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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에서의 말의 기능과 언어의 장

CARTEL

1.
주체의 정신분석적 실현에 있어서 빈 말과 찬 말
20241213_이강원
… 정신분석은 단 하나의 매개물, 즉 환자의 말을 갖는다. 모든 말은 응답을 요청한다.
듣는 이가 있다면 말은 침묵을 대면한다해도 응답없는 말은 없다. 분석에서 이것이 말의 기능의 핵심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의 침묵 뒤에 어떤 진실이 있다는 기대가 든다면 나는 “침묵”(입을 다문채 눈길을 떨구거나 초점없는 것을 바라보고, 눈을 감는 그 행동)을 대상으로 삼는 성급한 과학자의 함정 속으로 들어간다. 침묵이 침묵을 보는자 (듣는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를 부르는 것이다. 일단 그것은 공백자체이다. 타자가 욕망을 드러내고 나르시시즘의 기념물을 세우는 방식으로 유혹하는 시도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균열에 있는 그 공백을 부르는 것이다.
침묵하는 자에게 나는 자기 성찰을 요구해야 할까? “당신에 대해 편하게 말해달라”는 독촉을 해야하는 것일까? “나는 별로 나에 대해 할 말이 없네요”라며 침묵을 택하는 자에게 분석가는 무엇을 주어야 할까? 그의 침묵은 좌절(불만), 공격석, 퇴행이라는 삼화음의 잔향 같은 걸일까?
분석이 그것의 약점을 드러내야 한다고 해도, “정동”이라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변증법적 무지의 금지어인 이 말은 주체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둔감한지를 드러내는 역사적 상흔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좌절, 공격성, 퇴행 모두 명확한 심리학의 개념으로서 왜 불만이 공격성의 원인이자 그 공격성 행위의 퇴행성에 대해 설명하는 인과론적 설명이리라. 모든 공격성엔 불만-좌절이 선행하고 있다는 자연스러운 이론. 분석주체의 침묵을 또는 분석가의 침묵에 반응하는 도발(Acting-out)을 좌절과 공격의 인과론으로 그리고 그것을 퇴행의 유형으로 설명하는 방식에 대한 코멘트일까.
공감과 칭찬에 침묵으로 반응하는 내 앞에 앉은 주체를 보라. “아니에요. 나는 칭찬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공감해줄 필요 없습니다. … 난 이대로 불만인게 좋습니다.”
주체는 거기서 하나의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더 크게 박탈당하는 과정에 빠지는 게 아닐까? … 마침내 그 와 같은 존재가 상상적인 것 속에서 자기가 만든 것에 다름 아니며, 이처럼 자기가 만든 것이 자기에게서 모든 확신을 기만한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작업을 또 다른 것을 위해 재구성하기 위해 하는 적업 속에서 주체는 그것을 다른 것처럼 구성하도록 만들고 또 그것을 항상 다른 것에 의해 빼앗길 것으로 운명지어온 기본적인 소외를 다시 발견하기 때문이다. 불만 속에 견디며 살아가는 것을 자아의 능력이라고 정의해 온 그 자아는 바로 불만(좌절) 그 자체인 것이다.
당신의 불만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봅시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을 견디며 사는 것이 성숙한 인간이죠.
라고 말한다. 긍정과 강점을 통해 더 안정적이고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라는 그 말이 주체를 끊임없는 소외로 데려간다. 좋은 엄마, 좋은 아빠, 좋은 상사, 좋은 선배, 성숙한 리더…. 이 모든 상상 속 완벽함에 다가가는 인정의 말이 인도하는 길 끝에 보이지 않는 절벽이 있다. 그 절벽으로 향하는 역경 속에서 인간이 내비치는 저항을 진정한 공격성이라 믿는 소박한 분석가에겐 “모든 일을 완벽하게 마친 노예가 죽음에의 욕망을 드러내는 공격성”에 대해 이해 할 수 없으리라.
“내가 이것이었던 것은 오직 내가 될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였다.” 환자의 침묵 앞에서 그를 나르시시즘적 담화로 다시 되돌려 넣지 않는다면, 분석가가 주체를 주적하는데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위험이란 부정적 반응이 아니라 소외라는 새로운 상태에 고착되는 것, 안정적인 상상적인 대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환자의 망상이 분석가의 망상으로 옮겨간다. 당신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어야 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구의 망상이 옳을까? 더 성숙한 망상, 분석가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분석가를 추종하고 존경해 마지 않는 그 전이의 미끼를 던져야 할까. 결국 역전이의 덫에 걸려 자신이 던지 말에 꼼작달삭 못하는 분석가의 감옥 속으로 들어가야 할까.
그와 정반대로 마지막 망상이 소진될 때까지 주체의 확신을 중단시키는 것이 분석가의 기법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망상의 해소가 절분되어야 하는 것은 주체의 담화 속에서이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시죠.” 분석가의 해석이 멈춘다. “분명 당신의 꿈은 해석될 수 없는 것이만, 그것을 해석하는 당신의 방향이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으나 승화의 방향으로 해석하시는 군요. 쾌락의 근본구조이지만 그것의 시작이 되는 곳이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 뒤에 그는 세션을 중단한다. 분석가의 최종 기표는 하나의 요구이자 질문으로 해석된다.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의무의 짐을 지고 그 곳을 나온다.
분석가에 마지막 말 뒤에서.
누군가는 그 순간 시계를 본다. 아직 40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지, 내 해석이 틀렸다는 것인가?
말도 안되는 해석 같아. 나는 이제 아마 문제가 없는데… 뭘 더 찾으라는 건가.
이제 그만 오라는 소리인가? 내가 분석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퇴행이란 주체의 담화구조가 해체되는 매 단계마다 자아에 의해 방출되는 환상적 관계를 담화 속에서 현현 하는 것일 뿐이다. … 대상에 한 현재의 관계가 가진 현실성을 퇴행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체를 인간을 소외시키는 착각, 즉 단지 정신분석의 알리바이 중의 하나를 반향할 뿐인 착각 속에 투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해할 수 없는 분석가의 말과 행동, 그 기대에 어긋남이 주는 간극 때문에 드러나는 증상적 정동은 퇴행이라는 발달론적 현상이 아니다. 그건 단지 그의 담화가 소외된 무엇임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자아의 반응이다. 침묵 역시 그러하다.
주체의 현실과의 직접적 접촉으로 가는 길에 의존하는 것 만큼 분석가를 오도하는 것은 없다.
그럼 말보더 더 직접적인 것은 없을까. 최면을 통해, 아니면 환각적 약물과 향, 음악, 몸의 접촉과 호흡… 이 모든 것이 소외된 자아를 너머 환자의 실재와 닿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주체는 그것을 체험하여 모든 상상적 소외의 대상들로 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말 외엔 아무것도 없다.
분석가가 다룰 수 있는 번위 안에 유일한 대상은 분석가와 자아로서의 주체를 연결하는 상상적 관계 뿐이다. 이 관계를 제거할 수 없더라도 그는 귀의 용도를 잘 이용하여 조절할 수 있다. 성경과 생리학이 함께 말하는 평범한 용법, 즉 귀는 듣지 않기 위해 있다. 달리 말하면 이해할 수 있는 것만 걸러내기 위해 있다는 그 귀를 이용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소리를 전달하는 제3 또는 제4의 귀란 없기 때문이다.
말은 그럼에도 계속 그 가치를 잃는다. 주체는 계속 상상적 관계속에서 사로잡힌 이미지로서 말을 전하고 있기에 그것은 단지 빈말일 뿐이기에 그렇다. 말은 어쩌면 그냥 착각 너머의 무엇에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가치 밖에는 없지 않을까.
아직 그렇게 단정하기엔 이르다.
브로이어와 프로이트에 의해 도입된 방법은 탄생 직후 브로이어의 환자 안나 O에 의해 ”말 치료” 라는 세례명을 얻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또 두 사람은 트라우마적이라고 불리는 병인적 사건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이 히스테리증자와 함께 시작된 경험이었음을 기억하자.
환자의 증상은 환자의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고 말함으로서 치료되었다. 말의 효과는 증상의 제거가 되었다. 분석가가 나의 증상의 유형을 말해주고 나의 꿈과 고통의 원인을 발음해 주는 순간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더 이상 화가 나지 않고, 더 이상 수치스럽지 않으며 두렵거나 떨리거나 숨이 쉬어지지 않거나 땀이 비오듯 흐르는 증상이 완화되고 사라진다. 나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 마치 분석가 처럼 나에게 진단을 내린다. 이건 아버지의 응시 때문에 내가 만든 환상이야. 이 아이가 불쌍한 건 슬픈 나를 동일시 했기 때문이야. 말의 위력은 이렇게 거리를 만들어 준다.
그러한 말은 언어 속으로 주체를 부르고 붙들어 매는 밧줄처럼 주체를 얽어 맨다.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려 앞의 두 기억은 주체를 기재로 즉 그렇게 있어 왔던 것으로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화의 내적 통일성 속에서 현재 존재하는 것은 기재해온 것들을 수렴을 표시한다.
관성의 삶, 빠져있는 존재가 흔들릴 때 그를 기존의 시간의 행렬 속으로 단도리하는 것이 바로 말이다. 꽉찬 말 그것은 흔들리는 존재를 붙드는 말인 것이다.
정신분석 병력에서 중요한 건 현실이 아니라 진리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떤 사건에 다가올 필연성을 부여함으로서 그 사건들을 일관되게 정립하는 것이 꽉 찬 말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 즉 결정의 순간을 위해 이해의 시간을 폐기하는 것, 이것은 주체의 의식적 사고가 기존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를 결정하는 쪽으로 향하도록 촉구한다.
증상을 치료하는 건 억압된 기억을 회복하는 말이 아니라 기억을 재구성(때론 창조)하는 권력의 말이라는 것일까. 결단이 존재를 구성하는 실존주의 실천처럼 분석가의 말이 존재의 회복을 통해 증상을 치료한다는 발상은 “말” 꽉찬 말의 가치를 다시 복원해 준다. 모든 힐링의 말이 이런 꽉찬 말의 Sheep dog-목양견 효과란 말인가?
그런데 그 말은 단지 분석가의 상상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분석가 뒤에 주체의 역사-시간은 구성하는 초개인적인 무의식이 말의 장을 구성한다.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적 발견이 현실적 기초 속에서 명확해지는 것 또한 무의식이 제3항의 위치를 갖는 것 속에서 인데, 즉 무의식이란 초개인적인 것으로서 구체적 담화, 주체의 의식적 담화에 일관성을 복원하는 데서 주체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무의식적 사유처럼 모순된 말이 있을까. 프로이트는 우리의 사유가 의식인 “나” 밖에 있다는 도발을 통해 자아를 주체와 분리시켰다. 그럼 무의식은 어디에 있을까?
무의식은 공란으로 표시된 또는 거짓말로 채워진 내 역사의 챕터다. 그것은 검열된 챕터다. 그러나 진리는 재발견될 수 있다. 대체로 이미 다른 곳에 쓰여있는데, 바로
(기념물) 나의 몸, 히스테리적 증상이 언어의 구조를 드러내고 해독되는 히스테리
(기록보관소의 문헌들) 유년기의 기억, 내가 유래를 모르는 그 기억들
(의미론적 진화) 나의 특유한 어휘들의 축적과 수용, 나의 문체 스타일
영웅화된 형태로 나의 역사를 전하는 전통과 전설
서사의 장속에 삽입되는 나의 역사가 왜곡되는 그 흔적, 나의 해석이 구성되는 그 과정
무의식은 내가 모르는 내 몸이자, 기억이자 문체이자 전설이자 해석의 주름이다. 그것은 아마 자기도 모르게 하는 믿고 있는 신앙과 자기 모르게 터져나오는 슬픔과 불안, 자기 모르게 행하게 되는 실천 속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주체는 개인이 주관적으로 체험허는 것을 훨씬 넘어, 정확히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진실까지 - 그것은 아마 당신이 이미 다시 닫아버린 입에서 나오리라 - 나아간다. 그렇다. 주체의 역사의 이러한 진실은 작은 역을 맡은 배역에 대사에 모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자기 대사만을 알기 때문에 경험하는 고통스런 갈등 속에 심지어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장면의 페이지 속에 표시된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소년이 온다>를 완성해 마침내 출간한 2014년 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꼈다고 고백해온 고통이었다. 내가 이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고통과,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느꼈다고 말하는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그 고통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간성을 믿고자 하기에, 그 믿음이 흔들릴 때 자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그 사랑이 부서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사랑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어떤 고통은 사랑의 증거인 것일까? ……
소설을 쓸 때 나는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끼는,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필멸하는 존재로서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가진 내가 느끼는 그 생생한 감각들을 전류처럼 문장들에 불어넣으려 하고, 그 전류가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면 놀라고 감동한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