 만나기 이전 부터 있어왔다는 걸 안다. 안정을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안정을 향한 도상 위 있다고 느낄 때 행복과 가까이 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단 한번도 그런 행복을 가져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가 그것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은 실패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상실의 증상 안에서 세상이 주는 해법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동시에 증상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여전히 공백은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기에 마치 어른 들이 마시는 술이 든 잔에 입을 대보는 아이처럼 조심스럽다. 그녀에게 증상은 그에 대한 증오와 연결되어 있기에 거기에 머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계속 그 증오에 담긴 양가적 감정으로서의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의 증오는 증상을 봉합하면서 동시에 증상에 불러온다.
“새로운” 사랑? 불가능성의 벽 앞에서
[라깡의] 설교조의 비관주의는 사랑을 성적 퇴락에 대한 상상적 보충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은 성적 퇴락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성적 비관계라는 구멍이 없다면 상상적 마개로서의 사랑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불가능성의 벽에 부딪힌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벽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장식하고, 궁정풍 사랑에서처럼 이 벽을 교묘히 모면할 수 있는 척하는 것이다. 기사가 귀부인에게 바치는 비성적이고 헌신적이고 관례화된 오마주로서의 궁정풍 사랑은 성관계의 부재를 메우는 세련된 방식을 제시한다. 사랑은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성적 비관계에 대한 가시적인 반작용이다. 궁정풍 사랑은 사랑이 대상과의 성적 유대의 불가능성에 의해 실존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박영진, 라깡, 사랑, 바디우 p.88
두 사람을 증상으로 다시 만났다. 로맨틱한 이데올로기적 사랑의 환상이 아니라 증오로서 그 상실감을 직면하며 비관계로 관계하고 있다. 이 관계의 지속은 역시 궁정풍 사랑이라는 비성적인 연극을 통해서 가능한 것일까?
흔히 쇼위도 부부라고 하면 남들 앞에서 부부로서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고 무대 밖에서는 각자의 삶을 사는 허구적 관계를 말한다. 쇼윈도 부부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가부장의 역할극 안에서 관객없는 연극을 마다하지 않고 가족의 의미를 매일 (매체로 부터) 수혈받으며 살아가는 부부는 이 시대 사랑의 보편적 모범이 되어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업그레이드 된 매칭 테크놀로지를 자랑하는 자본 이데올로기의 성장 안에서 새로운 짝을 찾아 새로운 행복을 약속하는 사랑 2.0 (시즌2)의 대안도 매력적인 사랑으로 제시되고 있다.
증상의 봉합을 통해 사랑을 치유하는 형식이 아니라면 사랑은 결국 고통 속에 머물게 된다. 증상을 마주하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사랑은 가능한 것인가?
그러나 우연에서 운명으로의 이행에서 핵심은 단순히 ‘나는 너를 사랑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조직된 무질서로서의 우연을 극복함으로써 둘 이라는 준안정적 질서를 조직하는 주체적 과정에 있다. 운명으로서의 사랑은 만남의 힘을 초과하는 충실성의 사후작용덕분에 가능하다.
- 박영진, 라깡, 사랑, 바디우 p.92
“사랑에서 충실성은 이러한 끈질긴 승리를 지칭합니다. 다시 말해 지속성의 고안 속에서, 한 세계의 탄생 속에서, 나날 이후의 나날로 인해 극복된 만남의 우연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p.55
그는 증상 안에 머물며 또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자기 사랑의 형식으로 드러나고 즐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그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다른 대상을 통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증상과 마주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전히 환상과 증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불안 속에 있으나 그것은 그의 증상과 무관하지는 않다.
계속. 계속이라고 말하기. 계속이라고 말해지기. 어떻게든 계속. 도저히 안 될 때까지 계속. 말하자면 도저히 계속 할 수 없을 때까지.
말하기는 곧 말해지기. 잘못 말해지기. 이제부터 말하기는 잘못 말해지기.
……
정면으로
최악을
그것이 우리를 웃게 할 때까지.
……
- 사무엘 베케트, 최악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