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1 2023
조직의 목적을 대표(대리)하는 상징적 (명령적) 존재 자리로서의 리더, 그리고 상실을 메울 인정을 바라며 이상적 자아상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를 확장해가는 나르시시즘의 상상 속 리더.
이 둘은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이 둘은 어떤 묘연의 관계가 있기는 한 것일까요?
일자의 목표를 위해 잘 조직된 공동체는 상실에 슬퍼하며 결핍을 메우려는 자아에게 대체물의 자리를 제안합니다. 그것은 목표의 대리자(agent)로서의 상징적 리더이자 동시에 위대한 이상(Idol)로서의 상상의 리더를 요구하지요. 이 관계없는 두 기표를 하나의 의미로 묶으려는 권력의 욕망이 리더의 분열증의 기원이 됩니다.
상식의 세계에서 우리는 훌륭한 리더는 특정 자질과 역량을 가져야 한다고 배웁니다.
워렌베니스는 리더의 본질적 능력을 이렇게 제안합니다.
- On becoming a leader, Warren Bennis -
리더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즉 리더는 비전을 가지고 있으며, 그 비전을 몸소 실천해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비전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고 설득할 수 있다.
리더는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목소리라고 하는 것은 목적, 자신감, 자아개념, 그리고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이 감성지능이라고 말한 전체적인 능력의 게슈탈트 등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리더는 진정한 정직성(진정성)을 갖고 있다. 정직성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그것이 강한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한다는데 있다. 정직성이 반드시 종교적 신념일 것 까지는 없지만, 그것은 자아를 넘어선 어떤 것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의미한다.
리더에게 절대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자질 중 하나는 바로 적응 능력이다. 적응 능력은 리더들이 부단히 변화하는 환경에 민첩하고 영리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말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리더들은 지도에 의존했다. 반면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리더들은 한 순간도 바람 잘 날이 없는 세계에서 지도보다는 나침반에 의지해야 한다. 칼 와익(심리학자이자 조직경영학자)은 “정의상 지도는 지도에 그려진 세계에서만 도움을 줄 수 있다. 나침반은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고, 어느 방향이 올바른 방향인지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할 때 도움을 줄수 있다” 있다 라고 말했다. 적응능력은 일종의 창조력이다. 그리고 적응능력은 기회를 포착하는 능려곧 포함한다.
또하나의 능력은 자신의 삶에 다른 변화를 줄수 있는 사람들을 가능한 많이 찾아내어 그들을 당신 쪽으러 끌아들이는 능력이다. 신경학자 로버트 사폴스키는 수컷비비를 연구하면서 비비가 오래 살지 일찍 죽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나이 많은 수컷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어리고, 더 강한 수컷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 즉 성실한 조언자를 갖는 것은 어떤 커리어 전략보다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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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제시, 개성과 신념, 진정성, 적응 능력, 인간적 매력과 유혹… 이것들을 한 인간의 자질 또는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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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능력들이 (훌륭한)리더에게 정말 필요한 능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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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특성이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른 특성과의 모순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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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때 위 능력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위 질문들에 답하다보면 과연 리더에게 본질적인 능력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인지, 그것들 각각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의 실존의 맥락에서, 조직 내 관계와 그 변화 속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되고 영향을 발휘하는지,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와 욕망을 주는지… 복잡한 생각에 휩싸이게 됩니다. 심지어 이해를 돕기위해 제시되었다는 사례들은 오히려 나 자신의 초라함과 상황의 애매함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재미있는 건 리더십 교육과 실무의 현장에서 위와 같은 역량 개념들의 적용하기 위해 구체화된 개별사례와 실천을 고민하면 할수록 개념들이 목표하는 이상적 이미지와는 다른 리더의 이미지가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공유되고 영감을 주는 비전 자체를 찾는 노력이 구체화되면 오히려 비전을 조직에 “관철시키는 전략”의 중요성을 드러내게 되지요. 개성과 신념의 추구는 차별화된 메시지와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에 필요성과 다름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한 대응과 파워게임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지요.
결국 우리는 리더에게 보편적 또는 일반적 역량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리더의 자리에 요구되는 조직과 타자의 욕망을 마주한 “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문제를 고민해 보고자 여기 모인 것이지요.
맨프레드 F.R. 케츠 드 브리스
경영대학원인 인시아드(INSEAD)에서 리더십 개발 분야의 교수로 수천 명을 가르치고 코칭하며 상담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사상가 50인, 리더십을 학문 분야로 세운 8인, 인사 분야(HR)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8인에 이름을 올렸다.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을 돕기 위해 경제학(암스테르 담대학), 경영학(MBA, DBA 하버드 경영대학)을 수학하였다. 하버드에서는 정신분석가인 아브라함 잘레즈닉(Abraham Zaleznik) 교수의 지도학생으로 공부하였으며 캐나다와 파리에서 교육과 수련을 거쳐 국제공인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이후 그는 인시아드에서 리더십 개발 교수로 재직하며 1990년대 초반 최고의 리더들을 그룹 코칭하는 ‘The Challenge of Leadership: Developing your emotional intelligence’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런칭하고 2000년대 초반에는 관리자급을 대상으로 하는 ‘Coaching and Consulting Change(CCC)’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두 프로그램은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인시아드 최고 인기 장수 경영자 교육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케츠 드 브리스 교수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읽어볼 예정입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어린 시절의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자기감(자아와는 구별되는 확장된 의미)의 균형을 강조하며 리더와 추종자의 관계가 자기감에 따른 여러 전이현상을 바탕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자기감의 형성의 결정적인 부모와의 관계나 이후 관계 안에서 왜곡된 전능과 무력의 균형을 찾아주는 것을 치료의 핵심으로 봅니다.
하지만 자기감의 형성 자체가 환상의 한 유형이며 자기감의 올바른 균형이라는 관점 역시 타자의 욕망이 주는 일시적인 적응 자리일 수 있다는 비판적 관점에서 우리는 더 깊은 정신분석적 사유를 진행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넓은 관점을 이해하는데 아래 참고 도서들이 어쩌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도서>
리더는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 - 그것은 인간관계의 가장 근본 환상
케츠 드 브리스 교수는 일단 리더라는 자리가 특별한 것이라기 보다 인간의 근본적 관계라는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8)
인간이 리더를 원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성향에 기인한다.
말하자면,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갖든 우리는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끌든지, 따르든지, 정치무대나 거대기업의 위대한 리더십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리더와 추종자는 일상생활의 기본 모형이다. 집에서, 운동장에서, 사무실에서, 그리고 각각의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리더나 추종자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문제와 맞닥뜨린다.
인간의 근본 관계는 “주인과 노예”입니다.
민주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며 숨쉬는 우리에게 비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이성적 존재로서 개인의 주체성을 실현하며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우리의 상식과는 너무 먼 이야기 같습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민주주의적 세계가 환상적 관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이전의 인간의 원래 모습, 그리고 그 인간이 어떤 의미화(상징화)과정을 거쳐 이성적 존재로 억압(거세) 되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인간의 원래 모습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담대하고 한편으로 오만하게도 느껴집니다. 마치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신이 없다면(신이 인간의 환상이라면) 그 신을 창조한 인간의 비밀스럽고 인간 스스로도 모르는 무엇을 아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담대하고 오만한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존재물음을 통해 알 수 없는 것에 다가가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래 모습은 무엇인가? 근본 관계는 무엇인가?
켓츠 드 브리스 교수는 리더와 추종자를 근본관계로 이야기합니다. 보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지요. 주인과 노예를 떠올 릴 때 조심해야 할 것은 그 관계가 산업화 이후 식민지 노예나 혁명 이전의 노동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인간이 도구나 기계를 대하듯 비인간적 관계로서 주인과 노예가 아니라 오히려 고대나 중세의 하나의 생활공동체 안에서 상호 필연적 생계 연관으로서 살아가는 주인과 노예를 떠올려 보기를 바랍니다. (물론 경험해 보지 않은 관계이기에 쉽지는 않을 것이고 오해도 많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인간의 주인과 노예(리더와 추종자)의 관계가 왜 근본관계라고 하는 것일까요?
(23~24)
1905년, 프로이트는 18세 소녀인 히스테리 환자 도라의 치료 사례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환자가 이전 부터 갖고 있던 대인관계 패턴으로 치료사에게 반응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이 과정을 '전이tansference’ 라고 불렀으며, 이를 현재에 변형되어 나타나는, 과거 경험에 대해 환자가 보이는 감정적 및 심리적 반응의 "새로운 판본new edition” 또는 “재판repint” 이라고 표현했다. 프로이트의 말에 따르면 "일련의 심리적 경험이 과거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되살아나서 지금 이 순간에 치료 사에게 적용된다.”([1905] 1953b, p.116)
전이는 분석하는 과정에서 특정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소중한 통찰을 주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일상생활에서 전이반응을 나타낸다. 실제로우리의 정서반응 대부분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현실적 반응과 "경험적" 또는 전이적 반응이 복합된 결과다. 이런 경험적 반응들은 어린 시기에 형성되는 관계 (첫 번째로 보호자인 부모) 그리고 그때 주어져 남은 인생 동안 사라지지않는 심리적 각인에서 기인한다.
모든 관계는 전이에 바탕합니다.
전이는 옮겨감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인데요. 관계가 복수 주체의 상호적 상태를 가르키는 말이니 전이는 주체들간의 어떤 감정 또는 의미의 교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룰 전이의 의미는 관계의 반복으로서의 전이입니다.
우리는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를 통해 의미를 찾고 성숙하고 삶의 본질에 다가간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인문학은 그러한 삶의 환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요.
이성의 압도된 삶의 고통을 다루고, 이성이 아닌 모순적 삶 즉 실존과 부조리를 다루는 철학과 예술이 등장하지요.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뮈… 일종의 반이성의 계보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 뿌리 중 하나인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이라는 관점을 체계화하지요.
아이에게 어머니와의 관계는 성적인 자극과 만족의 지속적인 원천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를 완전히 대체된 성적 대상으로 여겨서, 매혹하고 안이주는 만큼 더하다. 물론 어머니는 자신의 부드러운 손길이 아이의 성적 욕동을 자극한다고 하면 말도 안 된다고 할 것이다. 어머니는 신체적으로 꼭 돌봐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의 생식기를 건 드린 적 없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는 비성적인 것이라고 성본능과는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적인 욕동이 꼭 생식기를 자극해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부드러운 손길이 몹시 자극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프로이트-
전이는 엄마(양육자)와의 성애관계를 어떤 형태로든 삶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함을 의미합니다.
첫 관계가 다음관계로 옮겨지고 다시 그 다음 관계로 옮겨지는 지속적인 반복의 관계를 전이라고 개념화 한 것이지요. 단순화하면 전이란 엄마와의 최초 관계의 반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여기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프로이트의 성적 대상으로서의 관계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성기대나 사랑의 감정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이야기 하겠지만 남녀간의 성행위나 에로스적인 사랑의 감정과 욕망이 최초의 성적대상관계와 관련이 없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모든 관계가 전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성적 관계는 근본 관계의 상당한 변형과 왜곡이 가해진 환상이 한 형태일 뿐이지요. 우리가 경험 또는 기억을 말 할 수 있기 이 전 시기 (전오이디푸스 시기라고도 불리지요)에 양육자와 어떤 관계에서 어떤 쾌락과 불쾌를 느꼈는지는 아무도 말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어떤 관계가 있었지요.
양육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프로이트의 묘사처럼 아이를 바라보고 웃고 듣고 안고 말하고 배변을 돕고 쓰다듬고 물고 빨고… 수 많은 관계의 행위가 있었지요. 아이의 관점에서는 어떨까요? 일단 설명할 수 있는 경험으로서는 기억을 못합니다. 어떤 느낌이 지속되었고 즉각적인 반응에 대한 몸의 기억이 있을 수 있지요. 그렇다면 최초의 관계 경험으로서 의 근본 관계 기억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근본 관계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거울”이라는 정신분석에서의 특별한 장치에 대한 이야기와 자기애라고 불리는 나르시시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근본 관계의 시작은 거울단계
우리가 어떤 기억을 형성하려면 우선 기억하는 장소로서 ‘나’라는 자아의 발견이 필요합니다. 자아의 발견은 최초 양육자 즉 엄마와의 최초의 관계로 부터 시작됩니다.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아이를 생각해 봅시다. 그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배고픈 내가 엄마라는 존재의 부분으로서 나에게 배고픔을 해결 할 그것을 주는 엄마의 젖을 나의 입으로 빨고 있다고 생각할까요?
아이는 스스로를 독립된 주체로서 경험하기 보다는 파편화된 신체의 자극을 느끼는 다형적이고 개별화된 신체로 있습니다. 즉 젖을 빠는 입, 만져지는 손, 배고픈 위, 배설하는 항문, 보여지는 눈… 각기 자극을 받아들이는 생물학적 신체와 느낌으로서 다형적으로 있다는 말이지요. 심지어 자신을 안은 손과 자기를 바라보는 눈, 자기를 부르는 소리, 맞닿은 엄마의 신체 역시 자극하는 다형적 신체의 조각으로 느낄 것입니다. 당연히 완전체로서 자기를 인식하기 이전의 느낌은 모두가 자신의 것이겠지요.
이런 파편화되고 다형적 쾌락과 자극으로서의 신체가 하나로 통합되고 자아의 이미지로 변화되는 과정을 정신분석은 거울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정신분석에서 거울은 시각으로 인식되는 감각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상상적 이미지 모두를 아우르는 기호적 장치입니다. 쉽게 그냥 거울을 상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켓츠 드 브리스는 도널드 위니콧의 이론을 빌려 아기의 최초의 거울은 엄마의 얼굴이라고 설명합니다.
(25)
위니콧에 따르면 엄마의 얼굴에서 보이는 자신의 반사된 모습, 그리고 그 변화에 대한 아기의 민감성이 유아기 감정발달의 수준을 크게 결정한다. 아기 때부터 시작되는 이 과정은 평생에 걸쳐 계속된다. 그리고 왜 다른 사람들에게 투영된 우리의 공 포, 욕망, 성공, 실패를 계속 보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엄마의 얼굴과 이뤄지는 이 교감의 질과 아기가 개발하는 감정적 성숙도의 수준이 현실을 익히는 아기의 사고능력에 영향을 미친다.
우선, 엄마의 얼굴은 아기의 완전성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반영한다. 아기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 거울은 반사되는 모습을 조정한다. 즉, 아기는 무비판적으로 사랑받는 이미지가 아닌 개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좀 더 이성적으로 인식한다. 이런 조정은 필수적이다. 여기서 거울전이는 양방향 효과를 가진다.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최초의 감각을 만들고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토대를 형성한다. 엄마와 아이 양자 모두 관찰자와 피관찰자로서 그 관계의 질이 중요하다.
아이는 최초의 거울로서 엄마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아이는 그것이 타자임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요. 얼굴 뿐 아니라 모든 자극은 아이에게 자신의 신체 일부로 경험되겠지요. 하지만 완전한 신체의 환상은 거울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형성됩니다. 실제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를 보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여러 신체의 자극 즉 만져지고 스스로 움직이며 경험하는 압박, 그리고 엄마의 완전한 신체를 보고 자신의 신체로 오인하며 상상하는 그 경험은 아이에게 완전한 신체로서 독립된 자신의 몸을 이미지화 해주지요. 그것이 최초의 거울단계에 접어든 아이의 환상입니다. 그것은 자기 밖에 있는 완전한 신체의 모습을 마치 자기의 것인양 오인하는 첫 자기-경험이겠지요.
나르시시즘
최초의 자기-경험이 오인(오해)라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파편화된 신체적 느낌(쾌/불쾌)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의 완전한 몸의 이미지를 자기의 최초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기에 그것이 오인이라면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자기 이미지 이후 형성된 모든 자아 이미지는 오인이라는 논리적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자기 (자아를 포함)는 환상이자 이미지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환상이라는 개념이 가진 특징 중 하나는 그 환상을 만드는 주체의 욕망 즉 리비도가 투여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욕망의 손으로 잡아 쥐고 있지 않는 다면 그 환상은 마치 흘러내리는 물처럼 사라지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자기-환상은 고착되고 지속되며 또한 아주 다양한 변주를 거칩니다.
바로 자기-환상을 향한 리비도의 투여, 자기애를 두고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나르시시즘 Narcissism은 그리스의 Narcissus 신화에서 따온 개념으로 거울에 비친 자기 환상을 욕망하는 인간의 원초적 관계를 표현하기 좋은 상징 언어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어리석어라! 달아나는 영상을 좇아서 무엇하랴! 그대가 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서 보라. 그러면 그대가 사랑하던 영상 또한 사라진다. 그대가 보고 있는 것은 그대를 비춰낸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다. 그대가 거기에 있으면 그림자도 거기에 있을 것이요, 그대가 떠나면, 그대가 떠날 수 있어서 그 자리를 떠나면 그림자도 떠나는 법인 것을……”
나르키소스는 그 이름에서 망연자실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 자체로 인간의 상실감을 드러내는 이름이지요. 나르키소스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물의 요정 리리오페의 아들입니다. 그의 운명은 이미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 의해 밝혀집니다. “천수를 누릴 것입니다. 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알지 못해야 살수 있다는 예언자의 말을 기억해 봅시다.
나르키소스의 운명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헤라의 저주를 받은 에코입니다. 에코는 상대의 말 끝을 따라할 수 밖에 없는 또 소리의 거울이지요. 에코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에코의 욕망은 결국 충족될 수 없는 것이지요. 에코의 죽음은 나르키소스의 사랑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나르키소스는 순수한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하게 된 것이지요. 나르키소스는 자기가 웃으면 웃고 손을 내밀면 손을 내밀고 입을 마추면 입을 마추는 샘에 비친 존재를 욕망하게 되면서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자기-이미지)를 알게 되버립니다. 결국 욕망하는 주체가 스스로 욕망의 대상임을 알아버린 나르키소스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죽어갑니다. 죽은 에코와 요정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애도합니다. 에코는 거울이미지로서 이루지 못한 자신의 사랑을 똑같이 거울 반대편에서 경험한 나르키소스의 사랑을 애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르키소스가 욕망한 것은 과연 누구의 욕망의 대상이었을까요?
나르시시즘, 불안과 사랑
프로이트는 나르키소스의 신화 속에서 인간의 욕망이 탄생하는 과정을 발견합니다. 최초 거울이미지인 엄마의 완전한 몸, 그 완전성을 사랑하는 상상적 동일시 관계가 우리 인간이 맞이하는 최초의 쾌락이자 사랑입니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러나 이런 완전한 거울 이미지에 대한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개입으로 실패한 -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남게 됩니다.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지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인간의 욕망 형성에 가장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이므로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지요. 일단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핵심은 엄마와의 최초 관계의 상실을 맞이하는 순간이자 그 상실감 - 결핍의 대안으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욕망하는 단계라고 기억해 놓길 바랍니다.
왜 아버지인가? 그것은 아버지가 엄마의 사랑을 소유한 사람으로 상상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아버지처럼 되면 엄마의 사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오인하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을 문자 그대로 엄마의 사랑을 아버지가 됨으로서 가질 수 있는 내러티브를 갓난 아이가 경험하고 기억한다는 건 아닙니다. 이건 인간의 욕망 형성의 구조를 이야기 위한 비유적 이야기일 뿐입니다. 최초의 근본 관계에서 형성된 쾌락의 동일시 (거울-이미지에 대한 사랑으로거 원초적 나르시시즘)를 지속할 수 없는 인간 문명의 필연적인 삶의 절차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문명이 명령하는 언어(명령)의 규범을 내재화함으로써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나는 아들 또는 딸이자 남자 또는 여자이자 한국사람이자 학생이자…. 누군가로서 사회 속에서 언어에 의해 호명되고 자리배치 됨으로서 만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 명령의 언어는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의 권력구조 (가부장, 자본주의…)의 체계를 우리의 신체에 문신하며 그 이전에 엄마와 느낀 무규범적이고 다형적인 쾌락의 신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프로이트는 문명의 언어가 최초의 신체의 쾌락 (원초적 나르시시즘)을 억압하고 쾌락의 방향을 왜곡하는 과정을 거세(남근의 상실)라 이름하고 그 거세의 공포에 떠는 인간의 원초적 불안을 오이디프스 컴플랙스라 개념화 한 것이지요.
거세 불안에 떠는 인간에게 주어진 새로운 욕망의 길 → 자아 이상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거친 아이가 욕망하게 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엄마와의 동일시적 쾌락이 아니라 아버지가 명령한 문명의 쾌락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샘에 비친 나르키소스의 모습과 같은 문명이 만든 자기-환상의 이미지이지요. 그것은 남자다움, 능력자 (옆집 아들/딸), 잘 생긴/예쁜 외모, 좋은 성격, 예의바르고 상량한, 효자/효녀…. 훌륭한 리더 등의 자아 이상으로 자리잡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자아 이상이 나의 원초적 관계에서 상실한 쾌락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억압된 것이며,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도상에 놓여있다는 점입니다.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나르키소스처럼 우리 역시 잃어버렸다고 상상하는 그 원초적 관계의 쾌락에 대한 기억 (상상)에 매달려 그것을 보상해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합니다. 하지만 그 욕망은 문명이 언어를 통해 재현하는 이미지이자 환상이기에 언제나 실패하지요. 물론 그런 문명을 이끌어가는 권력의 장치는 그 욕망이 충족되는 과정과 성공한 인간의 영웅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욕망의 과정에서 가슴을 치고 좌절하고 엎어지기도 하지요.
그 과정에서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퇴행적 나르시시즘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문명이 문신하려는 자아 이상으로 부터 단절하여 어린 시절의 상실한 쾌락으로 돌아가려는 퇴행적 욕망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퇴행은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 됩니다. 나르시시즘적 자아는 각자 만의 방식으로 자기애적 욕망 추구를 위한 환상을 만들어 갑니다. 폐쇄적인 환상에 갖혀 상실했다고 믿는 엄마와의 근본 환상을 찾으려고 할 경우, 그 끝은 자궁 속으로 퇴행 즉 죽음(자살)이 되기도 합니다.
또는 거울이미지에서 본 이상적인 자아의 사회적 판본 (자아-이상)을 찾아 자기만의 환상 속 연인을 만들고 자신의 리비도를 투사하기도 합니다. 대체로 리더-추종자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대표적인 양상입니다. 추종자들의 환상을 리더가 자신의 자아-이상으로 받아들여 그 상상적 관계를 욕망하는 상황이지요.
(32)
만약 거울전이가 우리 일상생활을 비롯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힘이라면 조직 내 리더와 추종자 사이의 역학관계 속에서도 중요하다. 리더 / 추종자 상황을 이루는 많은 요소, 즉 힘, 권위, 영웅 숭배, 아침, 야망, 관심 끌기 등은 왜곡된 거울전이가 나타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다.
추종자들은 리더에게 자신의 환상을 쉽게 투영한다. 그리고 리더가 하는 모든 행동을 추종자 스스로가 만들어 낸 자신의 이미지 관점에서 해석한다. 리더를 유혹해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환상 속의 존재가 실제 리더 자신이라고 믿게 만든다. 불행히도, 대개는 그들이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 속에서 리더와 추종자 모두가 깨어나기 전에 대재앙이 일어난다.
해리 랭그너 사례 (52)
해리 랭그너(가명)는 심각한 우울증과 스트레스 증상으로 내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는 텔라(가명)라는 기업의 사장직에서 5년 만에 제로 사임당한 후 이런 증상들이 생겨났다. 텔라는 음식 관련 사업을 하는 유명한 회사였다. 4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사장으로 임명된 그 순간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고공비행을 하던 그의 커리어의 정점이 었다. 전임자가 직접 그를 선택했고 사장직을 물려받을 수 있게 관리 했다. 그리고 이사회의 전반적인 승인을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그 이 후에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랭그너는 영광의 순간에서 비참할 정도 로 왜 그렇게 빨리 추락했을까?
퇴임하는 사장과 회사의 다른 이사들이 칭찬한 랭그너의 자질, 즉 협업에 능하고 회사 경영에 기여한 전문적인 지식과 책임감 등은 그 가 CEO가 되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승진 전에 그를 알았던 많은 사 람들이 하룻밤 새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고 이야기 했다. 대부분이 그가 점점 독선적으로 변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CEO로서 랭그너가 취임 즉시 착수한 일은 큰 비용이 들어가는 적 지 않은 수의 프로젝트들이었다. 첫 계획은 기업의 본사를 북쪽 지역 으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주요 시장과 더 가까운 곳으 로 옮긴다는 것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북쪽에 위치한 그의 대저택 때문이라는 비판이 회사 내에서 제기됐다. 일련의 사치품 구매도 이어 졌다. 랭그너와 최고경영진을 세계 곳곳으로 실어 나를 두 대의 회사 제트비행기와 주요 고객들을 접대할 목적이라고 주장하며 주문제작 요트를 사들였다. 실제로 요트는 랭그너가 친구들과 먼 바다로 낚시 를 갈 때 주로 쓰였다.
랭그너는 비교적 전통적이었던 회사 이미지를 트렌드를 선도하는 주자로 바꿔나간다는 목표를 내세워 4년이라는 기간을 설정한 후 두 가지 주요 조직 개편에 착수했다. 그 기간 동안 회사가 고용한 컨설 턴트 부대가 이뤄낸 유일한 가시적 결과는 조직의 심각한 불안정뿐 이었다. 장기간 근속했던 유능한 직원들이 떠나갔고, 그 결과 조직의 사기가 저하됐다. 문제 있는 여러 건의 인수합병이 회사의 다른 부분 과의 조화에 대한 고려 없이 무분별하게 이뤄졌다. 텔라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주가는 급격히 하향곡선을 그렸다.
회사가 손실을 보기 시작하는데도 랭그너의 급여와 상당한 규모의 특혜는 그대로 유지됐다. 그는 수익이 곤두박질치는데도 전혀 개의 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회사가 증가하는 재정적 문제로 곤란을 겪을 때 그는 열정적으로 파리 근교의 고성금했에서 열리는 회의를 계획 했고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회사 임원과 손님들을 태울 헬리콥터를 빌리고, 많은 정치인들에게 고액의 강연료를 지불하고, 미슐랭 스리 스타 프랑스 주방장을 고용해 연회를 준비했다. 이때쯤 랭그너의 독 재적 스타일과 위험한 행동은 그나마 남아 있던 그의 회사 측근들마저 떠나가게 만들었다. 회사 내에서 솔직한 의견 교환의 기회는 사라 저버렸다. 좋은 아이디어들은 무시되고 시들어 버려졌다. 고위직들 의 사임이 뒤따랐고 주식은 지속적인 매도세로 사상 최저가를 이어 갔다. 조직 내에는 장례식 같은 분위기가 팽배했다.
랭그너는 그에게 다가가려는 직원들에게 귀를 닫고 있어서 회사의 문제를 잘 파악하지도 못했다. 그가 자신이 부분적으로 소유한 다른 회사에 저금리의 대출을 승인했을 때 마침내 폭탄이 터졌다. 대출에 따른 이해충돌 문제는 이사회가 그에게 사임을 요구할 구실을 줬다. 그는 자신이 그 회사의 경영을 맡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해충돌의 여지가 없다고 항의했으나 랭그너는 결국 사임당할 수밖에 없었다.
몇 주가 흘러 우울감이 가장 깊게 짓누를 때 랭그너가 나를 찾아왔다. 그의 첫 번째 상담치료였다. 그는 나를 찾아오기 전에 관련 주제 에 대해 상당히 많은 양의 자료를 찾아 읽고 미리 상담을 준비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상당히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아르마니 양복, 구찌 구두, 파텍 필립 시계 등 구석구석 잘 차려입은 그는 거침없 이 전문 임상 용어들을 구사했다. 방에 들어와 그가 한 첫 번째 행동 은 정치와 예술 세계의 유명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간 신문 기사 스크랩들을 가방에서 꺼내드는 것이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랭그너는 자라면서 항상 자신이 화제의 중심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잘생긴 용모를 자랑하고, 손님들이 찾아오면 옷을 잘 차려입히고 그에게 노래를 시켰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 주변에 둘러앉아 노랫소리에 환호하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언제나 재능이 넘치고 앞으로 촉망받는 인재가 될 것이라고 평가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선생님들을 설득해서 그를 1년 빠르게 고등학교에 입학 시켰다. 회상에 잠겨 그는 때때로 그 선택이 현명한 일이었는지 의문 을 품는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로 인해 많은 압박을 받았고 친구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가 진짜 자신의 욕구에는 완전 히 무관심한 채 외적인 성공의 상징, 예를 들어 잘생긴 외모나 학교 성적에만 관심을 보였다고 말했다.
랭그너는 훌륭한 고등학생이었고 졸업앨범에는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큰 인물로 기록됐다. 그는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했고, 그곳에 서는 예전처럼 모든 일들이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 을 받았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여자들과 어울리는 시간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었 다. MBA 학위를 받은 뒤, 랭그너의 가장 큰 고민은 제안받은 여러 일 자리 중에 어느 회사를 선택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가장 성공적으 로 면접을 치른 구직자였다. 면접관에게 호감을 주는 것은 그에게 세 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평소에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또 그 화려함에 이끌려 그는 자연스럽게 광고업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첫 직장으로 텔라의 자회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열정적인 자세와 자 기 확신으로 연달아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몇 번 재촉하자 랭그너는 자기 성격의 몇 가 지 어두운 측면을 인정했다. 자신이 맺는 인간관계가 항상 뭔가 한쪽으로 치우친 상태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업무결과가 찬탄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자신이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타인이 노력한 결과에는 진심으로 관심이 느껴지지 않아 매번 흥미가 있는 척 태도를 꾸며야 했다. 그의 아이디어에 재빠르게 열정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부하직원들은 곧 자신이 소외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랭그너는 자신의 화를 돋우면 당사자의 직장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경쟁자를 불리하게 만들기 위해 무리수를 썼던 두 번의 사례 를 이야기했다. 영리하게 대처할 줄도 알았지만 잔인하게 복수할 줄 도 알았다. 랭그너는 상사들을 유혹하기 위해 그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했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보여주는 데 능숙했고 정치게임을 할 줄 알았다. 이것이 효과가 있어서 사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어쨌든 최고의 자리에 오른 후 그는 도를 넘어섰다. 무슨 이유에선지 일반적인 행동규칙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또 자신이 규칙 위반행위를 하더라도 책임을 편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게임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그의 자세가 조직에 가져온 혼 란으로 직원들은 흔들렸고 회사는 거의 파산에 이르렀다.
위 사례를 통해 우리는 랭그너의 리더십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랭그너의 왜곡된 나르시시즘이 폐쇄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결국 조직을 파국으로 이끌었다라고 쉽게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과연 그럴까요?
랭그너의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오히려 정신분석가의 섣부른 평가와 강박에 의해 해석되고 해부된 인간이 보입니다. 랭그너가 CEO에 오른 뒤의 행보는 어쩌면 리더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왔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상상을 한번 해 봅시다. 랭그너는 회사의 전략을 바꾸고, 과거 전략과 조직문화를 새롭게 바꾸기 위해 외부 컨설팅의 도움을 받고 기존 케시카우가 되었으나 사향사업으로 접어든 사업의 투자를 줄이고 인력을 구조조정 합니다. 새로운 비전과 전략으로 신사업에 투자하고 이를 위한 인수 합병 등의 자신감있는 행보를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기존 사업에 몸담았던 오래된 임직원을 정리하거 신사업 방향에 동의하는 임직원들을 자신의 주변과 사업 일선에 세웁니다. 물론 확장 과정에서 핼기나 요트의 구매 등 불필요한 비용을 늘렸다고도 볼 수 있으나 전체 매출 규모에서 과연 이런 비용들은 그리 큰 이슈가 안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업 투자와 인수합병이 단기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몇 몇 자회사의 실적도 계속 안 좋아집니다. 현금흐름은 점점 나빠지고 채권의 만기가 도래하고 상환을 위한 새로운 자본 조달 요구가 은행으로부터 거부당하기 시작합니다. 외부 자본 조달을 위해 화려한 이벤트 홀을 빌려 저명 인사와 고급스런 행사를 통해 투자 유치를 시도해 봅니다. 회사는 아직 건재함을 보여주고자 했으나 이미 현금흐름 악화 소문을 들은 투자자들 역시 등을 돌립니다. 랭그너는 결국 실적이 좋은 자회사를 골라 저리의 대출을 하도록 자회사 대표들을 설득합니다. 자회사는 모회사에 돈을 빌려주고 당장의 현금흐름 문제는 해결하고 비용절감을 통한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기존 사업 부문의 임원들은 랭그너에 적대적인 이사회 멤버들을 규합하고 랭그너를 대표에서 해임할 계획을 세웁니다. 해임결의를 위한 주주를 결집하고 자회사로 부터 저리의 대출을 집행한 사안을 배임 이슈로 삼아 해임결의 주총을 소집합니다. 랭그너는 자본조달을 통해 겨우 겨우 회사를 살린 자신을 배임을 명분으로 몰아내려는 이사들과 주주들에 배신감을 느끼고 결국 강제로 해임됩니다. 퇴직금은 약속한 금액을 받았으나 평생을 몸담은 회사로 부터 내 쫒긴 랭그너는 자신의 상실감과 분노 그리고 회의감을 참을 수 없어 상담가를 찾아갑니다.
이렇게 상상해 보면 랭그너의 리더십에 애초부터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기 힘들 것입니다. 어쩌면 분석가의 마음 속에 리더의 모습과 다른 랭그너의 모습이 부각되어 보인게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겸손하고 검소하고 솔직하고 열린 마음에 너그러운 모습의 리더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인간적 특성과 관계를 맺는 유형적 이미지가 한 인간에게 그것도 다양한 욕망을 마주한 자리에서 고정적이거나 전형적일 수 있을까요. 더구나 어떤 특정 관계 성향과 특성이 조직의 상황과 성과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일까요?
사례의 뒤집어 보기를 통해 우리가 해보고 싶은 것은 사례 속 랭그너가 각각의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싶어했고), 어떤 방향을 전략을 원하고 (왜 그것을 욕망했고), 어떤 장애물에 직면했고 (왜 그것을 장애물로 인식하고),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무엇이 안전한, 좋은 상태라고 인식했는지) 등을 자기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사례의 자기화 (누군가는 이것을 자기 환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리더의 고민과 장애물, 욕망과 반복 강박, 분열적 모순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모두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