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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 2022

Books 2021

퇴락을 막는 건 언어다. 둘러봄과 몸에 세겨진 관성은 매순간을 망각의 시간으로 이끈다. 읽는 눈은 존재물음의 내면을 응시하고 몸의 관성을 넘어 몸의 절제와 지속의 쾌락을 다시 세긴다. 존재자는 언어를 통해 존재의 기억을 찾는다.

#1 김상봉,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2003) 한길사

Feb. 2022
생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는 의지 속에서 발현한다. 즉 피상적 현상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진리를 움켜쥐려한다.
홀로 스스로 시작도 끝도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것이 완전하며 진리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
철학자 김상봉을 통해 나는 비로소 칸트를 다루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볼 수 있었다. 칸트가 남겨준 소중한 지평 위에 나 그리고 나 밖에 것과의 통합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긴장이 있다.
그 긴장이 눈 앞의 존재자를 흔들며 나를 세계로 열어준다. 존재자는 이제 내가 펼친 시간과 함께 다가오는 것이며,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진리 이면에 타자의 얼굴에 복종하는 자유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서로 기대어 유한하며 만져지고 느껴지는 그래서 불완전하며 통제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나.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우리는 얼마나 홀로 있는가.

#2 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 자크 데리다, 거짓말의 역사 (2019)

Mar. 2022
자크 데리다, 거짓말의 역사 (2019)
거짓말에게 죄가 있을까?
거짓말의 무죄를 고민하던 새벽, 데리다의 언어를 지나며 무죄의 확신이 아침처럼 떠올랐다. 거짓말이 죄라면 그것은 모든 인간 이전의 원죄이거나, 인간의 죄를 되집어 쓴 어린 양일 것이다. (결국 둘 다 거짓말이라면 그 죄는 어디를 향할까... )
체호프의 바냐 삼촌의 대사가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영화. 바냐에게 존경하던 매형도 사랑하는 엘리나도 심지어 가족들 조차 거짓된 허구처럼 보여서일까. 영화 속 가후쿠는 바냐라는 허구를 받아내지 못한다. 아내인 오토는 바냐의 대사처럼 완전히 거짓일까? 가후쿠는 존재적으로 가까운 그러나 그래서 완전한 타인 오토를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두렵다. 존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거짓의 죄는 타인의 존재론에서 진리가 된다. 거짓의 무죄를 드러내 준 건 운전기사 미사키의 “모순도 거짓도 없어요"의 삶의 증언이다. 타인의 거짓은 나의 존재론 속에서만 드러날 뿐 타인의 세계에선 오직 그것이 진실이다. 상처받지 않으려 아내를 마주하지 못했기에 아내는 타인이 아닌 기억으로 남아 그렇게 살아간다.
거짓은 무죄다.
허구를 통해 자기 속에 타인을 진실로 가두고 싶은 나르시즘의 내가 유죄다. 그 죄를 거짓에게 선고하며 고통을 피하고 싶은 삶, 그러나 오판의 고통이 존재의 시간을 끝까지 짓누르는 삶... 언젠가 쉬게 될 날을 기다리며 그렇게 살아간다.

#3 진태원,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2022) / 리사 펠드먼 배럿,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2017)

Mar. 2022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정서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된다고 파악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자체이다. -에티카, 3부, 정서의 정의-
스피노자를 마주치는 것은 진화의 비밀을 발견한 고생물학자의 기쁨같은 일이다. 사람의 마음과 사유의 비밀을 찾아 정신의 대지 아래를 파헤치는 이는 언제나 거대한 돌뿌리 앞에서 주저 앉는다. 3년전 뇌신경의 동적 구조와 개념의 형성 이론을 가지고 감정을 바라본 심리학자의 책이 준 기쁨과 좌절이 그랬다. 인간의 의식이 자리한 뇌가 밖에서 오는 실재의 작용을 반영하고 이해하는 수동적 기능이 아니라 내부의 기억 즉 상상을 통해 세계의 이야기를 만들고 변형하는 능동적 실재라는 “과학적" 해석의 신선함은 나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 하이데거가 던진 존재물음을 받아낼 수 있는 기억과 이해의 틀이 되어 주었다. 나를 주저앉힌 돌뿌리는 감정이다. 그것은 몸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며 정신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다.
기분, 감정, 정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말들엔 몸과 정신을 분리하기 위해서 또 정반대로 이 둘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해서 사용되는 묘한 긴장이 있다. 스피노자는 이 긴장을 그대로 담아 능숙한 연주자처럼 완벽한 화음과 불협의 화음을 오가며 상상한다. 몸이 받아들이며 스스로 변화하는 외부와의 조우를 내면이 필연적으로 또는 우연적으로 상상하는 정신과 함께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둘은 마치 평행하는 선처럼 서로 만나지 않는다. 단지 몸이 변화하는 감각의 형식과 정신이 상상하는 관념의 원인과 결과가 같이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는 신이라는 절대적인 무한성을 통해 이 둘의 함께 있음을 상상한다. 욕망과 기쁨 그리고 슬픔이라는 근본 정서를 시작으로 완전성과 불완전성, 능동과 수동의 변주가 다양한 감정의 양태를 만들고 완전성과 능동성을 향한 윤리학과 정치학으로까지 나아가는 이야기는 땅 속의 어둠 아래 주저 앉은 정신에게 희미한 빛처럼 기쁨이 된다. 이 빛 아래 다시 우리는 몸의 변형과 정신이 상상하는 세계 속에서 다시 끊임없이 모방하고 상상하고 지배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증오하고 사랑하고 파괴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실행할 에너지, 욕망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