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30 2023
지난 여정 속에서 우리가 발견한 리더의 의미(반의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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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특별한 사람의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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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개발 가능한)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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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 관한 지식이다.
→ 리더의 자리에 관한 지식들인 동시에 우리를 “리더”라는 세상-자리에 가두는 언어의 집합들이다.
가령 리더십에 대한 하나의 이론적 논의를 생각해 봅시다.
리더의 개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욕망
이철, et al. "변혁적 리더십과 거래적 리더십이 직무열의에 미치는 영향: 심리적 자본의 매개효과를 중심으로." 한국심리학회지: 산업 및 조직 25.1 (2012): 147-169.
리더십 이론에서 리더십을 두 가지의 형태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B.M. Bass) 거래적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으로 말입니다. 전자는 목표와 보상이라는 거래 관계를 중심으로 조직 구성원의 이기적 욕망 추동하는 반면 후자는 영감과 동기를 부여하는 목표 설정, 지적 자극과 개인의 성장에 대한 고려 등으로 구성원을 일종의 가족 환상으로 초대합니다.
“리더”라는 문명의 자리이자 그것을 관계로서 설명하고자 하는 담론에 대해 우리는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지요.
리더는 왜 다 남자일까? (또는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일까)
리더는 팔루스(상징적 남근)의 다른 이름
리더는 조직에 꼭대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체계의 상징이며 보편성이기에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오늘날의 “좋음-탁월함”은 리더의 속성으로 수렴됩니다. 그것은 이해관계를 잘 이용하는 영리한 인간에서부터 강한 신념과 추진력으로 매력을 발산하며 욕망을 선물하는 인간, 자상한 어머와 같은 이미지로 보다 더 근원적인 욕망을 상기시키는 인간까지 다양한 리더의 이미지 유형이 제안되고 있지요.
그런 다양한 리더의 유형들 안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리더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성과를 만드는 리더이지요. 그것이 구성원이 바라는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거래처럼 이끌어지든,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통해 구성원의 욕망을 자극하고 믿음을 주는 방식으로 이끌어지든 그것은 결국 하나의 성과를 향해 모두를 이끄는 목자와 같은 이미지이지요.
우리는 나르시시즘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장치를 통해 주인-노예(부모-자식)의 인간 문명의 근본관계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문명이 창조해 낸 주인의 모습, 그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구체화되고 남성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의 규범의 강력한 일상-신앙을 구축했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개념이 바로 주인 즉 리더이며 가장 대표적인 리더의 형상으로서 절대자인 신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종교의 신이 항상 남성이라는 점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종교에서의 창조주는 거의 항상 남성이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러한 창조주-신이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이 내리는 결론은, 그는 실제로 작은 어린아이에게 이전에 나타난 바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세계의 창조를 자기 자신의 생성과 똑같이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서적 위안을 보장해 주는 엄격한 윤리적 요구들이 천지 창조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쉽게 설명됩니다. 아이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빚지고 있는 똑같은 사람인 아버지는 약하고 무력하며 외부세계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위험에 내맡겨진 아이를 보호하고 지키며, 그의 보호 아래서 아이는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된 뒤에 인간은 자신이 더 큰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삶의 위험에 대한 그의 통찰은 더욱 커져서,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근본적으로는 아직도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무력하고 보호받지 않은 상태이며 세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어린아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예전에 그가 아이로서 누려 왔던 보호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아버지가 매우 제한된 힘을 가진 존재이며, 소망스러운 모든 자질을 다 갖춘 존재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어린 시절에 그토록 자신에게 대단하게 보였던 기억 속의 아버지상을 붙잡고는 그것을 신의 존재로 높이고 현재와 현실 속으로 가져옵니다. 이러한 기억 심상의 정서적 강도와 보호 욕구의 지속은 신에 대한 그의 믿음을 지속시켜주는 지주 중 한 가지 입니다.
- S. 프로이트, 새로운 정신분석강의, 35번째 강의, ‘세계관에 대하여’ -
신이 보증한 리더와 자본주의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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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전통적으로 초월적 권위로부터 위임받은 자 (기름부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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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받은 권위는 정당성의 지속과 권력 이양의 문제 앞에서 언제나 감시(응시) 아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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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식량 등 자원의 생산, 자연재해, 혼인… 등의 위기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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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리더는 정당성의 인증을 성과를 통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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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는 곧 자격이자 역량의 검증 기준 (대체로 이미지화되어 관리되는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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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수많은 이슈를 포함해 시장의 위기까지 리스크 관리와 혁신(시장의 창출)이라는 이름으로 관리된다.
리더는 주인이기 보다 자본-초자아의 노동자
우리는 “리더의 가면”이라는 주제를 통해 리더의 초자아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지요. 초자아는 프로이드의 개념으로 자아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개념이지요. 지난 세미나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는 과정에서 쾌락을 포기하고 그것의 보상으로서 주어진 “아버지의 이름”-“팔루스”의 욕망을 이상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임을 이야기 했습니다.
자아-이상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자아를 끊임없이 억압하는 동시에 규범화된 욕망을 추구하도록 추동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초자아가 단지 억압의 역할을 무서운 아버지의 이미지만 갖는 것이 아니지요.
오히려 자본주의의 담화구조 속에서 초자아의 ‘억압하는 아버지’ 이미지는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사랑의 대상이고 끝없는 욕망의 대상이지요. 오히려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권위와 억압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무의식의 아버지의 이미지는 현실의 아버지의 나약함을 초월한 사랑의 대상임을 후기의 프로이트도 지적했습니다. 사랑의 하느님의 원형으로서 말이지요.
자본주의는 그런 측면에서 종교의 신앙적 아버지의 이미지를 차용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좋은 것이며 행복을 약속합니다. 더 나아가 그 행복을 실현시켜주지요.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대신 끊임없는 생산과 새로움의 이미지로 그 결핍과 불만을 해소해 줍니다.
우리는 자본-초자아에 대한 사랑하기를 멈추기 어렵습니다.
여자는 없다. (남자와 남자의 여자가 있을 뿐)
앞에서 초자아는 이상적인 아버지이며 그것은 팔루스의 쾌락을 약속하는 남자임을 이야기했습니다.
즉 리더는 남자입니다.
여성 리더가 분명히 있지요. 남자의 자리였던 자리에 오르고 남성성의 속성이 아닌 여성성의 특징을 보여주며 부드럽고, 민주적이며, 포용적이고, 지속적이며, 희생적이고….. (계속 그 특징들을 나열해 보면 여성성의 모습에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남성성의 반대가 여성인가? 그것은 남성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변개념을 다시 중심으로, 새로운 남성성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은 아닌가?
La Femme n’existe pas
(보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라는 보편 기표에 상관항으로서 존재할 뿐 지금 여기 이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는 전체성과 보편성이 저항하면서 하나하나의 개별성과 단독성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여자는 상징적 질서와 담론의 논리 안에 있는 동시에 바깥에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여자라고 말하면서 그녀를 모욕한다.
On la dit-femme, on la diffame - J. Lacan, seminar XX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 그것이 한번도 진리로서 기표화 되지 않았던 것을 마치 있는 것으로 실체로서 규정하려는 여자-존재자는 진리를 거세하는 진리(여자)에 대한 모욕이다.
수많은 여성 은유를 생각해보라. 모성, 슈퍼맘, 걸크러시… 맞지 않는 옷에 저항하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양상의 말과 행위를 두고 우리는 어떤 이름을 붙이며 이해(거세)하려고 하는가?
여자의 이해 안됨을 묘사하는 은유의 가장 대표적인 기표는 ‘히스테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자궁을 의미하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요. 팔루스의 가부장 문명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정의할 수 없었던 여성들을 가르키는 기표였지요. 그 기표에 의미는 아시다시피 모든 부정적 은유를 모아 놓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남성적 성행위 (섹스)의 수동적 대상으로서 이해되거나 결국 마녀, 악의 상징으로 의미화 되기도 했습니다.
Gian Lorenzo Bernini, Ecstacy of St. Teresa. 1647~52 Santa Maria della Vittoria, Rome
정신분석은 히스테리를 강박증에 대비되는 신경증의 개념으로 바라보지만, 프로이트와 라깡에게 히스테리는 특별한 (비)의미를 갖습니다.
히스테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 밖에 것을 욕망하는 위험한 증상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이름 즉 가부장 문명의 경계에 구멍을 내고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는 진리의 증상이기도 한 것이지요.
정신분석 특히 라깡의 정신분석 개념에서 여자는 성관계 밖에 존재합니다. 남성-여성이라는 상상적 성관계의 실체를 거부하고 실재로서의 여자는 언제나 그 사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이’인 이유는 성관계가 규정한 이름으로 부터 언제나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영진,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고 2019 참고”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남성의 시선으로 구축된 여성성의 네가지 형상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녀, 유혹녀, 애인, 성년인데요. 이 항들을 언제나 하나로서 존재하기 보다는 두가지 형상이 쌍을 이루어 작동하지요. 이상적인 아내로서 집안일과 자녀를 돌보는 가정 주부인 동시에 밤엔 남편에게 성적 매력을 선물해야 하는 의무를 갖지요. (프로이트의 강박적 남성의 여성상인 어머니와 창녀의 개념과도 연결되지요) 하녀와 유혹녀를 오가는 여성의 성적 매력은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도 향할 수 있고 남편의 어머니 강박에 의해 사랑받지 못하는 여성의 애정은 유혹녀와 타인의 애인 사이를 오가게 되지요. 문명의 억압 속에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 없는 여성의 욕망은 결국 현실이 아닌 초월자를 향하고 그 사랑은 성녀의 사랑이 되지요. 베르니의 테레사의 쾌락과 같이 말이지요. 그러나 또한 성녀의 이미지는 다시 어머니의 이미지, 즉 포용과 희생의 은유를 받아들여 하녀로 향하게 됩니다. 결국 여성의 이미지는 남성성의 원환을 멤돌며 자리 잡지 못하고 언제나 그 사이를 향하게 됩니다.
안티고네의 주장
이렇게 남성적 문명(아버지의 이름) 아래서 자리잡지 못하는 여성의 욕망은 결국 제3의 바깥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라깡과 바디우 모두 여성의 욕망을 진리를 향한 욕망으로 규정합니다.
우리는 안티고네의 죽음을 향한 욕망 속에서 진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Antigone NT (28:30’ ~ 35:10’)
안티고네의 주장은 크레온의 권위의 정당성과 합법성 앞에서 한낱 무의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무의미가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목격할 수 있습니다.
안티고네는 신의 법, 혈족의 도리, 인간의 도리, 유일무이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일관성, 정당성, 공동체의 정의… 그 어떤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공하지 못하지요. 단 한 여인의 이해할 수 없는 히스테리 감정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에 반해 크레온의 법은 공동체의 안정과 정의를 위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레온의 왕위의 정당성에서 부터 폴리네이케스의 반국가적 행위, 예외상태에서의 지도자의 역할과 결단, 공동체의 결속과 지속, 법의 권위… 부정할 수 없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Antigone NT (39:30’ ~ 50:10’)
아들 하이몬과 크레온의 대화 속에서 크레온의 정교하던 논리의 배후에 은폐된 실재가 무엇인지 우리는 마주하게 됩니다. 논리적이고 정교하던 크레온의 논리는 아들의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발화 앞에서 흔들립니다. 확실한 근거로서 인정될 것 같았던 권력의 정당성과 국가의 권위가 한 사람의 두려움에 기대어 마치 카드로 만든 성처럼 위태롭고 허술하게 지탱하고 있음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지요.
Antigone NT (63:05’ ~ 75:00’)
예언자 테레시아스의 등장은 그의 욕망을 스스로 마주하게 해주지요. 크레온에게 테레시아스는 초자아의 목소리가 된 것 일 수도 있겠지요. 테레시아스는 안티고네의 욕망에 해석을 제공하는 것인지도 모르고요.
결국 안티고네의 이해할 수없는 욕망은 크레온의 법의 진실을 드러내고 크레온의 법이 지탱하는 테베 왕국을 몰락으로 이끕니다.
여자를 발명하는 실천
안티고네의 욕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테베의 시민들을 매혹하고 그녀를 동정하게 합니다. 매혹에 빠진 테베 시민들 속에서 정교하고 논리정연한 크레온의 논리는 결국 그 진실들 드러내게 되지요.
라깡은 안티고네의 욕망을 섬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다가가는 섬광이자 비진리 (팔루스의 문명)를 몰락시키는 섬광인 것이지요.
철학자 바디우는 이 섬광의 순간을 사건이라 명명합니다. 기존의 권력 체계와 상식의 굴레에 균열을 내는 사건 그것을 바디우는 진리의 순간이자 여자가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리더는 여자다.
우리는 지금까지 리더는 아버지의 이름이자 가장 강력한 남자의 상징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리더라는 기표 자체를 두고 모든 의미를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리더는 기존의 문명과 조직 규범을 지키고 이끄는 상징인 동시에 기존 체계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는 사건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즉 여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파타고니아의 창업자 이본 취나드를 생각해 봅니다.
“You go surfing when there’s surf, you go powder skiing when there’s powder. We wanted to have a job where we would be allowed to do that. And we wanted to go work with friends – we didn’t want to work with MBAs.
“We wanted to break the rules of business.”
그는 견고한 비즈니스 체계, 재무재표라는 핵심 기표를 중심으로 견고하게 짜여진 금융자본주의 논리에 균열을 내는 사건을 만듭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가 만든 사건들은 결국 금융의 재무 논리의 새로운 층위를 더합니다. 기업이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미치는 영향이 지표화되고 그것이 금융의 또 다른 가치로 탄생한 것입니다.
물론 ESG라는 새로운 자본주의 논리는 그의 사건을 해석하고 이해가능한 (투자 가능한 지표) 것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말이죠. 하지만 그의 사건은 그 순간 만은 진리였고 그는 균열을 내는 여자로서의 리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