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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과 그것을 가르치는 것

CARTEL 2025. 4. 4.

정신분석과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I. 무의식 속에서는, 그것이 깊다기보다는 의식적 검토에 접근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것이 말한다. 주체 안에 또 다른 주체가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주체가 주체를 초월한다는 발상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쓴 이후로 철학자들에게 의문을 던져왔다.
II. 증상이 상징적이라는 사실이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다음을 보여준다
이 증상들이 기표로서 작동한다는 점이, 나르시시즘이라는 단계 덕분에, 즉 상상계가 상징계로부터 분리되는 지점 덕분에, 증상들을 자연적 의미에서 구별되게 만든다.
무의식의 진리는 행간 사이, 즉 그 은유들을 포괄하는 더 넓은 환유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점.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바로 이 진리의 기반(숨겨진 장소, ‘supe-pôt’)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
III. 프로이트의 탐구 방식의 적절성을 문제삼는 과정에서, 현대 정신분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입장에 도달했다
그들은 ‘환경주의(environmentalism)’를 선언했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대상(object)의 우연성에 부여했던 의미와 모순된다. (즉, 대상은 경로 속에서 우연하게 부딪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의 가장 단순한 형태로 회귀했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후기 작업에서 자아에 부여했던 종속적 지위(ego는 충동과 무의식 사이에서 중재될 뿐임)를 오해한 것이다.
IV. 이러한 모순과 오해가 드러나는 방대한 문헌은, 저항(resistance)이 그 자체의 진행 경로에 속아 넘어가는 기만물이라는 점, 그리고 그 저항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유용한 사례연구(casuistry)로 기능할 수 있다 — 즉, 상상적 효과에 갇힌 이인 관계(dyadic relation) 안에 그 저항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근원에서 빛이 비춰질 때, 그 환상(fantasies)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효과들의 연쇄(series, suite)를 일관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처럼 빈곤한 경로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 기반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정신분석에서의 진정한 작업은 본질적으로 숨겨져 있는 것이다.”
V. 하지만 분석의 구조(structure)는 그렇지 않다. 그 구조는, 만약 프로이트에게 의존한다면, 즉 그 구조를 실제로 구성해낸 프로이트를 따른다면, 과학 공동체에도 완전히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형식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은 그저 하나의 인공적 장치(artifice)일 뿐이며, 그 구성 요소들은 그 구성 요소들 전체가 그 개념 자체를 포함한다는 점을 프로이트가 제시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이 구성 요소들이 형식적으로라도 유지되기만 하면, 그 전체 구조는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가가 이 구성 요소들을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을 경우, 그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이해의 부족은 종종 분석 과정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와 혼동되곤 한다. 현재 주류 이론은 이를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으로 입증하고 있다:
분석가의 자아(ego)는 최소한 자율적이어야 하며, 현실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담자(analysand)에게 분석은 곧 그 현실을 시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은 분석이라는 장(field)의 본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정신분석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상징적 사슬(symbolic chain)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사슬은 다음의 세 차원을 지니며, 저자는 이 세 방향 안에서 분석가 훈련의 경로를 그려나가려 한다
삶이 역사로 살아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역사성'의 차원
오직 과잉-중층결정(over-determination)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법칙에 대한 복종의 차원
진리가 실재(réel) 안으로 들어오는 방식인 상호주관적 게임의 차원
VI. “진리의 자리(locus)”라고 불리는 그 장소는, ‘그 자리(locus)’에 관한 진리를 위한 전주(prelude)로서 기능한다. 이 자리는 주체(subject)도 아니고, 소문자 ‘타자(other)’도 아니다. 이 소문자 타자는, 자아(ego)의 선택에 영혼을 부여하고, 왜곡된 욕망(perverse desire)의 환상에 육체를 부여하면서,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융합(coalescence)을 초래한다.
이 융합은 모든 저항(resistance)이 달라붙는 지점이며, 모든 암시(suggestion)가 중심축을 찾는 자리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어떤 이성의 교활함(cunning of reason)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단, 그것들이 그 교활함에 열려 있다는 것은 예외다. 이성의 교활함은, 폭력이 배제된 자리에서, 정교한 수사(rhetoric)로 작동하며, 무의식이 우리에게 그것을 손잡이(prise)로 제공하고, 그와 함께, 타자(대문자 O)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놀라움을 가져온다. 사람은 소문자 타자(other)에게 말할 때마다—심지어 거짓말을 할 때조차도— 바로 이 대문자 타자(Other)에 대한 믿음을 호소하는 것이다. 분석가는 중립성(neutrality)을 통해 이 소문자 타자(other)를 넘어선 대타자(Other)를 위한 자리를 열어둔다. 그는 자신을 ‘중성적(ne-uter)’ 존재로 만들며, 즉, 그 자리에 있는 둘 중 누구도 되지 않으며,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 타자(Other)가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무의식은 그 타자(Other)의 담론이며, 그 안에서 주체는 자신의 잊혀진 메시지를, 약속의 형식에 적합한 거꾸로 된 형태로 수신하게 된다. 하지만 이 대타자는, 무의식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술(difficult art)로 배반하고 있는 그 탐구(quest)로부터는 여전히 절반 정도의 거리에 불과하다. 이 대단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지한 주체는, 프로이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대상의 역설들을 통해 드러난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다음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실재(réel)은 거부(refusal)로부터 그 존재를 얻는다.
사랑은, 현실에 결여된 것으로부터 그 대상을 창조한다.
욕망은, 그 결여를 현실이 형상화하고 있는 커튼 뒤에 멈춰 선다.
나는 무의식의 문법을 배우고 익힌다.
그 문법은 하나의 문체에 의해 가려진다. 주체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자아 묘사의 구조이자 강력한 스타일인 그 문체 뒤에 문법이 있다.
자아의 이미지는 문법을 감출 정도의 강력한 “상징계들” 중 하나의 문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문체는 어김없이 자아의 의미들과 발음하는 단어의 분리와 비문을 통해 문법의 자리를 보여준다.
주어와 동사의 미끄러짐, 동사로 부터 탈출하는 목적어, 수동태가 능동태로 능동태가 부정태가 되어버리는 태의 흔들림,시제의 접힘, 주어의 생략에 들어 앉은 목적어는 그 자리가 탈착되고 고착되는 빈자리임을 드러내버린다.
나는 흔들리는 문체의 빈틈으로 문법의 자리를 본다.
없음이 있는 자리에 실재라는 기표가 앉고
그 위를 상실과 결핍이라는 기표가 덮는다.
째빨리 수없이 많은 접지 구멍을 가진 자아의 기표가 내려와 자리를 잡으면
곧바로 그물처럼 촘촘히 연결된 접속 단자들이 구멍을 향해 꼿힌다.
끝없는 의문형의 기표 구조가 최초의 자아 기표로 돌아올 수 없는 미로를 형성하고
또 한 편에선 최초의 자아 기표 자리를 깊이 숨겨버리는 단정적인 말들과 강조형의 명령들이 화려한 병렬적 접속을 통해 완결된 세계를 형성한다.
처음과 끝을 모르는 미로와 그 기원을 완전히 가려버린 세계는 교묘히 얽히고 얽혀 어느 것이 미로이고 어느 것이 세계인지 조차 구별되지 않는다.
I. 무의식 속에서는, 그것이 깊다기보다는 의식적 검토에 접근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것이 말한다. 주체 안에 또 다른 주체가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주체가 주체를 초월한다는 발상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쓴 이후로 철학자들에게 의문을 던져왔다.
철학은 무의식의 구멍을 막는다.
오류는 언제나 규칙 속에 숨어들며, 그 오류가 유발한 불안을 보호하려는 그 규칙들 속에 스스로를 은폐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오류는, 사람들이 그 규칙들을 '투명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만큼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의식이라는 기표가 끌어들이는 이원론의 유혹이 너무 강했을까? 아니면 철학의 주인은 의식이어야 한다 또는 더 좁게 이성이라는 논리 그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을까? 의식이 전부인 사회는 의식을 정의하고 그 밖에 것을 무의식이라 부르고 싶은 이들에 의해 의식 바깥의 그것조차 명확한 논리에 의해 파악되어야 만 했다.
그들은 **정신 기능의 이원론(dualism)**을 구성하며, 이 안에서 무의식은 의식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대비된다:
본능적 vs. 지적인
자동적 vs. 통제된
직관적 vs. 논리적
정념적 vs. 합리화된
원초적 vs. 통합된
그것들은 정치적 편향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 정치적 편향은 우리를 곧장 **사회적 유기체론(social organicism)**으로 이끈다. 이 유기체론은 로마의 영웅 메넨니우스 아그리파(Menenius Agrippa)가 군중을 설득했던 우화(fable)—몸의 부위들이 서로 역할을 한다는 비유—에서 극단적으로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된 이후,
별로 그 은유를 심화시키지 못했다. 다만, 오늘날에는 **‘두뇌가 심리적 명령의 중심으로서 수행하는 의식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결국은 ‘두뇌 집단(brain trust)’의 미덕이라는 신화를 정당화하게 되었을 뿐이다.
‘자동성(automatism)’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지워버렸는지도 관찰할 수 있다. 의료 인류학이나 프로이트 이전의 심리학에서 자동성은 본래 훨씬 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기계 혁명이 복원해준 자동성의 의미들에 비하면 빈약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인간의 언어의 구조에 집중한 과학과 기술이 만든 기계(혁명) - 언어 알고리즘이야 말로 무의식을 새롭게 드러내는 계기처럼 느껴진다.
스스로 학습하고 결정하는 시스템' 이런 시스템은 인간처럼 의도 없이 판단을 내리고 입력값에 따라 반응하며 때로는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무의식의 작용과 어떤 면에서 매우 닮은 것처럼 느껴진다. 기계가 인간처럼 사고하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원래부터 기계적으로 사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II. 증상이 상징적이라는 사실이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다음을 보여준다
이 증상들이 기표로서 작동한다는 점이, 나르시시즘이라는 단계 덕분에, 즉 상상계가 상징계로부터 분리되는 지점 덕분에, 증상들을 자연적 의미에서 구별되게 만든다.
무의식의 진리는 행간 사이, 즉 그 은유들을 포괄하는 더 넓은 환유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점.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바로 이 진리의 기반(숨겨진 장소, ‘supe-pôt’)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
증상은 잘못된 것,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드러내는 표현일까 그 표현을 통해 우리는 그것, 무의식의 오작동, 충돌하는 것의 갈등을 드러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이해는 다시 관리와 통제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무의식은 실체가 아니라 기표를 통해 구성되고 조직된 구조라고 말한다. 증상은 그 조직된 그 구조가 어긋나고, 엇갈리고, 막히고, 끊어지는 지점의 반복 속에서 표현된다. 의식은 무의식 기표구조의 어설픔을 가리는 정교한 문체 또는 집요한 문체를 준다.
어쩌면 우리가 찾는 근본환상은 자짓 융의 상상적 원형의 신화처럼 착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본환상은 최초의 원형적 대상관계, 엄마와 나의 그 사건, 처럼 나에게 반복되는 증상적 원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반복되는 사물이자 실체가 아니라 기표의 문법이 반복적으로 부딪히는 순환이거나 되돌아가는 멈춤일 뿐이지.
증상이 읽힐 수 있는 이유는 그 증상 자체가 이미 하나의 ‘기입된 글쓰기 과정(writing process)’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특수한 형성물로서 증상은 하나의 의미(signification)가 아니라, 그것을 결정짓는 기표 구조와의 관계다. 이 표현을 허락해준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주어(subject)와 동사(verb) 사이의 일치다.
“시뇨렐리(Signorelli)”라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의 끊김을 떠올려보라. 시뇨렐리는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적그리스도’ 벽화를 그린 화가인데, 프로이트는 그 벽화의 세부나 자화상은 생생하게 기억했지만, 이름은 기억해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이름 속에 포함된 "Signor"(‘씨’ 혹은 ‘주인’)가 독일어로는 Herr에 해당하는데, 이 단어가 프로이트의 무의식 속에서 종말론적 테마—즉, 죽음의 주제—에 의해 억압되었기 때문이다.
기표는 기표를 밀어내고 연결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단어의 망각, 실수 등은 기표들에 대한 이전의 구조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Signorelli’는 이탈리아 화가. → Signore + elli
Freud는 대화 도중에 죽음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었고,
그때 떠오른 기표들: Herr (독일어 ‘씨’, ‘주인’), Tot (죽음), Bosnie (보스니아에서의 죽음) → 이때 ‘Signore’라는 기표가 떠오를 수 있었지만, 이미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죽음 관련 기표들에 의해 '밀려났다'는 것.
Herr (독일어로 주인)이라는 기표는, Signore (이탈리아어로 주인)라는 기표와 의미 구조상 중첩됨. 하지만 죽음이라는 기표가 이미 Herr와 강하게 결합된 채 무의식 안에서 작동 중
여행 중 프로이트는 터키의 무슬림 지역을 지나며 한 에피소드를 듣게 됨:
어느 터키 남자가 아내의 병(성병) 치료를 포기하며 말하길:
“Herr wird es geben” (주께서 마련하시리라).
이는 죽음을 앞둔 환자의 방치, 치료 포기, 인간의 무력함, 종말의 운명성 등을 함축함.
이 “Herr”라는 단어, 즉 ‘주인’/‘신’이 죽음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이 기표("Signor"/"Herr")를 억압
III. 프로이트의 탐구 방식의 적절성을 문제삼는 과정에서, 현대 정신분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입장에 도달했다
그들은 ‘환경주의(environmentalism)’를 선언했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대상(object)의 우연성에 부여했던 의미와 모순된다. (즉, 대상은 경로 속에서 우연하게 부딪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의 가장 단순한 형태로 회귀했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후기 작업에서 자아에 부여했던 종속적 지위(ego는 충동과 무의식 사이에서 중재될 뿐임)를 오해한 것이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아들의 이가 시큰거린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는 그 신 포도가 너무도 시다고 느끼기에, 그리고 그 포도는 대개 황새가 데려다주는 실망으로 알려져 있기에 다시금 여우 가면을 쓴 얼굴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죽은자가 산자를 살린다. 아버지의 신포도가 아들의 이를 시큰거리게 하듯 79년의 ‘계엄’ 2024년 12월 3일을 사는 주체들의 심장을 멈추게 했지. 그것은 수많은 죽음과 끔찍한 경험의 결함을 통해 확장되고 재생산되는 기표의 구조다. 그것이 다시 등장했을 때 그 경험은 기표를 통해 21세기에 태어난 주체들의 몸까지을 흔들고 하나의 행동으로 이끌 수 있었지.
계엄 - 광주 - 죽음 - 사면 - 억압, 애도되지 못하는 그것은 계엄이라는 기표와 떠돌다 다시 그 기표가 나오는 순간 계엄 - 죽음 - 저항 - 탄핵 이라는 새로운 기표의 환유를 갖게 되었다.
탄핵은 완변한 애도는 아니지만 이제 계엄은 더 이상 마비의 기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황새의 실망은 반복되고 냉소적인 여우의 얼굴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민주주의는 실망과 무능력의 기표이기에 작동하는 것이니까
IV. 이러한 모순과 오해가 드러나는 방대한 문헌은, 저항(resistance)이 그 자체의 진행 경로에 속아 넘어가는 기만물이라는 점, 그리고 그 저항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유용한 사례연구(casuistry)로 기능할 수 있다 — 즉, 상상적 효과에 갇힌 이인 관계(dyadic relation) 안에 그 저항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근원에서 빛이 비춰질 때, 그 환상(fantasies)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효과들의 연쇄(series, suite)를 일관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처럼 빈곤한 경로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 기반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정신분석에서의 진정한 작업은 본질적으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아이의 상상적 형성(imaginary formations)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은 천재 여성(내가 엉뚱한 상상으로 ‘내장 정육점 주인’이라 부른다면 이를 알아볼 이도 있을 것이다)에게서 우리는 이렇게 배우기도 한다 “아이는 그 ‘나쁜 대상 포도’를 황새의 창자 속에서 찢어내고 싶어 하며, 그래서 여우를 두려워한다.”
이 말을 내가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라 퐁텐의 우화에서 우리가 신화의 구조, 즉 공포를 야기하는 제4자의 개입이 요구되는 지점을 더 명확하게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제4자는 공포증 속에서 기표로서 작동하는 어떤 것이다.)
멜라니 클라인은 아이는 아주 이른 시기(생후 몇 개월)부터 엄마를 ‘전체 대상’이 아니라 ‘부분 대상(part-objects)’**으로 경험한다고 하지 좋은 유방 대 나쁜 유방, 좋은 엄마 대 나쁜 엄마, 특히 좌절을 겪을 때, 아이는 “엄마의 나쁜 젖/창자/자궁을 찢고, 그 안에 들어가 파괴하고 싶다고 그 좌절을 내면화하고 공격적으로 투사하면서 엄마의 몸을 상상적으로 해부하고 조작하고 싶어하는 거라고….
라퐁텐의 우화에서 여우는 황새에게도 포도에게도 공격하지 않아. “저 포도는 시어서 못 먹겠어” 라고 하지. 무능력이 신맛으로 변할 때 기표는 좌절을 맛없음으로 표지하는 거야.
신맛이 없었다면 여우는 미쳐버리고 말았을 거야.
정육점 주인은 여우에게 그건 네가 포도를 먹어보지 못해서 그래. 내가 포도를 줄테니 나처럼 이렇게 먹어보렴이라고 말할 거야. 포도에서 신맛을 지워버리는 그 위험천만한 짓, 아니면 신맛 대신 비린 내장을 내어주는 정육점 주인의 상술을 보여주겠지.
V. 하지만 분석의 구조(structure)는 그렇지 않다. 그 구조는, 만약 프로이트에게 의존한다면, 즉 그 구조를 실제로 구성해낸 프로이트를 따른다면, 과학 공동체에도 완전히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형식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은 그저 하나의 인공적 장치(artifice)일 뿐이며, 그 구성 요소들은 그 구성 요소들 전체가 그 개념 자체를 포함한다는 점을 프로이트가 제시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이 구성 요소들이 형식적으로라도 유지되기만 하면, 그 전체 구조는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가가 이 구성 요소들을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을 경우, 그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이해의 부족은 종종 분석 과정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와 혼동되곤 한다. 현재 주류 이론은 이를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으로 입증하고 있다:
분석가의 자아(ego)는 최소한 자율적이어야 하며, 현실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내담자(analysand)에게 분석은 곧 그 현실을 시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은 분석이라는 장(field)의 본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정신분석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하나의 상징적 사슬(symbolic chain)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사슬은 다음의 세 차원을 지니며, 저자는 이 세 방향 안에서 분석가 훈련의 경로를 그려나가려 한다
삶이 역사로 살아지는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역사성'의 차원
오직 과잉-중층결정(over-determination)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의 법칙에 대한 복종의 차원
진리가 실재(réel) 안으로 들어오는 방식인 상호주관적 게임의 차원
그들은 결국 성기의 결합이라는 사과(apple)와 헌신적 선물이라는 오렌지(orange)를 혼동하고 말았으며, 분석가의 자아(ego)를 주체가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을 교정하기 위한 선택된 수단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이 교정은 오직 다음을 통해서만 이뤄진다고 여겨진다. ‘건강한 자아’와의 동일시를 통해서. 하지만 그 동일시의 대상이 또 다른 정신분석가의 자아라면, 그 자아 역시 결국에는 어떤 이상화된 현실에 대한 관계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너무 이른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존재의 무(nothingness)에 대한 인가(authentification)를 언어라는 신 포도(sour grape)의 형태로 받은 아이는,
그리고 자신을 미끼처럼 부르며 절망의 젖으로 먹였던 어머니가 거짓 희망의 말로 건넨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로 인해, 마치 상상적인 향락(jouissance)에서 이유 없이 떼어졌거나 어떤 실제적인 애정을 받지 못했을 때보다 훨씬 더 이가 시큰거렸기(set his teeth on edge) 때문이다.
상처받은 내면 아이는 말한다.
“나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려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늘 누군가 나를 떠날까봐 불안하다.”
그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결핍, 상처 경험이 감정적으로 치유되지 않은 채 내면에 남아 성인이 된 이후에도 반복해서 불안, 회피, 자기 파괴적 패턴으로 나타나는 거야 라고 말한다면 그 상처의 치유를 떠맡는자의 위치만 드러나고 흔들리겠지.
“버림” 그 기표가 이끄는 곳을 따라가 보려고 하는데 나을꺼야. “버림”은 승리이기도 하고 쾌락이기도 하며 엄마를 부르는 기표이기도 하지. “버려짐”이야 말로 아이의 쾌락의 알리바이처럼 불안을 붙잡아두고 벼려진 날카로운 상처의 기표와 얽혀있겠지.
차라리 그 아이의 배(abdomen)를 만져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VI. “진리의 자리(locus)”라고 불리는 그 장소는, ‘그 자리(locus)’에 관한 진리를 위한 전주(prelude)로서 기능한다. 이 자리는 주체(subject)도 아니고, 소문자 ‘타자(other)’도 아니다. 이 소문자 타자는, 자아(ego)의 선택에 영혼을 부여하고, 왜곡된 욕망(perverse desire)의 환상에 육체를 부여하면서,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융합(coalescence)을 초래한다.
이 융합은 모든 저항(resistance)이 달라붙는 지점이며, 모든 암시(suggestion)가 중심축을 찾는 자리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어떤 이성의 교활함(cunning of reason)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단, 그것들이 그 교활함에 열려 있다는 것은 예외다. 이성의 교활함은, 폭력이 배제된 자리에서, 정교한 수사(rhetoric)로 작동하며, 무의식이 우리에게 그것을 손잡이(prise)로 제공하고, 그와 함께, 타자(대문자 O)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놀라움을 가져온다. 사람은 소문자 타자(other)에게 말할 때마다—심지어 거짓말을 할 때조차도— 바로 이 대문자 타자(Other)에 대한 믿음을 호소하는 것이다. 분석가는 중립성(neutrality)을 통해 이 소문자 타자(other)를 넘어선 대타자(Other)를 위한 자리를 열어둔다. 그는 자신을 ‘중성적(ne-uter)’ 존재로 만들며, 즉, 그 자리에 있는 둘 중 누구도 되지 않으며,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 타자(Other)가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무의식은 그 타자(Other)의 담론이며, 그 안에서 주체는 자신의 잊혀진 메시지를, 약속의 형식에 적합한 거꾸로 된 형태로 수신하게 된다. 하지만 이 대타자는, 무의식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술(difficult art)로 배반하고 있는 그 탐구(quest)로부터는 여전히 절반 정도의 거리에 불과하다. 이 대단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지한 주체는, 프로이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대상의 역설들을 통해 드러난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다음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실재(réel)은 거부(refusal)로부터 그 존재를 얻는다.
사랑은, 현실에 결여된 것으로부터 그 대상을 창조한다.
욕망은, 그 결여를 현실이 형상화하고 있는 커튼 뒤에 멈춰 선다.
나는 사기꾼이다. 나에게는 언제나 알리바이가 있다. 나는 속이고 있다.
“신경증자는 누구를 속이고 있는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다음이다. 이 친밀한 전략(intimate strategy)의 상대자(the other)는, 흔히 생각하듯이 신경증자의 주변 인물들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심리학이 도식화하는 관계적 벡터에 따라 인간들 사이의 ‘지도’ 위에 찍히는 점들 말이다.
히스테리적 주체의 말 속엔 항상 대리인이 있지. 그(녀)는 상상적 이미지, 모조된 기표, 거울 속 타자에 사로잡혀 있고, 그 앞에서만 자기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늘 “당신이 나를 욕망해줘야 내가 존재할 수 있어요”라는 형식으로 욕망을 말하지.
히스테리 주체는 실재의 타자를 오직 자신과 같은 성(sex)을 가진 누군가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너머(beyond)’ 속에서 그녀는 자기에게 육체를 부여해줄 것(lui donner corps)을 요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어디에서도 자신에게 구체적인 형체(prendre corps)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실재의 타자로부터 응답이 없다면, 히스테리 주체는 ‘채무불이행에 대한 체포 contrainte par corps’를 통지하듯 대리인(straw man)을 동원해 그녀를 붙잡으려 들 것이다. 이 대리인은, 그녀가 자기를 소외시켰다기보다 그 앞에서 유예된 채 머물러 있던 상상적 타자대체물이다.
그(녀)는 연기해. 상상적 타자 앞에서 마주하지 못하는 대타자를 욕망하지. 자신을 실재로 만들어 줄 사람을 찾지만 모두가 원하는 것 같은 상상적 타자 앞에서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으로 그에게 인정받는 것을 원해.
히스테리 주체는 또 다른 여성에게 바치는 경의(hommage) 안에서 자신을 체험하게 되며(éprouve), 그녀가 자신의 수수께끼를 숭배하는 그 여성을 남성에게 바치는 제물처럼 내어준다. 여기서 그 남성은 히스테리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존재다. 그러나 그녀는 그 역할을 수행하되, 그것을 향유(en jouir)하지는 못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여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색에 나서지만, 그 욕망은 결국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속여서(tromper) 지연시킬 수밖에 없다.
강박적 주체의 말 속엔 언제나 아무것도 없지.
강박 주체의 전략에서는, 죽음을 수많은 속임수(ruses)로 지연(tromper)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이 게임 속에서, 주체의 자아(ego)는 그 속임수들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수많은 기예(feats)의 도전에서 그를 떠받치는 지주(prop)로 작동하게 된다.
그는 연극 무대를 만들고 있어. 안전한 곳. 정해진 순서와 정해진 장면이 있는 그곳.
“내가 이만큼 치밀하게 준비하니까 죽음을 피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그 치밀한 움직임이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움직이니까 난 안전한 거야.”
사람들은 나를 보고 있어. 나를 인정하고 박수치고 위로하고 사랑해주지. 그들의 눈에 나는 분명 잘 살고 있어.
강박 주체는 죽음을 밀어내려 하다가, 오히려 그것을 상상적 타자의 형상으로 가둔다.
나를 지켜보는 타자는 죽음의 그림자가 되고 죽음과 싸우지 않으면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 그래서 타자를 내쫓을 수도 없고, 그 타자의 시선 없이 살 수도 없다.
하지만 나에겐 쾌락이 없지. 그들에게 있으니 그래도 살만하지.
주체가 몇몇 현실의 맹수들(réel의 인물들)이종종 그들의 대가로 고통을 감수하면서 참여하는 우리(cage) 안에서 벌이는 광경 속에서, 마치 고전 승마술(classical equitation)의 기량을 펼치는 것처럼 자기가 살아 있음을 입증하려 애쓰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향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 장면의 목적은 단지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증명은 죽음에 대한 도전이라는 명분 아래 은밀히 죽음을 몰아내는 효과를 가진다. 하지만 모든 쾌락(jouissance)은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타자에게 축적되고, 그 타자를 밀어내려는 순간, 죽음이 해방된다. 주체는 그렇게 하면서도 죽음이 언젠가 그를 덮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