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0. Fri.
범죄학에서 정신분석의 기능에 대한 이론적 도입 (1~3)
정신분석가와 주체와의 담화를 이끄는 기술, 정신분석의 경험이 정의하는 심리학적 개념들이 (범죄학과 관련하여) 진리를 찾는 여정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정신분석은 인간의 정상성에 대한 도전이자 대범한 욕망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특권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절대적인 지식-권력 속에서 정신분석은 정반대의 믿음으로 도발합니다. 비인간적인 그것,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그것이 인간적인 것의 핵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범죄는 가장 인간적인, 인간만의 것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범죄가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기에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이 가능하다는 말처럼 보입니다.
범죄학은 범죄와 범죄자를 대상으로 그것의 실체와 인과관계를 연구합니다. 고백을 통해 인간됨을 증명하는 선언으로서의 범죄가 아닌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범죄는 분명 어떤 (비인간적, 인간다움의 특권과는 다른, 동물적이거나 비이성적인)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질 수 있습니다. 과학은 그것을 생물-심리학적 본능 (유전적, 인지구조적, 생리적…)과 관련하여 연구하거나 사회적 구성체의 부작용으로서 일탈로 규정하고자 합니다. 정상과학과 정상사회의 관점에서 범죄는 변이이며 오작동이고 더 나아가 오물로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정신분석은 범죄학이 차별화한 그 범죄적 원인을 인간성의 토대로 봅니다.
법이 죄를 만든다.
로마서 7:7~11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죄가 그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나를 속이고, 또 그 계명으로 나를 죽였습니다.
법은 죄에 유혹의 권능을 부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회는 범죄의 준거로서 법을 어떤 형태로든 (불문, 성문, 관습, 전통, 계약…) 가지고 있으며 처벌이라는 책임의 표현을 통해 법과 범죄의 관계 - 차이를 드러냅니다. 책임은 주체의 동의 즉 주체의 법의 인지를 전제합니다. 동의라는 말은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법으로서 정당함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의 동의는 입법자로서의 주체라는 상황을 전제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동의는 이미 주체의 인식 이전에 주체를 주체로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언어 규범에 대한 인정일 것입니다. 실정법 차원에서도 우리는 국적이나 기본권을 포함해 이루 해아릴 수 없는 법을 당연한 상식으로서 또는 알고 있다고 가정된 성인의 자격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동의의 수준에 만족하지 못하는 건 개인이 아니라 오히려 법 자체(법은 단지 언어이기에 법을 말하는 법의 신체가 있다고도 상상할 수 있다)일 지도 모릅니다. 법은 한 개인의 범죄-법의 오염, 타락, 절대적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해 책임의 정도와 범위를 개인에게만 부과하지 않습니다. 삼족을 멸해야 하는 반정, 사지를 찢고 불로 지지고 그 비명과 냄새를 모두가 맡아야 하는 그 광범위한 책임을 통해 법은 자신을 만족시켜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만족의 희생이 너무 크다면 희생양의 순수성-법과는 무관한 초월적인 상태- 또는 초월적인 무엇의 관용과 개입을 통해야만 그 법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라깡은 법이 요구하는 책임이 단일하다고 가정된 (근대적)주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주체의 여러 심급(정신분석이 구분해낸 그 심급)에 대한 것임 말합니다.
자기 행위에 대해 종교 재판소를 대변하는 판사 앞에서 대답해야 하는 사람과 인민재판을 주재하는 파사 앞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처벌이 동일한 기능 또는 동일한 이미지와 관련해 책임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음) 이것은 명백하다.
범죄학이 주체의 법에 대한 인지와 궁극적 고백을 통한 동의 (죄의식이 있음을 증명하는 그 동의)로서 범죄의 요건-위법-책임 (형법상 범죄는 구성요건과 위법성 책임성의 심급을 나누어 증명해야 합니다)을 정의하고자 할 때, 이는 정신분석이 주체에 요구하는 고백과 인증 그리고 상징계의 통합이라는 절차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둘의 유사성 -즉 개인과 법의 접점에서 등장하는 죄책 그리고 주체와 언어의 접점에서 등장하는 초자아-은 범죄학의 과학적 접근과는 구별되는 정신분석적 접근의 기능과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범죄를 탈인간화 하지 않는 기능 그러나 범죄를 보편적 개념으로서 정의할 수 없다는 한계 말입니다.
범죄의 상징주의 - 상징적 표현으로서의 범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한 주체가 자신을 최초로 어떻게 상징화 했는지에 대한 지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즉 사회적 병리, 정신적 병리의 원인이 외상 또는 생리적 오류, 문화적 퇴화… 등으로 돌려지지 않으려면 그 병리가 “정상”이라는 이미지안에 어떻게 함께 (동근원적으로) 기입되었는지를 지식으로서 상징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이해를 도달하는 최초의 상황, 오이프스 컴플렉스의 상황 아래 명명되는 최초의 범죄적 상황 - 근친상간과 친부살해 -에 대한 지식은 프로이트에 의해 발명됩니다. 최초의 충동의 대상이 엄마의 젖가슴에서 시작하여 엄마가 되고 그 엄마(라는 대상)의 욕망의 대상이 되길 욕망하므로써 아이는 자기 이해의 첫걸음마를 뗍니다. 그리고 욕망(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실패-좌절을 통해 애증의 양가성의 딜레마-최초의 갈등-에 도착하고 다른 해법으로서 자신을 호명하는 아버지의 이름-상징계적 욕망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자기이해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것을 새로운 욕망의 이름이라 부르는 이유는 엄마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하는 그 쾌락과는 엄연히 차별화되는 욕망의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쾌락이 담긴 말이 아니라 금지의 명령이고 동시에 지연된 쾌락을 보증하는 약속입니다.
토템과 타부에서 프로이트는 바로 이 오이디푸스적 자기이해의 지식을 인간 공동체의 최초의 상황과 연결짓습니다. 여기엔 모든 엄마를 소유한 폭군적 아버지의 죽음과 그 죽음이 남긴 보편적 금지의 명령, 즉 근친 여성에 대한 쾌락의 금지와 대체할 수 있는 욕망의 대상을 상징화하는 법의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문제는 쾌락의 금지와 욕망의 약속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은 기만이기 때문에 즉 그 쾌락은 줄 수 없기 때문에 금지마저 그 절대성을 도전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맞바꾼 그 쾌락의 약속 때문에 인간은 아버지를 상징으로서 보존합니다. 아버지가 죽으니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는 라깡의 까라마조프에 대한 뒤집힌 해석은 바로 그것이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상징이 아닌 실재로서도 살아 있습니다. 유령처럼 그는 유언장이 아닌 망상으로 살아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법과 범죄와 함께 시작한다는 것을 그가 인식한 것이다. 임상가인 프로이트가 법과 범죄의 의미가 타인에 대한 가치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중요성을 갖는 등 개인이라는 형태에 이르기 까지 유지된다는 것을 입증한 후에 말이다.
죽은 아버지 이후 등장하는 모호한 배우인 아버지 이름 (역할), 초자아라고 불리는 그 아버지는 범죄를 이해하는 정신분석적 개념을 도입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늙은 카라마조프가 아들에게 “신은 죽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라고 의문을 제기했을 때, 그의 눈에서 빛나던 육욕에 대해 현대인 즉 도스토옙스키적 영웅의 허무주의적 자살을 꿈구는 또는 니체적 공상 속으로 숨을 허떡거리도록 스스로를 강요하는 현대인은 온갖 죄악과 제스처로 이렇게 대답한다. “신은 죽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 죄악과 제스쳐는 모든 자기처벌의 의미를 떠맡고 있다.
초자아, 어쩌면 정신분석이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그 효용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초자아의 효과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범죄로 몰아가는 그것들의 성격, 그것들이 반복될 때 볼 수 있는 상투형, 방어와 자백의 도발적 형식, 동기들의 이해 불가능성, 이 모든 것은 ‘주체가 저항할 수 없던 힘에 의한 강제’를 확증해 주며, 판사들은 이 모든 사례에서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다.
……
그것들을 병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들의 상징적 성격이다. 그것들의 정신병리적 구조는 그것들이 표현하는 범죄적 상황에서가 아니라 표현의 비현실적 방식에 있다.
사회적 문제로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오인되는 범죄, “주체가 저항할 수 없던 힘에 의한 강제”로서 행해진 반사회적 비행은 범죄의 요건 사실로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정신분석의 빛 아래서 초자아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라깡은 말합니다.
정신병리학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를 자연과 문화의 접점으로 이끌어갔다면 우리는 거기서 모호한 심급, 맹목적이고, 포악한 심급 (초자아)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칸트적 사유가 별이 빛나는 하늘에 변하지 않는 질서의 대응물로서 상정한 순수 의무라는 이상의 모순처럼 보인다.
초자아는 포악한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아버지는 아닐 겁니다. 실재 아버지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죽은 아버지의 살아있는 유령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초자아는 세 개의 목소리
- 금지자 아버지의 금지하는 엄격한 목소리
- 유혹자 아버지의 감언이설의 목소리
- 악의와 경쟁의 아버지의 자기 비난의 헐뜯는 목소리
의 합창인 셈이다.
- 오이디푸스, 장다비드 나지오-
오이디푸스를 통과하며 받아들이 아버지의 이름, 상징계의 아버지는 금지하는 그러나 모든 것을 금지하지는 않는 안정적인 아버지입니다. 엄마에 대한 쾌락의 금지를 인정하는 대신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욕망의 길을 터 놓는 약속이기에 의심의 순간이 오겠지만 일단은 안정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나 상징계엔 아버지만 있지는 않습니다. 유혹하는 아버지, 비난하는 아버지, 모든 것을 하나 하나 금지하고 감시하는 아버지, 혹은 아무것도 금지하지 않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상징계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기이한 아버지의 유령이 떠도는 것입니다.
초자아, 아버지의 유령은 이렇게 말합니다. Jouis! 즐겨라!
명령을 듣는 주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J’ouïs! 듣고 있습니다!
Note, 2025. 1. 7.
그는 멋대로 하라고 말했고
나는 법대로 하라고 들었다.
모든 건 그 오인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는 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니가 알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도대체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멋대로 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가 다른 곳을 바라볼 때 나는 그가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보는 그것을 파괴하고 싶어졌다.
나는 그가 바라는 것을 없애고 그에게 처벌 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의 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의 욕망이 알고 싶었다.
나는 법을 파괴하고 싶어졌다. 그가 다시 법을 말해주길 원했다.
그는 다시 말했다. 멋대로 하라!
나는 다시 법대로 하라! 고 들었다.
도대체 그 법이 무엇입니까?
뭘 원합니까?
그는 침묵했다. 나는 그의 침묵 속에서 하나의 환청을 들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믿고 나는 듣게 되었다.
너는 사랑 말라.
이것은 나의 법이 되었다.
즐겨라!라고 말한 유혹의 아버지를 오인한 주체는 들어라! 듣고 있습니다! 들어라! 듣고 있습니다!를 반복합니다. 멋대로하라를 법대로 하라고 들은 나 역시 무엇이 법이냐고 묻습니다. 모호성 속에서 불안은 쌓여가고 나는 그의 대상을 파괴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유일한 행위는 그의 욕망의 대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모호한 아버지의 명령은 나를 죄책감에 휩쌓이게 합니다. 그는 비난합니다. 나는 나를 처벌해야만 그 죄책감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범죄는 그렇게 법을 파괴한 형식으로 자기를 처벌하는 행위로서 드러납니다. 스스로 아버지의 욕망의 기표를 발음하지 않는 한, 그 발음의 의미를 스스로 맹신하는 바보가 되지 않는 한 불안을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기처벌을 위한 비행은 아버지의 자리에서 꽉찬 말로 명령하는 무언가를 통해 즉 전이의 자리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안정과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정신분석은 범죄학 이론의 딜레마를 해결한다. 즉 범죄를 비현실화하면서도 범죄자를 탈인간화하지 않는다.
범죄학 이론은 범죄자를 탈인간화하면서도 현실화된 범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생래적인 본능의 오작동이기에 범죄자는 격리되고 감시되어야 하며, 실험실 테이블 위에 놓여져야 하는 이상한 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초자아의 상징계적 표현을 전이 아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포섭합니다. 분석가의 전이는 인정하는 꽉찬 말 속에서 초자아의 유령을 하나의 텍스트로 기입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가는 주체는 가장 인간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과성의 대상도 위생학의 오물도 아닌 기표로서 재현되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