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이상스, 절대적인 것이 원하는 것,
알 수 없는 그것, 모르기에 나는 절대의 욕망 안에서 도구, 주이상스의 객체-주체 가 된다.
그 절대적인 것을 말하는 형식 - (Categorical 무조건적)명령
명령하는 타자가 존재하는 무대에서 만 주이상스의 주체 역할이 허락된다.
주이상스의 자리는 타자의 무대에만 있다.
무조건적 명령 (Categorical Imperative)
보편자가 말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너는 네 쾌락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삼되, 그것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보편적 법칙으로 삼아라.”
“인간성을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
윤리는 선, 악을 판단하지 않는다.
윤리는 그것이 절대적것인가-를 묻는다.
윤리는 누구의 명령인가-를 묻는다.
윤리는 “절대”를 명령하는 “누구”를 묻는다!
“거짓말 하지 말라”
도망자를 숨겨주고 추격자가 찾아와 그 사람이 여기에 있는지 물었을 때,
도망자를 왜 숨겨주었는지, 추격자가 누구인지… 고려해야 할까? (피해자와 살인자, 범죄자와 경찰, 유대인과 게슈타포….)
누가 “명령”하는가? 누가 “욕망”하는가?
누구의 주이상스인가?
가스파 노에
모두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말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모두가 폭력을 이야기하지만 말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모두가 쾌락을 이야기하지만 말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나는 모두가 모르는 척, 안보는 척, 부인하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술은 로맨스와 정의 카타르시스를 다룰 때, 섹스와 폭력의 환상을 동원한다.
두 사람은 진실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상대의 몸을 소중하게 다루며 상호 쾌락의 최적화된 지점을 찾기 위한 기술을 선보인다. 애무의 위치와 강도, 시간과 리듬, 방법과 수단…을 통해 상대를 분석적으로 알아가는 과정과 정성은 나를 알아보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만족시키고 나를 보호하고 나를 완성시키는 완벽한 타자에 대한 환상으로 나아가기에 단지 그것은 섹스를 넘어 “반쪽짜리인 나의 완성이자 미래의 행복한 약속”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 된다.
“사랑”은 그렇게 이야기 되어야 하기에 보여져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발기되거나 늘어진 성기, 배설되고 흘러내리는 것들, 냄새, 쾌락의 도구처럼 사용되는 신체들, 상대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상상, 불만족, 파괴적 충동, 폭력, 상대의 고통과 표정, 환상을 너머서는 적나라한 것들….
성인 남녀 간의 삶에서 드러나는 성-생활의 모습들은 스크린 속에서 모두가 다 아는 방식으로 또 그러해야만 하는 형식으로 가려지고, 생략된다.
폭력 역시 마찬가지로 그 현장을 직접 경험한 사람에겐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실재의 폭력은 스크린 속에서 적당히 중화된다. 폭력보단 오히려 대개 그 맥락에 주목한다. 질투, 복수, 공포, 권력, 사랑….맥락 안에서의 폭력은 찢기는 살점과 솓구치는 피, 부서지고 파이는 신체와 뒤틀리는 기관들의 모습을 생략하고 맥락에 따른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과 고통받는 자, 지켜지는 법과 가치를 통해 쾌락의 문을 열어 준다.
가려지고 생략된 것, 19금의 이름으로, 스너프, 포르노, 고어… 등의 이름으로 교묘히 금지되면서 유통되는 장르물들이 있으나 마치 감금된 비정상의 그룹처럼 있어도 없는 듯 취급되는 것들.
있지만 없는 것으로 “부인”된 이미지가 흘러나오면 로맨스와 정의라는 이름의 욕망이 약속하던 안전한 쾌락의 장소가 무너진다.
세미나 7. 아르노 다니엘의 음유시, 보충 노트 Mar. 9. 1960
"그녀의 나팔을 불지 않겠노라"
레이먼드 경과 트루크 말렉 경이 에나 부인의 명령을 두둔한다 해도, 나는 늙고 백발이 되도록 그 요청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으리라. 왜냐고? 그녀의 나팔에 입을 맞추려면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고 긴 주둥이가 필요하니— 곡관 깊숙이 곡식을 쪼듯 파고들어야 할 테니까.
그 나팔은 거칠고 흉하고 털이 뻣뻣하며 결코 마르는 일이 없고, 그 안의 늪은 너무나 깊다. 피치처럼 끓어오르는 진흙이 끊임없이 넘쳐 흐른다. 그런 관에 입을 대는 자가 총애받는 자일 수는 없으니. 더 고귀한 시험들이 얼마든지 있다— 더 값지고 아름다운. 그러니 베르나르가 그 하나를 포기했다 해도 그가 겁쟁이라 비난받을 일은 아니리라.
그 나팔은 거칠고 흉하고 털이 뻣뻣하며 결코 마르는 일이 없고, 그 안의 늪은 너무나 깊다.
피치처럼 끓어오르는 진흙이 끊임없이 넘쳐 흐른다. 그런 관에 입을 대는 자가 총애받는 자일 수는 없으니. 더 고귀한 시험들이 얼마든지 있다— 더 값지고 아름다운. 그러니 베르나르가 그 하나를 포기했다 해도 그가 겁쟁이라 비난받을 일은 아니리라.
그 위에서 물줄기가 쏟아졌다면 목과 뺨이 홀라당 데었을 것이고, 그녀의 품에 그 입을 대는 것은 도리어 수치의 일. 나는 듀르포르 경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베르나르의 잘못을 탓했지만, 기꺼이 불려고 했더라도 그는 곧 거친 장벽과 정원 똥보다 더한 악취에 맞닥뜨렸으리라.
신께 감사하라, 그를 말리려는 자들에도 굴하지 말고. 그가 그 위험에서 빠져나오게 하셨으니.
그건 큰 재앙에서 벗어난 것이며, 그의 아들, 코르닐 가문의 이름마저 더럽힐 뻔했던 일. 차라리 유배를 택했어야 했다— 등뼈와 치골 사이 그 깔때기에 입을 대느니. 거기서 누런 것들이 흘러나오니, 그녀가 그에게 얼굴이며 눈썹까지 오줌을 퍼붓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으니까.
아가씨여, 베르나르가 그 나팔을 다시 분다면 큰 마개로 그의 물줄기를 단단히 틀어막고서나 하게 하소서. 그리해야만 위험 없이 불 수 있으리니.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하면 안되는 것과 함께 말해진다.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누군가의 헛기침과 침묵, 분노섞인 한숨, 수근대는 술렁임이 주이상스의 서곡처럼 퍼져나간다. 누군가를 찾는다. 저건 쓰레기야~! 라고 말해서는 안됨을 복창해주는 제사장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차라리 자리를 뜨자. 한 없이 욕을 하자.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나의 면죄부를 위해 고해성사를 하자. 말해서는 안됨을 명령하는 분께 나의 고백은 전해질 것이다.
사실 그 고백은 이미 그분께 전해졌다. 아니 오히려 그분의 고백이 나에게 내려왔다. 나는 언제나 선을 넘는다. 그분의 절대성은 나의 타락을 질타해주어야 한다. 그 타락의 지옥에서 나를 구원해 줄 분이기에 나는 그분의 질타를 들어야 한다.
나는 그 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알 수없기에 따를 수 밖에 없다.
처음 가본 숲 속에서 내가 따라가는 것은 누군가의 발자국, 길처럼 풀이 양옆으로 뉘여진 그 사이, 간간히 나무가지에 걸린 표시, 사람의 흔적, 인공의 빛….
숲 길은 여러 갈래로 드러나기도하고 없던 길이 생기기도 하며, 드러난 길들을 보며 샛길을 만들기도 하고, 나름 안전한 탈선을 가능하게도 한다. 그렇게 생겨진 길들은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지워지고 합쳐지며 복잡한 체계를 만든다. 다만 그길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끝에 가본 사람만이 알고 있다. 가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길을 또 만들거나 멈추거나 뒤돌아서게도 하지만.
삶이 더 이상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문제가 아니다.
칸트의 대타자도, 사드의 대타자도 숲 길 끝에 있어야 하는 “삶의 진리”를 약속해지 주지 않는 이상,
오히려 그것이 구토와 수치심, 죄책감과 불안으로 결국엔 무력함과 우울….로 삶을 몰아가는 이상,
삶은 “대타자”와 대면하는 멈춤을 택하는 문제가 될까.
“대타자”는 사기꾼이다.
애초에 텅빈 공갈빵처럼 환상의 표피가 없다면 비어있지 조차 않은 아무것도 아닌 것.
비포장 길처럼 웅덩이로 덮이고 여기 저기 걸려넘어질 돌들 사이에 길인지 아닌지 모를 애매한 그 지점
밝은 길 옆으로 난 샛길,
그것은 “없음”이 어두움 속에 있기에 “없음”이 있다고 표지할 수 있는 장소. 거기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기에 함부러 침범하지 못하는 장소
그 장소로, 선을 넘어, 들어가는 행위는 “위반” transgression
대타자를 대면하고자 함은 의미의 밑바닥, 규범과 미학의 논리의 끝으로 향하는 행위
가스파 노에의 영화들처럼,
춤을 추는 무용수들의 광란의 파티… 엑스터시에 취해 서로를 파괴하는 지점까지
연인의 섹스의 쾌락… 서로의 몸의 탐닉에서 트리썸, 트렌스젠더, 스와핑, 난교…사라짐까지
넘지 않는 선을 의도적으로 너머 새로운 충동으로… 다시 익숙한 것으로…
더 들어가보는 도착적 충동으로… 다시 익숙한 것으로….
어디까지…죽을 때 까지.
위반의 지속, 주이상스의 리추얼, 무대
나의 파괴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주이상스”의 긴장, 대타자의 사기를 드러내는 순간을 장치화하는 리추얼
욕망의 발명, 문체의 변화, 증상과의 동일시… 라깡의 욕망, 라깡이라는 대타자, 대상a처럼 종잡을 수 없기에 더욱 이상화되어가는 라깡의 환상… 속지말자.
그는 승화가 무엇인지 끝끝내 답하지 못했다. 승화는 “무엇”이 아니기에 그것은 발명되지도 변화하지도 동일시 되는 대상도 아니라고…
라랑그, 쾌락을 각인한 최초의 언어, 상징-실재의 경계선… 무의미의 최초의 기표
의미는 아직 없는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순수 기표. 주이상스의 열쇳말.
그것을 언어에서 찾기 보다, 난 몸에서 찾는다. 몸은 말하기 위해 근육을 쓰고, 신경을 도구로 사용한다. 기표의 물질성은 시각을 너머 몸의 감각 전체로 드러난다.
그리고 의미를 지우는 작업, 대타자의 자리로 선을 넘는 그 긴장의 리추얼을 위해 전복된 작업을 시작한다.
피나 바우쉬의 작업
시작은 음악 한 곡, 이미지 하나, 혹은 ‘외로움’ 같은 추상적인 단어.
연습에 들어가면 무용수들에게 묻는다.
“최근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있는가?”, “그 미움을 몸으로 보여달라.”
무용수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대답한다. 말로, 표정이나 몸짓으로. 어떤 것은 웃음이고, 어떤 것은 주저하는 동작이며, 또 어떤 것은 갑작스러운 포옹이다.
그것들을 전부 기록한다. 즉시 평가하거나 버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완성된 무용 동작이 아니라, 무용수 개인의 기억과 감정이 응축된 몸짓이라는 점이다.
응답이 모이면,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배열한다. 줄거리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감정과 이미지의 흐름을 구성하는 과정이다. 전혀 다른 장면이 나란히 배치되기도 하고, 같은 장면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반복과 변주는 기이한 감각과 감정을 부른다.
무대 환경도 만들어진다. 흙, 물, 의자, 식물 같은 것이 무대 위에 놓인다. 이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무용수의 움직임을 제약하거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버리는 장치가 된다. 흙 위에서는 발걸음이 무겁고 불안정해지고, 물 위에서는 동작이 예측 불가능하게 흐른다.
무대에는 완결된 이야기 대신, 조각난 이미지들이 남는다. 이들은 서로 부딪히고, 끊기고, 반복된다. 관객은 그 틈과 단절 속에서 의미보다 감각을 더 강하게 경험한다. 이는 언어화되기 전의 자리, 라캉이 말하는 실재에 가까운 감각을 신체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다.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
강렬한 이미지, 오래된 신화의 한 장면, 고전 회화 속 몸짓.
그것은 이미 시간과 언어를 넘어선 형태로 존재하며, 그는 그 형상을 무대로 옮길 방법을 찾는다.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그는 무용수에게 대사를 주지 않는다. 대신 물, 흙, 금속, 나무 같은 사물과 마주하게 한다. 움직임은 재료와 신체가 부딪히며 만들어진다. 무게, 질감, 저항이 먼저 설정되고, 그 조건 속에서 동작이 우연히 혹은 필연처럼 태어난다.
완성된 장면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해체하고, 속도를 바꾸고, 순서를 엉킨다. 같은 장면을 반복하되, 반복 속에서 의미가 서서히 미끄러진다. 무용수의 몸은 점점 인간이라는 형상을 잃고, 낯선 존재가 된다. 이 해체와 변형은 서사를 없애지만, 그 자리에 상징과 은유의 층을 쌓는다. 작품 속 이미지는 직선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병치된다. 탄생과 죽음, 항해와 귀환, 해부와 포옹이 한 무대 위에서 시간의 질서를 거부한다.
이렇게 구성된 무대는 춤이라기보다 움직이는 설치미술에 가깝다. 몸은 회화적 프레임 속에서 조각처럼 놓이고, 공간은 살아 있는 캔버스가 된다.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이미지를 향유하는 자리에 놓인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세계로 향한다. 그곳은 침묵이 아니라, 물질과 신체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물질성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