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내가 아닌 것으로 말해지는가?
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혼돈의 실재 속에서 힘들게 받아들인 삶의 의미를 부여잡고 싶은 “나”의 슬픈 물음입니다.
소녀인 룰루 밀러가 아버지에게 인생의 의미를 물었을 때, ’혼돈 만이 유일한 지배자이며 혼돈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했을때, 두 팔을 벌린 아버지가 안아주기는 커녕 우주의 시간 속에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그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소녀는 그 상실과 무의미 슬픔을 죽음으로 덮으려고 합니다. 그때 그녀에게 웃음을 주는 곱쓸머리의 남자를 만납니다. 그녀는 죽음 대신 곱쓸머리 남자에게서 안식을 찾고 미래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순간 찾아온 혼돈의 유혹에 매혹된 그녀는 결국 곱쓸머리 남자의 안식처에서 내쫒기 듯 벗어납니다. 그녀는 다시 무의미 속으로 내던져지고 삶의 이면, 즉 죽음의 심연으로 가라앉습니다.
그 심연 속에서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만납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은 데이비드는 소박하지만 원대한 수집가로서 여정을 나아가는 자입니다. 타인의 시선엔 아랑곳없이 세계 자체를 욕망한 그는 세계를 이해하는 언어와 질서에 매혹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계가 주는 혼돈과 시련 역시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죽음 앞에 멈춰선 룰루 밀러를 사로잡은 것은 데이비드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의미가 존재하는 것 처럼’ 스스로를 확신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태도였습니다. 무의미를 이야기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장엄함이 있다’던 아빠의 행복한 얼굴을 떠올립니다. 불친절했던 아버지를 지나 이제 온 삶으로서 (그 기록으로서) 혼돈 속의 질서의 창조를 추구하는 새로운 아빠를 만난 것입니다.
데이비드가 루이 아가시를 만나 수집과 호명의 반복적 행위에 축성을 받고 그것을 신의 질서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룰루 밀러에게는 그리 매력적인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을 버리고 다윈을 받아들였을 때, 그의 삶의 시간을 지워버리는 무질서의 압도되지 않고 물고기에 바늘을 찔러넣었을 때, 여전히 어떤 장엄한 진리를 향해 밀고 나아가는 그 삶은 룰루 밀러에게 삶의 이정표로서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그의 확고한 열정은 오히려 더 큰 시련을 가져다줍니다. 물고기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 밖에 존재하던 그의 행복들을 모두 빼앗아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믿음은 모든 상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애도할 수 있는 근본이 되어 줍니다. 그것은 신을 버린 그에게 흡사 또 다른 신이 되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는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완벽할 것 같았던 데이비드의 삶의 비밀에 다가갈수록 룰루 밀러에게는 새로운 균열이 생깁니다. 데이비드의 새로운 사명은 자연 앞에 하찮은 인간이 마땅히 복종해야할 진리의 발견자가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진리의 발명자로서 질서를 창조해야 하는 사명을 (스스로) 받아들인 자가 되었습니다. 룰루 밀러는 그것을 긍정적인 착각이자 자기 기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강력한 고정관념(물고기)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진리의) 발명자가 되려는 데이비드의 욕망은 그를 우생학이라는 폭력의 질서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그것은 다윈의 진화론의 가장 적극적인 오해였습니다. (어쪄면 ‘진화’라는 정치적 언어가 내포하고 있었던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윈은 자연의 질서를 ‘마치 인간이 알 수있는 것 처럼’ 사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생물에게는 인간의 응시가 알 수없는 복잡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의 자기 기만(오만)을 다윈의 관점을 통해 재해석합니다. 별자리를 헤메던 소년을 데이비드로 만들었던 가장 중요한 근본으로부터의 멀어짐이라고 말입니다. 진리의 이해 불가능성에 대한 오만한 무시와 망각으로 멀어진 그는 더이상 그녀의 이정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끝내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의 가장 근저에 있던 기초 범주의 해체와 마주합니다. 데이비드가 절대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지식의 전제, 세계의 질서를 발명할 수 있었던 근거, “신은 시간이다”라는 그의 로고스적 기원, 그것은 어류의 존재였습니다. 생물 분류의 가지를 수리통계적으로 접근하는 분기학자들은 어류라는 생물 범주의 부재를 증명해 냅니다. 단지 물에 사는 지느러미가 달린 생물이라는 외형적 직관에 의해 당연한 존재가 된 어류는 신체 기관의 계통과 기능의 유사성과 차이의 관점에서 전혀 다른 생물 범주의 애해한 집합이었을 뿐입니다.
룰루 밀러에게 이 체험은 단지 과학적 사유의 엄밀성과 개념의 한계를 깨닫는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물고기가 있음(존재)을 포기하는 순간 일어나는 삶의 (실존적) 변화를 마주합니다.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룰루 밀러가 예이츠의 시구를 통해 소개한 이 말은 마치 ‘존재의 본래성이 비본래성과 떨어진 것이 아닌 비본래성의 변양’이라고 이야기하는 하이데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는 물고기를 포기하면서 얻게 된 해골 열쇠를 이야기 합니다. 세계의 규칙들 (고정관념, 상징계의 질서들)을 부수고 더 거침없는 (위험한)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를 얻었다고 말입니다. 그 열쇠는 언어를 신중히 다루며 회의하는 것(사유하기, 존재 물음)에서 시작해 상상적 환상의 희망이 아닌, 고독과 우울 속에서 마주하는 혼돈스럽지만 풍부하고, 혐오스럽지만 유혹적이며, 고통스럽지만 쾌락을 주는 그런 세계에 우리를 들어서게 해 줄 것이라고 따스한 허벅지를 만지며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