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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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아가시 ≤ 데이비드 스타 조던 > 찰스 다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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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사물/사태를 있는 관찰하며 그 의미를 묻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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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는,
확고한 진리와 윤리(규범)을 이끌어 내는 결단
vs 불완전-불명확함을 인정하고 잠정적 이해와 그 넘어의 가능성을 수용하는 결단
다윈은 자연의 질서를 ‘마치 인간이 알 수있는 것 처럼’ 사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생물에게는 인간의 응시가 알 수 없는 복잡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룰루 밀러는 데이비드의 자기 기만(오만)을 다윈의 관점을 통해 재해석합니다. 별자리를 헤메던 소년을 데이비드로 만들었던 가장 중요한 근본으로부터의 멀어짐이라고 말입니다. 진리의 이해 불가능성에 대한 오만한 무시와 망각으로 멀어진 그는 더이상 그녀의 이정표가 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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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의미를 마주한 룰루 밀러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분투하고 결국 데이비드(물고기)로 상징되는 “의미”를 붕괴시키고 혼돈과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 - 되돌아옴의 여정 (반복과 벗어남의 시작)
룰루 밀러에게 이 체험은 단지 과학적 사유의 엄밀성과 개념의 한계를 깨닫는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는 물고기가 있음(존재)을 포기하는 순간 일어나는 삶의 (실존적) 변화를 마주합니다.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룰루 밀러가 예이츠의 시구를 통해 소개한 이 말은 마치 ‘존재의 본래성이 비본래성과 떨어진 것이 아닌 비본래성의 변양’이라고 이야기하는 하이데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는 물고기를 포기하면서 얻게 된 해골 열쇠를 이야기 합니다. 세계의 규칙들 (고정관념, 상징계의 질서들)을 부수고 더 거침없는 (위험한)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를 얻었다고 말입니다. 그 열쇠는 언어를 신중히 다루며 회의하는 것(사유하기, 존재 물음)에서 시작해 상상적 환상의 희망이 아닌, 고독과 우울 속에서 마주하는 혼돈스럽지만 풍부하고, 혐오스럽지만 유혹적이며, 고통스럽지만 쾌락을 주는 그런 세계에 우리를 들어서게 해 줄 것이라고 따스한 허벅지를 만지며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다 현실적이고 예측가능하며 질서잡힌 세계 ⇒ 환상의 세계
혼란스럽고, 환상적이고, 혐오스럽고 불안하며, 풍부하고, 유혹적인 세계 ⇒ 환상 밖 (다른) 세계
룰루 밀러는 환상의 세계(물고기가 존재하는 세계, 테디베어를 기다리는 세계)를 넘어 환상 밖의 혼돈스럽고 유혹적이며 불안한 세계에 머물고 싶다고 합니다. 그 세계가 룰루에게는 풍요롭고 변화-무상하며 무엇보다 자신에게 자신만의 진정한 쾌락을 주는 삶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예이츠)
룰루가 살아가는 세계는 마치 메트릭스에서 깨어난 리오가 마주하는 그런 실재의 세계가 아닙니다. 룰루는 똑같은 세계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 세계는 이전과는 다른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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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의 세계 : 곱쓸머리 남자를 사랑해야하는 세계, 긍정적이고 명확한 진리가 존재하는 세계, 질서와 규범이 안정과 평화를 약속하는 세계, 성공과 행복이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 모두가 옳고 바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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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버린 세계 : 사랑도 그 사랑의 대상도 정해져있지 않은 세계, 섬뜩하고 불안안 무지와 무의미의 세계, 하나의 질서나 규범이 없고 개별적인 맥락과 의미가 생기고 없어지는 세계, 각자의 삶의 의미만 있을 뿐 보편적인 행복이란 없는 세계, 옮고 그름을 경계를 지우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환대하는 세계
도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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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데려오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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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기의 삶,
그 시작점에서 “마치 ~ 인 듯 사는 삶” 아닌
“마치 ~가 아닌 듯 사는” 그래서 마주한, 던져진 { }을 스스로 써나가는 삶.
변양 (Modifikation)
바울은 고린도서에 소명받은 자의 삶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을 슬픔이 없는 사라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숙고 (überle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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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오늘, 물고기의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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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그리고 나)은 어떤 물고기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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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질서와 규범은 궁극적으로 어디를 /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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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세계 속에서 나는 고유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 삶의 증거는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물고기는 무엇이가’라는 질문에 매몰된 기존 철학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물고기를 “물고기”라고 이름하는 존재자 규정 이전에 그 “물고기” 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본 구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물고기란 결국 특정한 구조가 물고기라는 이름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며, 무수한 이름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름은 고정되고 보편적인 진리의 재현이 아니라, 규정되지 않고 개별 존재자(현존재)에 의해 다르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드러남은 역사 속에서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형태가 되기도 하며 마치 이것이 유일한 진리로 규정되면서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은폐한다고도 했습니다. 결국 하이데거에게 존재란 규정될 수 없는 가장 심층의 무엇인 동시에 그것을 특정 역사 속에서 다르게 드러내는 현존재(인간)의 실존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이데거 M. Heidegger
1889년 1월 니체가 정신을 놓은 그 해, 9월 20세기 사유의 근본이 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태어났다. 그 해 4월엔 또 한 명 20세기 철학의 근본, 비트겐슈타인도 함께 태어났다. 엿새 전 20세기의 근본적인 숙제를 던진 인물 아돌프 히틀러 역시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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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촌놈이었다. 노동, 방언, 최신과는 거리가 먼 고전의 탐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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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사제가 되려고 했으나 존재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훗설을 만나 현상학의 눈으로 철학 전체를 다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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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울하고 고독한 창조자였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와 대결하였고, 궁극에는 니체와의 승부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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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 반공산, 반기술문명… 그는 존재자를 대상으로서 지배하고 수단화하는 모든 집단적 문화에 반대했다.
존재와 시간 (미완의 존재물음)
인간이란 정신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고 주관도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 곧 현존재(Dasein)인 것이다. 그렇게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이기에 인간은 존재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살피는 의식이나 주관이나 정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현존재란 인간의 마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인 것이다.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존재를 왜 물어야 하는가?
“오늘날, 존재를 묻는 방법은 존재를 망각하는 길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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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정의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존재 그 자체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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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사물/사태를 언어로 개념화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 최초의 언어(부름)에 이어 끝없는 언어의 연쇄가 이어진다. 정의란 그것을 다른 언어(속성)로 끊임없이 설명하는 것(설명하지 않는 것)이며 그 속성들 중 차이를 만드는 본질을 찾아내는(상상해 내는) 것이다.
”나는 이강원이다.” →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 “나는 41년을 살았다.” → “나는 남자이고 이성애자로 살았다.” → “나는 변호사자격증이 있고, 회사에서 전략업무를 담당한다.” →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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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없는 언어의 연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있다’ 라고 말한다. 즉 무엇이 존재한다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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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그것이 정의된 것으로 있음 또는 이해된 것으로 있음을 확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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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 자체는 정의 될 수 없고 정의 될 필요 없다.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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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묻는 것은 모순이다. 모든 언어에는 “~있다”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있다”를 정의하기 위한 “~있다”를 묻는 것은 동어반복일 뿐이다. 즉 보편적이고 자명하고 명확한 것이기에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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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남은 문제는 그것의 개념 또는 정의가 그것이 있음과 같은 것인가를 증명하는 문제 = 즉 진리(값) 문제가 중요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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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진리를 묻는 행위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문제는 최초에 사물/사태를 이름붙이는 그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가. 그 이름 붙임의 구조와 그 이면엔 무엇이 있는가?를 물을 수 있다.
2.
존재물음은 어떻게 사유될 수 있는가?
에드문트 후설 (Edmund Husserl) *하이데거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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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보편적 이성을 가진 “나”(인간)이라는 존재(자)가 사태를 대상으로서 이해하고 파악하는 형식으로 접근하는 과학적 존재물음은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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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사유하는(이성을 가진) 나 = Cogito를 마치 대상처럼 눈 앞에 놓고 관찰하는 형식의 존재물음은 특이하고 기이한 방식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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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나가 인식한 존재(자)가 실재한다는 생각은 인간이 사태/사물과의 연관을 통해 구성해 내는 의식이라는 일종의 주관(상호주관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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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넘어서는 것은 “무”다 (이후 사르트르는 “의식이 무다” 라는 관점에서 “존재와 무”를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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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사유하는 나를 가정하고 그 나로 부터 파악된 것을 실재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 개별 의식이 사태/사물(대상)과 관계하는 방식, 이를 통해 구성해 낸 다양한 양상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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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적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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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그 자체로 주어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사물/사태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 것 (의식의 지향성)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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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물/사태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불가능)이 아니라 진정한 물음은 사물/사태로 부터 지향적인 의식이 어떻게 현상을 구성하는지를 묻는 것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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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학적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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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현상학적 관점을 통해 구성되는 대상-의식을 해석을 통해 분석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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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이란 “나”의 관점에서 표현된 의미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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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주어진 관점을 토대로 대상을 규정하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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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관점을 거부하고 새롭게 대상을 규정하는 이름을 붙이는 일종의 적극적 실천이 될 수 도 있다.
3. 존재를 현상학적 해석학으로 접근하면 어떻게 탐구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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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흔히 보여지는 “나”(우리)의 삶의 현상을 분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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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 - 우리의 일상적인 - 가장 흔한 삶을 살고있는 자아(자기의식)는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
⇒ 일상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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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변의 사물을 도구로서 이해한다. = 도구 연관으로서의 배려 (Besorge)
일상의 주위 세계를 둘러보며 곁에 있는 도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둘러보는 행위'가 몰입해있는 지시관계나 그들의 전체적인 연관이 주관에 의해 파악되지 않을 것 즉, 손상되거나 없어지거나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 도구적 존재자가 그 눈에 띄지 않는 존재 양상에서 비어져 나오지 않게 하려면, 세계를 슬쩍 들여다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눈에 띄지 않음에서 이 존재자의 자체 존재의 현상적 구조가 구성된다.
마르셀 뒤샹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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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도구로 이해하는 일상의 구조에 그 사물을 이용하는 타인(들)의 이해가 있다.
= 타인에 대한 심려 (Fürso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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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저 물건을 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목적이 내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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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이해 역시 이미 존재자의 타인-인식 이전에 규범과 질서, 법체계 안에서 타인의 대한 이해가 먼저 있다.
갑자기 영화-헤어질 결심에서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라며 해준의 “사랑“의 말을 멈추게한 서래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의 “사랑“은 나에게 어떤 연관일까요? 정기적으로 관계를 하며 ‘건강한’ 결혼 생활을 하던 해준과 정안의 널리 이해된 “사랑“의 말은 해준이 몰입해있는 잡담의 일상어였습니다. 그러나 서래의 서툰 “말” (문법을 빗나가는 말)이 해준의 “잡담“을 멈추게 하고 붕괴시키는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서래의 “말”은 해준의 “말”과 대결하고 잡담으로 말해진 “해준의 말“은 서래의 “비문과 침묵“을 이방인이자 범죄자의 이해 속으로 숨겨버립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나누는 이해가능한 말들과 자명한 것들 그리고 그것이 주는 안정과 확실은 오히려 나와 말 사이의 연관된 뿌리를 없애고 “말 밖에 있는 나“를 숨깁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마주한 낯선 이방인의 말-안됨과 침묵이 잡담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 그것은 나를 섬뜩함과 불안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4. 일상에 “빠져있는” 자아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있는 세계의 도구연관(배려)와 타인의 규범과 언어세계 속에 던져지고, 그 세계가 이름하는 자신을 자아로서 받아들입니다. ⇒ “그들”로서의 나 (das-Man, 세인)
그들-세계에 빠져있는 자아의 속성 (잡담, 호기심, 애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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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빈말)
말은 대개 밖으로 말해지며 이미 언제나 밖으로 말해져왔다. 말은 언어이다. 그런대 이 경우 밖으로 말해진 것 안에는 각기 이미 이해와 해석이 들어있다. 밖으로 말해져 있음으로서의 언어는 자신 안에 일종의 현존재 이해가 해석되어 있음을 간직하고 있다.
…. 밖으로 말해지는 말은 함께 나눔이다. 함께 나눔의 존재경향은 듣는 사람이 말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그것을 향한 열어밝혀진 존재에 함께 참가할 것을 겨냥하고 있다.
함께 나눔은 이야기되고 있는 존재자에 대한 일차적인 존재 연관을 “나누지” 않고, 서로 함께 있음이 이야기 된 것을 서로 함께 이야기 하며 배려하는 가운데에서 움직이고 있다. 여기의 서로 함께 있음에 중요한 것은 이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말함이 이야기되고 있는 존재자에 대한 일차적인 존재연관을 잃어버렸거나 획득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말함은 그 존재자를 근원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식으로 함께 나누지 못하고 그저 퍼트려 말하고 뒤따라 말하는 방법으로 나눌 뿐이다.
‘사실이 그렇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런 완전한 무지반… 뒤따라 말함과 퍼뜨려 말함이 잡담을 구성한다. … (제35절, p.231 이기상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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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목적은 소통이 아니라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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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여자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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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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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지 우리 아기,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인사 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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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오며) 목이 마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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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결혼했어요. /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독자의 평균적인 이해는 무엇이 근원적으로 길어내어져 획득된 것이고 무엇이 뒤따라 말해진 것인지를 결코 결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더더구나 평균적인 이해는 그런 구별을 전혀 원하지도 않을 것이고 필요로 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평균적인 이해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
잡담은 그것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의 지반으로 소급해가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못하게 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일종의 닫아버림이다…. 이야기 되고 있는 것에 대한 이해에 도달했다고 믿는 잡담은 이 믿음에 근거해서 모든 새로운 물음과 대결을 억제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억누르고 지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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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재는 우선 이러한 일상적 해석되어 있음 속에서 성장하는데 결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진정한 이해, 해석, 함께 나눔, 재발견, 새로운 취득은 이러한 일상적 해석되어 있음 안에서 또 거기에서부터 그리고 그것에 대항해서 수행된다…. 공공적 해석되어 있음의 지배는 심지어 기분에 잡혀 있는 가능성까지를 이미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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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처해있음을 앞서 윤곽지어,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볼지’를 규정한다.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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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호기심이란 우리가 일상 에서 “둘러보는”(보지않는) 독특한 행위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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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Sicht은 인간의 의식에서 우월적인 위상에 있다. 시야라는 말 속에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지평으로서의 의미가 담겨 있다.
존재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모은 논문집의 첫번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 모든 인간은 본성상 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존재에는 본질적으로 보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다. (제36절,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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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간은 왜 그렇게 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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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간은 무언가를 보고 싶은 것일까?
세계-내-존재는 우선 신경을 쏟는 세계에 몰두해 있다. … 배려는 실행을 중단하고 쉰다는 의미에서나 또는 일을 마쳐서 쉬게 될 수 있다. … 둘러봄이 자유로워져 더 이상 작업세계에 얽매이지 않는다. 쉴 때 염려는 자유롭게 된 둘러봄으로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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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된 호기심은 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존재에 이르기 위하여 보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새로운 것을 찾는 이유는 그 새것에서 다시금 새로운 새것으로 뛰어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봄의 염려에서 중요한 것은 파악하여 알면서 진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세계에 맡겨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호기심은 또한 고찰하며 머무는 여가도 추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것과 만나는 것을 계속 바꿈으로써 생기는 동요와 흥분을 찾는다. 호기심은 아무데도 머무르지 않음으로 해서 부단히 산만함의 가능성을 배려한다. …
호기심을 구성하는 두 계기, 즉 배련된 주위세계에 머물지 않음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산만함…우리는 그것을 무정주성이라고 이름한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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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진리를 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본다.
우리는 시선에 의해서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사로잡혀 보아야 할 것을 보는 것일 수 있다.
가령, 나는 아름다움을 본다. 그 아름다움은 이미 보도록 유혹되고 강제된 것, “그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그들”의 세계는 이미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가지고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그 아름다움의 이미지 아래 보여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 보여짐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나 das-Man”으로서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다.
신디 셔먼이라는 사진작가는 미디어 속에서 보여지는 여성의 모습을 스스로 재현하면서, 여성이 “그들”에게 보여지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여짐에 노출시키고 있으며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시선 역시 “그들”의 보여짐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음을 이야기한다. 즉 “보는 나”는 “보여지는 나”일 뿐이며 진정 “보는 나”는 은폐되고 있는 것이다.
신디셔먼 (1934~)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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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둘러보는 나’의 호기심은 진정 ‘보는 나’를 숨기는 “그들”의 봄일 뿐이며 세계에 맡겨지기 위해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전형적인 “그들”세계 속에 빠져있음의 양태라고 설명한다.
정신분석가 자끄 라깡은 인간은 어머니의 응시에 대한 쾌락(시관충동)을 억압하는 방어로서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본다고 분석한다. 즉 인간의 시각은 대상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는 것(이미지)을 봄으로서 실재를 보는 불안(응시)을 방어하기 위한 가림(베일)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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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함 (욕망의 미끄러짐)
공공적인 해석되어 있음의 애매함은 앞질러 얘기하는 것과 호기심으로 예감하는 것을 본래적인 사건인 것처럼 내놓고 실행과 행위는 추후의 일이며 하찮은 것으로 낙인찍어버린다. 그러기에 ‘그들’ 속에 머물러 있는 현존재의 이해는 자신의 기획투사에서 끊임없이 진정한 존재가능성을 잘못 보고 있다. 현존재는 언제나 애매하게 “거기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함께 있음의 공공의 열어밝혀져 있음 안에, 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이 “사업”을 관장하고 있는 곳에, 일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곳인 거기에 존재한다. ….이러한 애매함이 호기심에게는 언제나 그것이 찾는 것을 건네주고, 잡담에게는 마치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한 가상을 마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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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우선 사람들이 그에 관해서 들은 것,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말하고 알고 있는 그것을 근거로 “거기에” 존재한다. 잡담은 우선 근원적인 서로 함께 있음 사이로 끼어든다. 누구나 먼저 우선 타인의 눈치를 살펴서,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것에 대하여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본다. ‘그들’ 속에 서로 함께 있음은 절대로 폐쇄되어 무관심하게 옆에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고, 긴장 속에 애매하게 서로를 살피며, 몰래 서로 엿들으며 있는 것이다. 서로를 위한다는 가면 아래 서로를 적대하는 연출을 진행하고 있다. (제37절, p.239)
일상에서 현존재는 “그들”-세계에 빠져있다.
일상의 현존재는 그들-세계에 빠져있습니다. 오늘날 그들-세계는 경영-세계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자본의 확장을 위해 무한의 소비-시장 창출과 무한의 효율-생산, 소위 혁신의 욕망에 이끌려 세계를 바라봅니다. “나”는 끊임없는 ‘최신’과 ‘새로움’을 따라가며 끊임없는 자기 관리를 통해 생산성과 학습 역량을 개발합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채찍질 하며 가치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죄악을 금기시 합니다. “나”는 학습할 준비와 생산할 준비, 소비할 능력을 위해 몸과 마음을 관리합니다.
“나”는 자신 뿐 아니라 그런 관리의 능력을 확장하여 ‘리더’로서 경영-세계를 재현하는 대표이자 대리인으로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5. 일상의 빠져있음을 뒤흔드는 불안 (Angst)
현존재는 일상의 빠져있음 즉 잡담-호기심-애매성 속에서 “그들”에 속해있이 주는 확신(소외의 쾌락)과 끊임 없는 욕망의 굴레 속에 갇혀 있다. 그러나 일상 속에 반드시 찾아오는 “불안”이라는 기분은 빠져있는 현존재를 끊임없이 흔들어 깨운다.
삶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무의미, 허무의 감각과 나를 마주세운다. 그러나 나는 매번 무의미의 우울감을 스트레스성 번아웃, 호르몬, 관계의 이슈 등을 치부하면 힐링하고 회복하는 삶을 반복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실재의 자각 속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나를 잡아 흔든다.
현존재가 자신의 죽음에 내맡겨져 있다는 사실과 이에 따라 죽음이 세계-내-존재에 속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선 대부분의 경우에는 어떠한 명확하거나 이론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내던져 있다는 사실은 현존재에게 불안이란 정태성 안에서 보다 근원적이고 보다 철저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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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들에 의해 능가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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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유능한 판사, 성실하고 예의바르고 겸손하고 사회성이 좋은 인기있는 모범적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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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어기거나 아부하거나 선을 넘는 행동을 자제하고 작은 잘못에도 죄책감을 가지고 양심에 따라 사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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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귀한 아내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았고, 권태기가 있었으나 사회적 신분상승과 여유로운 경제력을 극복, 새로운 환경과 관계를 통해 활기를 되찾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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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정리하다 옆구리를 다치고 그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죽음을 앞두게 됨. 죽음의 위기 속에서 세상이 가르쳐준 해법을 실천해 보지만 전문가인 의사도 가족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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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반 일리치는 가족들로부터도 소외되고 스스로에게 있던 자부심 마져도 붕괴되는 경험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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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한 번도 자신이 알고 있는 죽음이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나의 죽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섬뜩함을 느낀다.
분명이 모든 인간은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인간 모두가 죽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 이반 일리치는 일반적인 인간의 하나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실체다. 나는 나 자신만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 그리고 장난감과 유모, 수많은 기쁨과 슬픔, 유아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과 같은 나 자신만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나만의 감정과 사고를 갖는 내가 죽는다는 것은 인간 일반이 죽는 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내가 내 차례가 되어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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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돌봐주는 집사 게라심만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위로를 준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을 위해 고생 좀 하는 것이 전혀 힘들거나 괴롭지 않으며 그 또한 언제가 죽을 때가 되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수고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심정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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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일리치는 괴로움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에 “이제까지 내가 살아 왔듯이 그렇게 편안하고 유쾌하게 살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 목소리는 “편안하고 유쾌하게 살았을 때는 어떤 식으로 살았는가?”라고 다시 묻는다. 이반 일리치는 상상 속에서 자신이 과거의 행복한 순간을 떠올려보지만 어린 시절의 먼 기억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혐오스럽게만 느껴진다.
나의 결혼… 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지, 그것은 환멸이었어. 내 아내의 숨결, 관능, 위선! 그리고 이 생명력 없는 공무, 돈벌이를 위한 노동, 그렇게 1년, 2년, 10년, 20년이 항상 똑같이 흘러갔지. 공직에 몸담은 횟수가 늘어 가면 갈수록 그것은 더욱더 죽어가는 일이 되었지. 지금까지 내내 나는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산을 오르는 것으로 보였겠지. 그러나 내 삶은 사실은 항상 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 그리고 이제 벌써… 죽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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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는 결국 자신의 삶 전체가 모두 허위이고 욕망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을 (어쩌면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들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며 용서를 빈다. <용서해줘—> 가게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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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받아들인 이반 일리치는 죽음은 끝났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4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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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죽음 이후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은 “나의 죽음은 아니야”라고 위로하며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떨쳐버린다. 정해지고 익숙한 죽음의 의례는 또하나의 죽음을 경험한 이들에게 그냥 지나가는 것이며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평온하고 유쾌한 일상이 방해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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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장례라는 우연한 사건이 법원의 순조로운 업무를 깰 만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일도 바로 이 밤에 저 일꾼의 네 개의 새 초에 불을 붙이고 있는 동안 카드 한 패를 섞어서 놀이를 시작하려는 우리를 방해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우연한 사건이 우리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이 저녁에 즐겁게 놀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숙고 (überle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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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알고 있는가? 내가 죽는 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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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어떻게 나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양 (Modefikation) 시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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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죽음이 아니라면 무엇을 향해 올라(내려)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