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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oks of 2021

The Metamorphosis 나는 변했다. 내가 변한 것이고 내가 둘러보는 세계도 변한다. 오로지 변화되는 것을 바라보며 쓸모로서 살아지는 삶에서 변화하라고 유혹하는 건 오직 책이다. 그 낯선 표지를 열어 쓸모없는 한 걸음을 들이면 불안함이 느껴지고 순간 가라앉았던 허무한 물음이 울렁이듯 떠오른다. 둘러보던 빈 시선은 그 안을 응시한다. 나는 변했다. 그건 스스로 알 수 없는 거짓이다. 그건 내가 바라는 것이 변하고 바라보는 것이 변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마치 벌레가 된 잠자가 찾은 인간다움을 향한 바램같이 말이다. 그 고립과 독립를 의뭉스레 바라보는 문 밖 시선을 의식하며 소파 밑에 숨어 변해온 시간을 떠올려 본다.

#1 톨스토이 '이반일리치의 죽음 / 참회록'

Dec. 2020 ~ Jan. 2021
"이반일리치의 죽음, 광인의 수기" 석영중, 정지원 역. 열린책들 (2018)
"톨스토이 참회록" 박형규 옮김. 범우사 (1998)
작년 연말 갯벌이 보이는 바닷가로 톨스토이를 들고 떠났다. 열심히 무언가를 하며 성장하고 이루는 것에 몰입한 삶에 '죽음'이라는 최초의 '실제'가 주어졌다. 쓸모와 인정이라는 동력으로 움직이던 나의 시계가 그렇게 멈춰버렸다.
"이미 굳어져 버린 삶의 경로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숱한 사건이 아니라 그 같은 사건을 낳았고 지금도 삶의 반복을 만드는 나의 생각과 맞서야 한다."
죽는다는 것을 알고 죽어가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톨스토이에게서 배운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삶을 살아가는 궁핍한 기술을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치열하게 그 기술을 찾아 헤맨 톨스토이의 결론을 보고 똑같은 반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백록에서 그 죽음을 잊고자 했던 쾌락에 대한 추구나 지적인 탐구 모두 나 역시 거쳐가야 하는 방법들일 것이다. 다만 톨스토이가 말한 삶의 유일한 의미, 참된 사랑, 외부 존재에 의한 의미 부여와 그 목적에 부합하는 삶, 생활과 신앙...의 영향아래에서 또 그것과 맞서면서 고민하게 될 것 같다.

#2 헤르만헤세 '싯타르타'

Jan. 2021
"싯타르타" 박병덕 역. 민음사세계문학전집-58. 민음사 (2002)
헤르만 헤세는 톨스토이를 진리의 인식이 아닌 진리 자체를 사는 사상가라고 했다. 바람에 흩날리며 흔들리는 낙엽같은 삶이 아니라 일정한 궤도를 돌며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별같은 삶... 확고한 삶의 의미와 해방으로서의 해탈을 직시한 헤세는 톨스토이를 갈망하는 마음으로부터 나를 유혹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그것의 원인은 한 가지,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트만을 추구하였고 바라문을 추구하였다.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해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고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싯타르타가 고립된 수행 속에서 자신의 두려움의 실체를 직시하며 깨닫는 순간이다. 하지만 자신을 세상의 퇴락 속으로 던지며 사랑이라는 가장 소중한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고통과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결국 오랜 벗을 만나 침묵과 미소만을 지을 뿐이다.
헤세의 싯타르타를 읽는 동안 의미를 찾는 내게 정체성이 아닌 나로서의 평안함을 주었다. 본질도 진리도 목적도 아닌 것을, 따르지도 가지려고도 안으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아니하면 나는 마치 차안에서 피안으로의 건넘 처럼 되돌아오지 않을 해방과 자유를 느낄까... 하는 희망으로 없어야 할 것으로 다시 만들어 부여잡았다.

#3 강화길 '음복'

Feb. 2021
강화길 '음복'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중. 문학동네. (2020)
올해 초 한창 죽음과 삶의 의미로 가라앉던 시간 밖, 쓸모로써 끈김없이 돌아가야 했던 다른 시간은 가볍지만 강한 정념과 사소하지만 심각한 요령들로 가득했다. 존재나 진리같은 무겁지만 쓸모없는 것들은 권력이나 돈처럼 가벼이 높이 솟고 멀리 미치는 강력한 세속의 빛에 녹아버렸다.
쓸모의 시간에 붙어있는 내 몸은 환상이 주는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경 돌기 같았다. 권력은 오직 몸으로 그 실체를 알수 있다. 무딘 것은 권력이요 예민한 것은 복종이다.
"걔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제사 상 앞에 모인 남자와 여자들은 무심함과 조심함 사이에서 권력을 이해한다.
쓸모의 집단인 회사라는 조직 속에서 내 몸이 느끼는 감각과 오묘히 오버랩되면서 소설 '음복'(강화길) 속 대화를 엿들었다. 나는 소설 말미에 이렇게 끄적여 놓았다.
'무지해도 되는 삶에서 무뎌진 감각과 소심함,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예민한 감각, 권력에 대한 호기심이 만들어 준 관찰의 감각... 그러나 여전히 스스로 무뎌지고 싶은 의지... 약자 특유의 유연함과 의연함... 체념 또는 그러함을 통해 능숙해진 전술적 행동...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숙련된 약자이고 싶지 않은) 저항이 혼란과 어색함을 만든다.'
소통, 쓸모의 조직으로서 개별 단자들의 기능적 소통은 가능해보이지만...권력공동체로서 무딤과 조심이 서로를 의식하며 말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알아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있는 것과 없는 것,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 할 것이 예민하게 겨누고 있는 공간에서 소통은 그 자체로 권력의 표상일 뿐이다.

#4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Mar. 2021 ~ Da
"존재와 시간". 전양범 역. 동서문화서 (2016)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박찬국. 그린비 (2014)
세상이 던져준 목표가 나의 시간을 빨아들일 때, 톨스토이와 헤세는 죽음과 자각을 던져주며 그 시간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시간이 멈춘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불안했다. 죽음의 명령은 숭고한 목적과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았고 자각은 무심한 벗어남을 요구했다. 신앙도 출가도 선택하고 싶지 않았고 선택할 수 없었다. 결국 쓸모의 시간을 지워버린 빈공간은 '불안'이 차지해버렸다.
'존재와 시간'을 집어든 건 바로 '불안'때문이다. 근본 기분으로서 불안은 존재물음으로 들어서는 문이라는 하이데거의 속삭임에 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론의 첫페이지 부터 하이데거는 존재물음을 망각한 철학을 질책한다. 대학 졸업 후로 철학 자체를 망각한 나에게 하는 질책 같다. 혼자만의 경험인 죽음도, 아집을 벗은 그대로의 나도 불안의 공간을 대체한 글자이고 표상일 뿐, 나는 진지하게 불안한 나, 그리고 무의미를 붙잡고 살고 싶은 나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하이데거는 존재를 통해 진리를 물으려 하지말고 존재 자체를 물어보자고 했다.
존재와시간은 내 삶에서 떨어질 수 없는 의미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해서도 의식적으로 옆에 놓고 읽고자 하는 의지 때문도 아니다. 일상을 살면서 내가 매일 퇴락하고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미 일상의 평균 이해가 되어버린 이야기들은 그저 전달되고 퍼지며 공공의 해석이 되고, 공공의 이야기 이끄는 낯선 것들은 정신없이 분산되어 끊임없이 보고 듣는 내 호기심을 유혹한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는 애매함 속에서 나는 주변을 살피고 엿듣고 뒤쳐지지 않은 나에 안도한다. 나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이해하고 싶은 것, 부러워 하는 것을 열심히 부단히 알아가며 바쁘고 긴장하고 생기있게 살아간다. 나는 가끔씩 나를 불안하게 하는 공허감과 무의미의 그림자를 피해 빈말을 듣고 새로운 호기심에 기뻐하고 애매한 안정감에 취하며 그렇게 매일 전락한다.' Mar. 8. 2021
내가 스스로 진지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삶의 무게들은 비본질적 삶이라는 퇴락의 중력때문이었다. 인간은 상승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일 퇴락하는 존재이며 세계를 둘러보는 나의 부지런한 호기심의 쾌락은 나를 오히려 은폐된 세계로 감금한다. 나를 매일의 퇴락과 전락으로 부터 불안과 무의미의 실존으로 이끄는 고삐로서 존재와시간을 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 리차드세넷 '장인', '투게더', '짓기와 거주하기'

Apr. 2021
"장인: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김홍식 옮김. 21세기북스. (Sennett, R. The craftsman. Yale University Press) (2008)
"투게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김병화 역. 서울: 현암사 (Sennett, R. Together: The Rituals, Pleasures, and Politics of Cooperation. London: Penguin) (2013)
"짓기와 거주하기: 도시를 위한 윤리". 김병화 옮김. 김영사 (Sennett, R. Building and dwelling: ethics for the city. Farrar, Straus and Giroux) (2018)
기업을 자본의 성장를 위한 조직된 기관으로 바라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기업의 순환계로 비유되는 재무는 기업현상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준다. 자본은 자기 자신과 부채라는 수단의 지원을 받아 유무형자산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자기를 증식한다. 자산을 통해 벌어들인 돈에서, 동력으로 작업한 인간들과 장소를 제공한 건물주, 관련 지원 서비스 주체에게 각각의 대가를 나누어준다. 그리고 인프라를 제공한 국가에 세금을 내며 부채라는 수단을 제공한 채권자에게도 이자를 나누어준다. 그리고 나머지 이익은 자본으로서 자신을 증식하는데 사용된다.
자본은 그렇게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문제는 자신이 거대해진 만큼 소비자를 거대하게 만들어야 하는 자본의 거인국 이상향이, 공룡도 감당 못한 지구에겐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지구 환경의 안정적인 지속을 위해 인간은 자본에게 새로운 비용을 부과하는 결정을 내렸다. 아이러니하게 자본의 지속적인 성장과 지구의 지속적인 환경 안정의 요구가 묘한 언어적 콜라보를 하고 있다는 것. 성장을 멈추라는 요구와 그래도 성장하겠다는 요구가 지속가능성이라는 이념을 만들고 있다.
자본에게 또 다른 까다롭고 귀찮은 문제는 인간이다. 최적의 합리성으로 인간을 관리하기엔 인간의 조건과 외적 규제들이 사사건건 개입하여 방해한다. 자본이 찾아낸 솔루션은 한 인격에게 규칙적이고 반복된 작업이 아니라 불특정 인간에게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대체가능하고 분산된 작업을 공시하고 필요한 노동주체가 스스로 찾아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같은 인간에게 억지로 부여해야했던 합리적 관리자의 역할을 이제는 기계에게 맡기고 시간차 없는 명령과 피드백의 전달로 완전무결 합리성의 이상에 도달할 실마리가 보인 것이다.
자본의 마지막 정복의 대상은 더 이상 없어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일터에서 자본이 호명하는 정체성에 혼란과 불편함을 느끼며 일하는 인간으로서의 정신으로 갈등하는 불안한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로, 나름의 사회적 사명감으로 창업을 하기도 하고 조직에 들어가 낯선 컬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자본은 자신의 몸을 떼어주며 증식하는 부의 쾌락으로 유혹하는 동시에 거인의 초상화를 들고 흔들며 그들의 경쟁심과 자존심을 자극한다.
"일 자체가 아닌 성장을 통해 너 자신을 증명하라!"
경영이라는 자본이 선물한 유니폼을 입은 그들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경영의 장인은 누구일까? 자본을 더 지속적이고 효율적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전문가일까. 작업의 공동체를 그들의 이상을 향해 이끌어가는 리더일까?
근대 이후 세계는 일하는 사람들의 동기 부여를 위해 두가지 처방을 내놓는다. 하나는 공동체를 위해 일하라는 도덕적 의무감을 강조하는 것, 다른 하나는 경쟁을 유발해 다른 사람 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는 욕망을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가지 어떤 것도 호모 파베르의 열망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 세넷, "장인"
리차드 세넷의 호모파베르 시리즈 "장인" "투게더" "짓기와 거주하기"는 자본의 유혹 아래서 일하는 장인과 그들의 소통 그리고 그들의 거주 즉 윤리의 문제를 다룬다. 세넷은 아렌트와 하이데거에게 하고 싶었던 반론, 아니 어쩌면 아렌트나 하이데거가 도전해 보고 싶었던 일하는 인간들의 일상에서의 철학을 하고 있다.

#6 서필훈, '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

'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 문학동네 (2020)
커피리브레,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200 (https://coffeelibre.kr/)
"커피는 육수처럼 걸쭉하고 표면에는 기름이 둥둥 떠 있고 색깔은 검다 못해 보라빛이 감돌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모금 마셨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호로록 쩝쩝. 나는 인생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는 그 커피를 마시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 :내가 만든 우주)
나도 그랬다. 연남동 그 소박한 공간에서 마신 커피는 나에겐 인생 전체는 아니어도 일부를 바치고 싶게 했다. 당장 로스팅 기계와 관련 책을 사서 매일 커피콩을 볶았다. 같은 생두를 볶은 원두를 사서 맛을 비교해 가며 그렇게 매일 주방엔 불나방처럼 흩날리는 커피 껍질들과 카라멜향이 함께 진동했다. 결국 역류성 식도염을 얻었고...매일 스페셜티 커피를 원하는 배전으로 직접 볶아 내 맘대로 마시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을 친근하게 느끼는 건 유투브 때문일까... 그의 책은 때 마치 오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으로 읽었다. '장인'을 읽은 후 만난 장인이어서 그런지 그의 말과 생각 그리고 영상에서 보이는 커피를 볶는 모습과 내리는 모습 하나하나가 나에겐 철학적 일상으로 보였다.
그는 커피를 만드는 장인이자 '커피 리브레'의 '가치 사슬'을 만드는 사업가다. 이익 극대화 전략의 '가치 사슬'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엮어진 '생계의 사슬에서 삶의 가치'를 만드는 장인의 전략이다. 직접 커피 생산지를 다니며 좋은 품종과 함께 커피의 얼굴을 만난 그는 농장 사람들의 삶과 마주친다. 사슬의 한쪽 끝에선 섬세하고 고급스런 취향을 견주며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다른 쪽 끝에선 가난과 절망의 순환이 계속된다.
한 잔에 6000원이 넘는 스페셜티 커피 생두는 국제 도매 카르텔이 정한 가격에 따라 생산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거래 되고, 각자 개별화된 생산자들은 정해진 운명처럼 가격을 받아들인다. 공정을 개선하고 더 좋은 품종을 개발할 수록 삶은 더 빈곤해진다. 그는 '우리 농장'을 선택한다. 다이렉트 트레이드로 정해진 도매 가격보다 두세배 높은 가격으로 사고 더 좋은 커피를 생산하면 삶은 더 나아진다는 당연한 장인의 상식을 그들과 함께 나눈다.
일이 항상 뜻대로 잘 되는 건 아니다. 온 우주가 도와도 될까 모를 일이지만 기후변화 때문에 우주도 도움이 안된다. 하지만 그렇게 오직 추구하는 것이 장인의 정신이고 '평범하고 위대하게' 버티는 것이 장인의 몸이다.
나는 또 한명의 장인으로부터 그 미련한 몸과 우둔한 정신을 배운다.

#7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정치적 감정 : 정의를 위해 왜 사랑이 중요한가', 박용준 옮김, 글항아리 (2019)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
올해 초 나는 매월 정치적 이슈와 의미를 다루는 한 세미나에서 가십성으로 다루어진 법원의 판결 하나를 소개했다. 일명 ‘레깅스 불법 촬영 판결’, 레깅스를 입은 여성을 버스에서 휴대폰으로 몰래 촬영한 남성에 대한 유죄 판결에 관한 것으로서 내가 주목한 것은 몰카를 범죄화한 법이 피해자에게 요구하는 (성적)수치심이라 감정이었다. 항소법원은 피해자에게 성적 수침심이 인정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으나, 대법원은 피해자가 느낀 모멸감과 분노의 감정은 넓은 의미에서 수침심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항소법원의 판결을 뒤집었다.
피해자는 촬영을 인지하고 분노와 불쾌감을 느꼈으며 가해자에게도 그러한 감정을 드러냈다. 문제는 그러한 가해자의 말과 태도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수치심’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된 것이었고 법원은 분노와 불쾌감도 범죄를 구성하는 감정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범죄를 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피해자의 요건에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있다. 그 감정은 특정 피해자의 주관점 감정이 아닌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감정이어야 한다. 몰래 신체를 촬영당한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행위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수치심은 숨김이다. 분노와 불쾌는 드러냄이다. 이 두 속성은 동시에 있을 수 없으며, 숨겨야 하는 감정을 가져야 하는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범죄 때문에 자신을 숨기고 부끄러워해야하는 사회적 지위로 추락한다. 법이 이러한 추락을 규범화 한 것은 이미 그 피해자의 지위를 사회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단지 어떤 행위가 자연스럽게 특정 감정을 유발한다는 단순한 발상이 아니다. 감정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인지적 판단이자 도덕이며, 범죄 피해자의 감정과 행동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법원은 그러한 감정의 규범을 새롭게 해석하고 기존의 수치심의 감정 요건을 해체한 것이다. 이것이 사법부의 역할일 수 있는지는 논외지만...)
누스바움은 감정을 규범의 일부이자 사회 도덕을 안정시키는 버팀목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성은 우리가 복종해야 할 의무를 명령하고 그 최고의 가치를 이해한 인간은 그것을 따르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다는 칸트. 그가 꿈꾼 세계의 모습은 최고의 가치와 그 명령에 복종하는 이성적 인간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하늘의 별이 내 가슴에서 빛을 발하는 인간을 올려다 보지 않는다. 언제 감정으로 요동치고 타인을 혐오하고 위협에 두려워하며 공격에 분노하고 모자람과 결핍에 수치스러워하는 인간을 바라본다. 그는 인간이 가진 감정이 도덕의 이상을 안정시키기도 거꾸로 파괴하기도 하는 연약한 세계 속에서 칸트 이후 롤즈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이성의 왕국의 버팀목으로서 감정의 정치를 파고든다.
감정은 원래 정치의 영역이었다. 심리학의 전유물이 되기 전, 감정은 정치를 위한 수사학의 핵심 주제였으며 공적 리추얼과 정치의 무대에서 필수적으로 다루어졌다. 사실 오늘도 정치인의 말과 행동 그리고 우리가 공적 인물과 제도를 바라보는 주된 공간에는 감정이 자리한다.
문제는 그러한 감정을 단순히 판단을 유혹하거나 왜곡하는 부수적인 것으로 바라보며 감정의 정치적 역할을 너무 안이하게 바라본 것이다. 우리는 동정심과 충성심, 자부심, 분노, 혐오, 슬픔과 수치심의 감정 규범을 매일 일상에서 경험하면서도 국뽕, 감정팔이, 포퓰리즘 등으로 치부한다.
감정을 밀어낸 자유주의의 언어는 인간을 평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존종하고 합의될 수 없는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를 향한 열정을 차갑게 식힌다. 내가 자유주의에 거리를 두고 싶었던 이유도 그랬다. 낙인과 배제 그리고 차별과 복수로 전락하는 현실 속에서 나는 자유주의를 냉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을 다시 정치와 규범의 문제로 던져 준 누스바움은 나를 다시 이성의 이념을 바라보게 한다. 자유주의가 뜨거워 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8 이민열, ‘기본권제한심사의법익형량에대한연구: 논증대화적 해명’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인 형량에 대한 연구: 논증대화적 해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박사학위논문 (2016)
‘기본권 이론’, 로베르트 알렉시 지음 (이준일 옮김), 한길사 (2007)
‘권리의 문법: 도덕적 권리, 인권, 법적 권리’, 김도균저, 박영사 (2008)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거한 기본권 제한에서의 법익균형성 판단이, 정당성이 없는 기계적 판단에 빠지지도 자의적인 직관에 함몰되지도 않도록 하는, 타당한 심사의 구조는 어떤 것인가?”
법대에서 헌법이 암기과목이 되어버린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다른 법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테지만 유난히 헌법이 그랬다. 톱아보자고 덤벼들면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정치와 도덕이라는 거대한 세계로 빨려들어가 버리고, 정작 시험에 나올 헌법재판소 결정들을 이해하는데는 혼란만 커진다. 맘편하게 교과서 그대로 권리 개념을 외우고, 비례원칙-공식에 따라 목적, 수단, 침해, 균형의 순서를 세우고, 그 다음은 사안별로 그냥 외우면 모든 게 쉬워진다. 요령을 부리자면 나름의 유형화를 통해 권리별 패턴을 세우고 패턴 밖 예외들을 중심으로 외우는 방법도 있다. (시험은 보통 패턴 밖에서 나오니까... 그리고 패턴을 벗어난 결정을 두고 그 사실을 언급하며 비판아닌 비판을 하면 분량도 많아진다.)
딜레마는 정교한 듯 길고 복잡한 문장들을 차분한 마음으로 손과 눈을 사용해가며 읽는 미련한 짓을 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문장에서 문장으로 이어지는 열거와 신비한 종합의 변증법 속 글쓴이의 심연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반대의견이라도 있는 경우엔 다수의견이 보여준 심오한 신비가 퇴색되고 마음 속엔 불경한 의심이 밀려든다. 악마의 유혹임을 알아차리고 나는 다시 경건한 암기의 자세로 돌아온다. 나에게 헌법은 그렇게 신성한 암기의 경전이 되어버린다.
사실 헌법의 신비에 불경한 질문을 한 학자들은 많다. 판례에 대한 평가를 넘어 좀 더 근본적으로 신성성에 도전하는 질문들, 권리란 무엇인가, 법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같은 질문들은 현실을 떠나 지적 여행을 할 좋은 소재들이다. 다만 현실로 내려오기엔 부담스러운 단절의 벽이 느껴진다.
이민열 변호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게 된 건 그래서 상당한 충격이었다. 기본권을 제한하는 헌법 37조 2항, 비례의 원칙(과잉금지원칙)에 불경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그의 학위 논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열거와 종합의 신비, 눈을 가리고 사익과 공익을 저울질 하는 그 권위에 대해 타당성과 논증의 잣대를 들이대며 누구나 ‘합당한 거부’를 할 수 있는 상호주관적인 논증 대화를 제안한다.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한동안 고민하다 “모르겠고 일이나 하자”며 공부를 등지고 있던 나에겐, 자유권의 관계로서의 성격에서 시작하는 그의 논증은 나의 주제에 새로운 관점을 던져 주었다. 학위 논문의 심사과정이 순탄치는 않았겠다는 왠지 모를 생각도 들고... 학위 논문을 긴장하며 읽은 것도 처음이고 덕분에 잊었던 욕구와 2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9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비판’

‘윤리형이상학’,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12)
‘윤리형이상학 정초’,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18)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임마누엘 칸트: 생애와 철학 체계’, F. 카울바흐 저, 아카넷 (2019)
칸트에게 자유는 복종이다. 그것도 절대적인 것이기에 자유는 그에게 신앙과도 같았다. 그 복종은 자신의 안과 밖에서 오는 모든 자연스러움에 대한 반항이기에 자유라고 이름했고 그 형식은 자율이 되었다.
칸트가 보기에 우리가 향유하고 의지하는 소극적 자유, 마음대로 고르고 간섭받지 아니하며 가지고 버릴 수 있는 자유는 대부분이 자율로서 반항하고 거부해야 하는 의지의 투쟁 대상이었을 것이다.
칸트는 자유가 ‘명령하는-복종하는’ 인간다움(이성)의 도덕법칙을 구성하는 공장의 핵심 공정에 보편성을 놓았다. 나의 가치와 이에 따른 준칙에 마치 자연법칙으로 승화되는 인간 의지의 공정을 만들어 놓았고, 우리는 이 보편적 윤리로 가는 길을 여전히 정의의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찾아 헤매고 있다.
자유를 알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그 말 속에 개념화된 자유는 무엇일까. 자유는 이성이 믿는 이념을 향한 의지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단지 어떤 수단을 지칭하는 개념일 뿐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자유란 도대체 무엇일까?

#10 쇼샤나 주보프, ‘감시 자본주의 시대’

‘감시 자본주의 시대: 권력의 새로운 개척지에서 벌어지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투장’, 김보영 옮김, 문학사상 (2021)
‘Amazon's antitrust paradox’ Khan, Lina M. Yale lJ 126 (2016)

#11 한병철, ‘리추얼의 종말’

‘리추얼의 종말: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전대호 옮김, 김영사 (2021)

#12 데이비드 흄, 인간본성에 관한 논고 (줄리언바지니 '데이비드 흄')

‘인간이란 무엇인가: 오성 정념 도덕 본성론’, 김성숙 옮김, 동서문화사 (2009)
‘데이비드 흄: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한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 (오수원), 아르테 (2020)

#13 토마스스캔론, ‘관용의 어려움’

‘관용의 어려움’, 이민열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Democracy and the problem of free speech’ Sunstein, Cass. The free press (1993)

#14 프란츠 카프카, ‘소송’

‘프란츠 카프카’, 박병덕 옮김, 현대문학 (2020)
‘소송’, 김재혁 옮김, 열린책들 (2011)

#15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조르조 아겜벤 호모 사케르’, 알렉스 머레이 (김상운 옮김), 엘피 (2018)

#16 The Peaks in 2022

니체
사르트르
푸코
화이트헤드
니클라스 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