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 La Vita Nuova
1. 존재론 : 나와 너
(1) 자기 소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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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하나의 여정으로 또는 방황으로 말했다. 나는 이렇게 지금에 이르렀고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고.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며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유형으로서 너(들)에게 이해된다. 그 유형으로서의 나는 <너(들)-그들>에게도 편하고 나 스스로도 편한 위치이다. ‘그들’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나’는 그 자체로 불안하며 배제될 위기 속에 살아갈지 모른다.
적어도 진실한 자기-자신에 대한 “말”은 모름, 상실, 방황, 부정, 불안…과 유사한 어떤 것이다.
(2) 물고기가 사라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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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자) 너머에 무엇이 지배하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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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한다. 그것은 물고기 아닌 것과의 ‘위치 지음’(동일한 것 안에서 차이를 통해 구별되고 질서지어지는)을 통해 물고기로서 의미의 축성을 받는다. 누구로 부터 축성을 받는가. 그것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찾던 질서이자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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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 밀러는 물고기 너머의 “축성하는 그것”을 믿었다. 그것이 주는 삶의 의미를 찾아 (그것을 탁월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찾는 데이비즈를 따라) 방황했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진실은 물고기가 없다는 것 그것은 물고기 아닌 것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고기를 물고기라 의미부여하는 축성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신론이자 무진리론이자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 새로운 과학, 새로운 진리를 향한…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음이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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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이 아닌 항상 되어가고 변화하고 규정할 수 없으나 그것은 그 자체로 나의 존재를 과정으로서 있게 해 주는 “무엇(명사) 아닌… 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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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사라진 세상은 “물고기”-의미부여에 의해 살해된 수 많은 존재 가능과 되어감-변화함이 부활하고, 거기에 함께 나-되어감-변해감-사라지고-생겨나는…존재하는 그런 ‘실존’의 세계
(3) 하이데거의 존재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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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마치 존재(자) 너머에서 존재자를 바라보듯 본질과 의미를 “말”하는 세계에 대해 존재물음이 상실된 곳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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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이것은 “그 너머의 그것이”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라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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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존재물음이란 “존재자가 왜 그 존재자로 드러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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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적 해석 즉 있는 사태 자체를 통해 그 사태가 드러나는 존재론적 구조를 그 시간 속에서 해석하는 것을 통해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를 밝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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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 “세계는 어떻게 물고기-존재를 드러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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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현존재)은 이미 생활 세계의 일상 속에 물과 물 밖의 환경을 구별하며 살고 있고, 물 속 생물에 대한 인지적 관습 속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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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에 있는 생물은 외형적 특징, 습성 등(이미 인간이 살고 있는 생활세계의 익숙한 도구성에 의한 특징들)의 유사성을 보이고 관찰은 그 유사성을 일종의 유형으로 구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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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형화에서 더 나아가 인간은 이미 살고 있는 생활 세계 내의 질서를 그 유형 속에 도입하고 일종의 윤리적 질서의 자연세계를 의미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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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 현존재 : 생활 세계 ⇒ 세계-내-존재로서 이미 세계의 사물과 타자(다른 현존재)와의 공동의 이해 속에 구성된 존재자로서 매 순간 염려(Sorge-Besorge-Fursorge) 속에서 ‘기분잡혀져’ 있으며 빠져있는 개방된 터 있음 (Da-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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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된 존재로서 현존재는 이미 공동 이해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사물과 타자 역시 이해하고 있다. 다만 그 이해란 것은 존재를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은폐하고 덜 드러내는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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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로서의 자기 (빠져 있는 현존재)
“그들” 속에 상실되어버림으로 해서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현사실적인 존재가능이 각기 그때마다 이미 결정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존재가능성의 장악을 현존재로부터 언제나 이미 박탈했다. “그들”은 심지어 현존재에게서 이러한 가능성을 분명하게 선택해야 할 짐을 암암리에 면제해주면서도 그것을 은닉한다. 누가 본래 선택하고 있는지가 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렇게 선택 없이 아무도 아닌 자에 의해서 끌려다니게 됨으로써 현존재는 자신을 비본래성 속으로 빠드리는데, 그것은 오직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고유하게 “그들” 속에서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그 자신에게로 되 찾아오는 식으로만 되돌려 세워질 수 있다. …. “그들”에서부터 자신을 되찾아옴은, 다시말해서 “그들”-자신을 본래적인 “자기-존재”로 실존적으로 변양시키는 일은 ‘선택의 만회’로서 수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선택의 만회란, 이 ‘선택을 선택함’, 자신의 고유한 자기에서부터 하나의 존재가능을 결정함을 의미한다. 선택을 선택함에서 현존재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본래적 존재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 존재와시간 제54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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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들-세계에 빠져있는 나는 그들의 이해 안에서 나를 이해하고 (경영하는 나-성장하는 나) 잡담-호기심-애매성 (말, 시선, 명확함) 속에서 유혹되고 안정되며 소외되고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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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섬뜩함과 불안 앞에 선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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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있음은 모든 의미가 무력해지는 순간의 도래로 부터 멈춘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관계적으로 상실되는 죽음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붕괴당하는 순간에 대한 불안과 섬뜩함으로 죽음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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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무화(의미없음, 우울…)를 앞에서 나는 되돌아 다시 그들에게 가거나 그 무의미의 세계의 “부름”을 따라 본래적 존재로서의 삶을 결단(기투)할 수 있다.
(4) 사르트르의 타자의 시선 “지옥은 타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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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하이게거의 존재 물음 안에서 “타자-다른 현존재”의 시선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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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은 사물을 지향적으로 의식하는 1차 의식 밖에 2차 의식인 대자 즉 인식하는 나를 바라보는 자아를 구성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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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스스로의 반성 “거울보기”을 통해 형성되기도하고 타자의 시선이 그대로 나를 구성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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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거울을 보는 나의 반성적 시선 역시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들-이해로서의 나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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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아는 타자일 뿐이다.
지옥은 타인이야. (존재와무 - 훔쳐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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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역시 타자의 지옥으로 부터 자기-자신을 찾는 방법은 결국 던져진 무로서의 실존을 받아들이고 “자유”의 의무를 결단하는 “실천”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실천은 사르트르에게 문학이 된다.
2. 정신분석의 탐구 “나”는 욕망하는 장치
(1) 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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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되지 않는 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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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게 존재는 현존재에게 이해되는 영역 밖에 것- 은폐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세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본래적 존재가능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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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이성적 자아 밖에 무언가 비이성적 영역이 존재하며 그것은 정상으로서 이해되는 (그들-세계) 세계에서 비정상 또는 광인으로 명명된 곳에 있는 무엇임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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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견은 가부장적 세계 속에서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는 여성 환자들과의 담화를 통해 발견되었고 그것은 가장 억압된 “성-충동”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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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충동은 마치 에너지와 같아서 생리적 활동으로서의 배설과 항상성 (경제성) 관점에서 이해되었고 그것은 리비도의 배출과 적절한 변형의 치유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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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후기)와 그 후예들을 비판하면 등장한 자크 라깡은 치유의 대상인 리비도의 무의식을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관점으로 재편하는데, 무의식은 “말”이 구성한 “그들-세계”의 구조인 동시에 그들-세계를 균열시키는 “말-아님”을 동시에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R-실제계, S-상징계, I-상상계 / J(쾌락-향유)
(2)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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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란 일관된 실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상실된) 쾌락-욕망을 찾아 끊임없이 의미를 생산하는 기계이자 동시에 생산을 멈추고 다른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예술 행위자로서의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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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신분석의 임상은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의미생산의 기계로서 그들-세계의 삶을 반복해온 주체의 분열적 증상 (감정, 반복된 행위, 신체적 고통, 실수….)을 통해 기존의 그들-세계가 만든 욕망의 구조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욕망의 창조를 통해 새로운 환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 된다.
(3) 환상으로서의 삶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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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신분석에서 삶이란 환상을 만드는 욕망하는 주체의 행위일 뿐이며 타자가 만든 환상을 반복하느냐 아니면 내가 창조한 환상을 만들고 또 부수고 다시 만드는 나만의 반복을 살아가느냐의 문제가 된다.
3. 다른 나 - 새로운 인생 Viat Nu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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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에 처음 본 베아트리체를 18살에 다시 보고 사랑에 빠진 단테는 그녀를 실제 유혹하지 않고 예찬의 글을 통해 사랑하는 길을 택한다. 24살에 베아트리체는 죽음을 맞이하고 단테는 그 상실의 슬픔 속에서 새로운 삶의 기억을 글로 쓴다.
애도일기 - 롤랑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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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번 새로운 것을 합니다. 23년 22년과 다르게…, 매번 새로운 것… - 새로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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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해야하는 일들 속에서 새로운 일을 찾는 것으로, 소비해야하는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사서 쓰는 것으로… 새로운 경험이라는 환상 속에서 삶을 반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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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도 결국 우리는 지루함의 권태와 마주합니다. 그것은 반복하기에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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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생에 한번은 꼭 사건을 마주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상실과 애도로서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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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애도일기를 씁니다. 애도가 타자의 말로 채워지는 것을 거부하려면 그는 새로운 상실의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테의 베아트리체의 죽음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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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에서 오는 우울 속에서 우리는 타자의 애도를 통해 다시 반복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단절과 고독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바르트는 그것을 “단절”이리고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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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어떻게 그 단절을 결단하고 지속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3) 자기 소개 (표현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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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쓰지않기-다르게 쓰기-또 쓰기-쓰지않기-다르게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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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 멈춤 → 새로운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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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책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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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쓰지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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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는 글 → 잘 읽히지 않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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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혹하는 문체를 만들고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