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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원칙을 넘어서 (1936)

Cartel 20241101 _ 이강원
관념연합론에 대한 비판과 프로이트 방법론의 혁명성
심리현상의 실체적 원자로서의 뇌의 신경물리학적 원소 (심상 기억)의 개념과 그것들의 체계적인 연관형식 특히 유사성에 의한 연관 개념이 중심이 되어 심리 현상을 분석하는 이론 체계
심리현상의 원자적 실체를 가정하는 전통은 그리스 철학으로 부터 온 것인데 그것은 모든 현상에 원자적 실체를 원인으로 가정하는 관념에서 온 것이며
그 심리적 원자들의 배치는 일관된 논리 구조에 의해 특히 유사성 (그외 차이와 인과성도 포함)의 본질적 성격에 따라 적정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감각, 지각, 이미지, 논리적 연산, 판단 등 현상을 분류하는 스콜라적 방식은 무비판적으로 이러한 관념연합의 이론을 정당화 한다.
문제는 이러한 관념연합론으 개념과 이론이 이미 선취된 개념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논점 선취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감각 소여에 의한 심상 기억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그 외의 것은 환각이나 무시해야 할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진정한 환각으로 인간의 이해를 축소하기 때문이다.
p.78 이러한 이해방식은 심리현상들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합리적 인식이라는 관념작용에 부합하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정서, 신념, 망상, 동의 , 직관, 꿈 등의 그 밖에 것들로 분류되는 것이다. 전자는 관념연합론의 정상적 작동에 의해 분석될 것이고 후자는 낯선 심리학적 경계의 연안 또는 생물학-본능적인 목적으로 환원되는 결정론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프로이트의 혁명성은 그가 관념연합론과 생물학주의의 지적 풍토의 외부에서 심리현상의 사회적 관계성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그는 상호 관계 속에서 경험되는 심리 현상 자체를 서술하고 분석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그는 관념연합론에 의해 구분된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의 선택을 거부하고
환자의 말 전체가 제공하는 경험 즉 분석경험 자체를 다루기 위한 새로운 원칙을 제안한다.
빠트리지 않음과 체계화하지 않음이 그것이다. 이는 자유연상의 법칙으로 통합하여 이야기 된다.

분석경험

p.83
정신분석가는 언어가 지시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화되는 현장의 상대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 분석가로 하여금 언어와 분석상황을 분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죠. 분석주체는 담화 속에 ‘말하고 싶지 않음’을 담으려고 하기에 담화는 의미 없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담화의 내용이 아니라)그 자신이 (의도가) 분석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됩니다.
분석가는 분석주체의 말에 (일상적으로) 반응하려는 충동의 순간 그것을 인지하고 그 충동을 지연시킵니다. 그럼으로서 분석가는 분석주체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즉 사회적 관계 속 특정한 긴장을 재현하는 어떤 의도, 요구, 처벌, 회유, 설명, 순수한 공격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의도를 언어는 어떻게 전달하는지 이야기해 보지요. 그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하나는 분석주체가 말하는 동안 자신이 말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진짜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분명 분석주체가 자신의 경험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지 개념으로 명확히 이해되지만 그 실제의 의도를 부정하는 방식이죠.
즉 분석경험에서 의도는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표현되지만 의식적 차원에서는 억압되는 겁니다. 그리고 사회적 표현 (즉 의식적 정보전달 형식)으로서 전달되는 언어는 일관되면서도 주체의 (그 자체의)표현에 있어서는 애매함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즉 언어는 모순된 사유 또는 거짓을 위한 사유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것이 모든 의식에 관한 특히 병적 의식 (신경증?)에 대한 풍부한 연구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분석가에게 나는 말했다.
답답하다 하던 일, 하고 싶었던 일, 모든 게 괴물같이 싫다. 일을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혀 책 속에 문자에 만 메달린다. 오디오 북이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걷고 또 걷고 앉아서 문자를 베껴쓰고 내 목소리로 읽었다. 읽는 건 마치 내가 그 문자를 쏟아내는 느낌이다. 그런 나를 아내는 괴물처럼 바라보았다. 퇴화하는 생물처럼 병에 걸린 듯 바라보고 불안해 했다. 나는 화가나고 슬프고 억울했다. 그런 나를 설명해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번아웃입니까? 나는 충동장애입니까? 나는 우울증입니까? 나는 무엇입니까? 진리를 담은 책, 아니면 진리를 아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했기에 내가 방황하는 것입니까? 아내가 문제입니까? 세상이 문제입니까? 진단만이 나를 살릴 수 있습니다. 원인을 아는 것 그리고 효과가 있든 없든 치료의 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제는 해결되고 있는 거 아닙니까?
p.84
계속해보지요. 이제 듣는 자(분석가)는 대화 속에서 분석주체의 상대방의 자리에 있습니다. 말하는 분석 주체는 분석가에게 대화상대의 역할을 맡아달라고 간청하죠. 처음엔 은근히 이후엔 노골적으로 요구합니다. 하지만 분석가는 침묵하며 또 표정을 비롯한 모든 것을 숨기면서 그 역할을 맡기를 거부합니다. 분석가의 거부때문에 분석주체가 말을 결국 멈추게되는 한계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가 계속 말을 한다면 그건 분석 경험의 법칙 즉 자유연상 (빼놓지 않음과 체계화-정리하지 않음)의 법칙 때문일테지요. 그런데 그가 계속 눈 앞에 분석가에게 말하고 있을까요? 다른 누군가 상상적인 더 실제적인 누군가에 게 말하는 건 아닐까요? 기억 속의 환영이나 그의 고독의 증인, 의무의 동상, 운명의 사자에게 일까요?
분석가에게 말했다. 아내에 대한 말들. 무서운 시선과 나를 위협하는 질문들에 대해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요구에 대해 나는 그 사이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는 그 시선과 말에 대해 그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분석가는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옆에 있습니다.
그는 관찰하 듯 내 말의 괘적을 지켜보는 객처럼 그렇게 말한다.
p.84 분석가가 역할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분석주체는 분석가를 대체하는 이미지를 드러냅니다. 분석주체는 애원하고 욕하고 은근히 암시하고 자극하고 계략을 쓰면서 그가 드러내는 이미지의 윤곽을 공유합니다. 분석주체의 변화무상한 의도는 분석가를 향하고 있지요. 분석가는 가만히 그렇다고 수동적이지는 않은 태도로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그 의도들이 담화를 통해 더 명백해지면 주체의 말은 드러난 의도를 지지하는 이야기, 그 의도와 일관된 이야기, 긴장이 덜한 이야기들과 뒤섞입니다. 이러한 분석주체는 담화를 통해 자신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자신이 분석을 통해 극복하고 싶은 것을을 만들기도 하며, 비밀스런 실패의 이야기를 털어 놓고 성공적인 계획에 대해서도 털어 놓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성격과 타인들과의 관계에 관해서도 판단하게 되지요. 이렇게 분석주체는 분석가에게 자신의 행동의 전체적인 모습을 알려주고 분석가는 그 행동의 순간을 목격한 자로서 분석의 기초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분석가에게 바로 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재 분석주체의 행동으로 부터 나타나는 그 이미지, 그건 그의 모든 행동 속에 있는 것이지요.
분석가에게 나는 말했다. 항상 믿는다는 짧은 한마디와 엄마의 충실하고 성실한 삶을 통해 느낀 아버지에 대해. 존경받고 높은 권위를 가졌으며 중요한 일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나는 말한다. 아주 순간이었지만 왠지 몇 번이고 반복했던 그 짧은 상황, 아버지의 초과하는 행동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굳이 기억하여 이야기하는 나를 분석가는 아무말 없이 바라봅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던 것과 말하지 못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엄마에게도 말했던 것 그리고 말하지 못했던 것 반복합니다.
하지만 분석가는 그 이미지의 발견만으로 멈추지는 않아요. 분석주체의 요구는 청원하는 것 처럼 자신의 변론을 증인인 분석가에게 확장하여 항변하기 시작합니다. 분석주체의 요구는 순수한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주체의 밖”의 이야기이죠. 마치 분석주체가 자신을 담화의 흐름으로 내던져진 듯 말이죠. 의도치 않았던 사건들, 기억의 편린들이 구성하는 자신의 역사, 가장 일관성없는 것들 중 어린시절로 부터 떠오르는 기억들 속으로 그는 던져집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분석가는 그 이미지를 새로이 발견합니다. 분석가는 그 이미지가 바로 인간의 본질과 관련된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열정을 일으키기도하고 억압하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자신의 특성들을 분석가의 시선으로 부터 숨깁니다. 그건 분석가 역시 분석주체로 부터 숨기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분석가는 이 특성들이 가족의 초상화 속에 있음을 발견할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 또는 때론 자상하고 때론 무섭고 친창하고 벌주는 성인, 형제 자매와 같은 경쟁자의 이미지들을 말이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미지나 친구의 이미지도 마찬가지죠.
분석가에게 말했다. 매번 나에겐 나를 이끄는 인물들이 있었고 그들은 어쩌면 아버지와는 동떨어진 사람들이었다. 괴짜스럽고 유명하며 뭔가 아버지의 경직된 권위와 공적 이미지를 넘어서 있는 모습들. 그런 이미지들에 매혹된 건 어쩌면 그 짧은 순간의 아버지의 초과에 대한 이질감에서 부터 였을 것 같다고. 가짜 권위와 진짜 권위를 구분하는 것은 매력적인 메타 권력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항상 가짜를 호되게 비난하고 자신이 진짜임을 강하게 주장했다. 나는 그들의 호통을 통해 가짜가 아닌 나를 확인했다. 그 비난의 목소리에 죄책감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그 목소리의 원래 자리는 아버지였고 아버지의 초과에 의해 벌어진 틈 사이로 기이한 목소리들과 교차하며 아내의 목소리가 되기도 했다.
p.85 그러나 그렇게 행동을 통해 표현되고 재생되는 이미지는 분석주체에 의해 무시됩니다. 무시란 두가지 의미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관심을 갖든 아니든 반복하는 행동 속에서 나오는 이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이미지가 재현하는 기억들이 떠오를 때 마다 분석주체는 그것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죠.
이제 분석가가 그 이미지를 인식하는 임무를 완수하는 동안 분석주체는온갖 방법을 통해 분석가에게 대화 상대의 역할을 부여하려 했던 과정를 완성하게 됩니다. 결국 분석가는 분석주체는 자신의 권능을 이러한 위치에서 가져오는 겁니다.
분석가에게 말했다. 그것은 꿈이 말한 것을 내가 기억하여 말한 것이다. 큰 창 안으로 들이치는 검은 개들, 칼을 들고 나에게 달려드는 폭력배들, 웃음과 금지의 상징을 가진 기이한 성적 이미지들과 결합된 그것들, 작은 병안에 든 하얀 여인과 사마귀, 위협하는 말벌, 무대에 세워진 인형같은 배우들과 말하지 못하는 입, 경찰차에 탄 외국인 해적들, 끊임없이 등장하는 아파트와 학교 그리고 테라스가 넓은 큰 창의 방… 꿈을 꾼 후 그 기억들을 지우려는 기억의 시간 속에서 말을 만들고 형상을 붙이고 정체를 규정하고 상황을 정리한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꿈을 대상으로 기억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냥 평범하고 당연한 이미지이지라 기억나지 않는다는 중요한 변명을 던지고 분석가의 눈치를 본다. 나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 하는데 줄 수 없다. 그의 침묵이 난처함이 아닐까.
분석가는 말한다. 그것은 중요하군요. 그 이미지 나를 참을 수 없게 합니다.
이때 분석가는 분석주체가 자신의 내면에서 굴절되어 이질적으로 보이는 그 이미지의 통일적인 모습을 분석주체에게 알도록 해주지요. 그것을 만들수도, 구체화할 수도, 그냥 아는 것처럼 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분석가가 실제로 어떻게 그것을 수행하는지는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는 해석을 이용한 지적인 설명과 전이를 통한 정서적 접근을 활용한다고 해두겠습니다. 하지만 분석가-분석주체의 분석경험의 시간을 구성하는 건 결국 기술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 기술이란 분석주체의 반응을 정의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겠지요. 분석가는 분석주체의 반응들의 리듬을 다루는 요령을 통해 분석의 속도를 조정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분석주체는 분석을 하는 동안 자신의 반복되는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생생한 과정을 경험합니다. 그는 그 이미지가 제공하는 반복을 따라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기억들의 더 밀도있는 모습을 다시 구성하지요. 분석가는 분석주체의 증상이 사라지고 분석주체의 자아가 완성됨에 따라 이제 전이의 힘이 약해짐과 그것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음 알게 됩니다.
분석가는 말한다. 그것은 계속 반복되고 있네요. 그게 뭘까요? 그것은 어쩌면 근본환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석가에게 나는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그것이 환상이라면 나는 그것을 매번 부르고 그 응시 아래 죄책감 속에 있는 긴장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죄책감이 가벼워진 건 사실이네요. 변했네요. 그것이.
분석의 끝은 이런 해피엔딩은 아닐 것 같다. 전이가 힘을 잃은 것이라기 보다 분석주체의 이미지를 통일적으로 암시하는 분석가가 더 이상 전이의 상대방이 아닐 수도 있으니 이것은 새로운 연극의 시작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