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는 지옥이다.
0. 하이데거의 죽음과 라깡의 죽음
“그들”을 죽음 앞에서의 불안에 대한 용기가 피어오르지 못하도록 한다. -하이데거-
R-실제계, S-상징계, I-상상계 / J(쾌락향유)
죽음과 불안 그리고 충동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은 인간은 태어나 말을 배우면서 상징화 (거세)되는 과정을 거치며 자아(의미)를 형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계속 놓치는 무엇이 있음을 강조한다.
실제는 항상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게 하는 그런 것이다. 사유하는 주체, 즉 사유 실체인 코기토는 이 자리에 도달할 수 없다” 세미나 11 - 라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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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상징계의 거세의 순간이다. (엄마의 젖가슴으로 부터의 떨어지는 상실의 순간 아기는 최초이자 완전으로서 가졌던 충동을 억압하고 세계가 명령하는 새로운 욕망을 받아들이는 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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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계-세계가 거세한 주체로서 의미를 생산하는 자아(상상)는 상징계의 의미연쇄(잡담-호기심-애매성) 속에서 잘 살아가는 듯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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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최초의 실재와의 상실을 반복적으로 만나게 된다. (업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것을 증상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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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반복적으로 그 증상을 (변주하면서) 부른다. 그것은 실재를 결여한 (언어가 완벽하게 덮을 수 없는) 욕망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징계의 언어도 결여-이상을 가정하며 욕망을 만든다. - 팔루스적 욕망)
우리가 말의 연속적 놀이 이전에 있었던 것, 그리고 상징계의 탄생에 선행하는 것을 주체 속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죽음 속에서만 볼 수 있다. - 라깡, 에끄리, 말과 언어의 기능과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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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두번째로 맞이하는 죽음은 거세된 상징-상상적 자아를 붕괴시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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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을 경험하는 자아는 이것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비정상으로서 치료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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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증상을 실재가 결핍된 자아의 욕망으로 향유하고자 하면 자아는 균열되고 결국 붕괴되는 죽음을 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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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증상(불안…)을 통해 자아를 죽음으로 이끌고자 하며 이는 가장 근본적인 실재를 향한 충동이다.
증상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 (실재)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고 다시 상징계를 횡단하여 새로운 자아 (향유하는)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1. 사르트르 : 하이데거의 세속화
사르트르는 후설과 하이데거를 통해 현상학적 존재론을 받아들이고 당시 프랑스 최대 지성 장 이폴리트를 통해 헤겔을 공부했다. 당시 프랑스에 유행하던 정신분석에 대한 지식 역시 사르트르의 관심사였고 하이데거, 헤겔, 프로이트의 영향아래 “존재와 무”를 집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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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내-존재 즉 닫힌 의식(유아론)이 아닌 열린 존재 양상으로 이미 세계와의 염려로서 드러나는 현존재는 우선 “그들” 속에 빠져있는 나로서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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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무로서의 실존과 맞닥드리는 불안의 경험을 “구토”라는 소설에서 묘사하면서 아무것도 아니며 규정할 수 없는 부정의 주체인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서 실존 할 수 있는지를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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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하이데거에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 “자아” (그들-자기)의 형성을 정신분석(*정신현상-헤겔)관점에서 탐구합니다. 즉 무로서의 의식이 자신과 타인을 대자-대타자로 의식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의식인 타자의 의식과정과 충돌하고 내재화하고 사물화하는 다이내믹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2. 지향적 의식 그리고 자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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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의식과 자아는 다른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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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인간의 지향적 의식 즉 대상을 통해 그것을 인지하는 일종의 반영물과 같다고 이해합니다. 인지적 생물은 사물을 지향함으로서 그 사물의 의식을 구성합니다. 이는 마치 거울이 앞에 놓인 것의 상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의식이 거울과 다른 점은 의식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통해 의식이 구성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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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은 특히한 점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존재자가 아닌 현존재로서 규정한 것과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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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지향적 의식의 정립적 의식을 넘어 그 의식 자체도 지향하여 인식하는 의식을 대상화하기도 합니다. 즉 너를 보는 나의 의식을 보는 의식을 구성해 낸다는 점입니다. 즉 제3의 눈을 상상하는 존재로서 “자아”를 구성해 내는 독특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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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자아”는 지향하는 의식 자체는 아니고 그 의식을 바라보는 상상적 (나 밖에) 의식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라고 상상하는 것은 “밖에 구성된 의식으로서의 자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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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사르트르에게 의식이란 대상에 의해 지향적으로 구성되는 빈 것이며 그 의식을 또 의식하는 자아는 제3의 것으로서 이미 그 의식이 아니라고 규정합니다. 그 “아님”이 바로 “무”입니다.
“의식은 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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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 경험 - 구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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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미”로서의 자아 (그들로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의미를 욕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완전히 붕괴되는 순간을 매번 경험합니다.
구토는 내게 잠시 숨 돌릴 틈을 준다. 하지만 나는 그게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 그게 나의 정상적인 상태다. 다만 오늘은 그것을 견뎌내기에는 내 몸이 너무 지쳐있다. 병자들에게도 기력이 너무나도 떨어져 몇 시간이나마 그들의 병을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지금 난 모든게 지루할 뿐이다. 이따금 너무나도 크게 하품을 하여 뺨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이 깊고 깊은 권태는 존재의 깊은 핵심, 나 자신을 이루고 있는 질료 그 자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자신을 돌보기를 소흘히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오늘 아침, 나는 목욕을 하고 면도를 했다. 다만 자신을 돌보는 이 자잘한 행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이렇게 공허한 행위들을 해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나를 대신하여 습관들이 그렇게 해왔을 것이다. 급관들은 죽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계속 부산하게 움직이고 그 그물망들을 아주 조용히, 아주 음험하게 짜나간다. 그것들은 유모들처럼 나를 씻어주고 닦아주고, 옷을 입혀준다. 나를 이 언덕으로 데려온 것 역시 그것들일까?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도트리 계단을 통해 왔으리라. 내가 정말로 110개의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왔을까? 어쩌면 이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조금 있다가 다시 내려가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잠시 후에 내가 코토 베르 언덕의 아래쪽에 있을 테고, 눈을 들어보면 지금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이 집들의 창문들이 멀리서환히 비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멀리에서. 내 머리 위에서. 그러면 이 순간, 내가 빠져나갈 수 없고, 나를 가도구 있으며, 사방에서 나를 한정 짓고 있는, 나를 이루고 있는 이 순간은 다만 한 조각의 흐릿한 꿈에 불과하게 되리라.
- 구토, 화요일 부빌에서, 사르트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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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이 순간을 죽음을 앞서 경험하는 근본기분으로서 불안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은 그동안 상상해 왔던 의미의 세계(그들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이며 개별자로서 존재 즉 실존을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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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무로서 (규정되고 정립될 수 없는 비정립적 의식)의 실존은 자아와는 다른 “즉자”로서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제3의 의식(즉 의식하는 나를 의식하는)을 상상해내는 실존 양태 “대자”로서 자아를 자발적으로 구성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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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비정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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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눈은 그 구성방식-내용에 있어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사르트르는 비정립적 의식으로서의 자아를 만드는 계기를 두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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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에 의해 구성되는 자아 (거울)
말 (사르트르 자서전적 소설)
- 사르트르는 어린 시절 말썽을 부려 동네 아주머니들한테서 핀잔을 들은 뒤, 혼자 거울을 바라보았던 장면을 묘사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달아나, 거울 앞으로 가서 상을 찌푸렸다. 지금 그 찌푸린 얼굴을 회상해 보건대 그것은 자기 방위의 구실을 했다. 벼락같은 수치심이 공격해오자 나는 근육을 방패삼아 자신을 지킨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찌푸린 얼굴은 내 불안을 극단으로 몰고 감으로써 도리어 나를 해방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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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 의해 구성되는 자아 (타자의 눈)
닫힌 방
(에스텔은 분을 바르고 초조한 기색으로 주벼에서 거울을 찾는다)
에스텔: 저기요, 거울 있으세요? 아무 거울이나요. 손거울이든, 뭐든요?…날 혼자 내버려두려면 적어도 거울 하나는 마련해줘요.
이네스: 내 가방에 거울이 하나 있어요. 없어졌네요. 서무과에서 빼 간거야.
에스텔: 아, 참 답답하네. … 나는 내 모습을 못보면 나를 만져 봐도 소용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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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생: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볼 수 있다면 뭐든 다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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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스: 내가 거울이 되어 줄까요? 이리와요, 우리 집에 초대합니다.
”내가 그녀 속으로 스르르 들어가서 그녀가 내 눈을 통해서 그를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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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자아”는 그 자체로는 비정립적인 무의 자발성(의식의 자발성)으로 부터 남겨진 공간 (시간)이며, 그 공간을 스스로 구성해 나갈 수도 또는 타인의 자아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타인은 지옥이다.
내가 질투심에 불타서, 호기심이 일어나, 또는 못된 버릇이 고개를 쳐들어, 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 열쇠구멍으로 안을 들여다 본다고 상상해 보자. 나는 오직 홀로 나의 비정립적 의식 차원에 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이어서 그것이 내 의식에 들어와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나의 모든 행위로 있다.’ 다만 이 사실만으로서 나의 행위는 그 자체 속에 전면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물에 대한 단순한 의식이고, 사물은 그것이 나의 자기성의 회로 속에 도입될 때, 나의 고유한 가능성들에 대한 나의 비정립적인 의식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그런 사물의 잠재성을 나에게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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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애인이 다른 상대방과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그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상하며 그 장면을 보기(보지않기)위해서 조심 조심 문앞으로 다가갈 것이다.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숨죽이며 작은 빛이 세어나오는 열쇠 구멍의 유혹에 자동반사적으로 눈을 가져갈 것이다. 이미 머리 속은 온 갓 상상으로 가득차 있으며 작은 열쇠 구멍을 통해 최대한 많을 것을 보기위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장애물이자 동시에 수단이기도 한 이 문의 작은 구멍에 집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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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나에게 어떤 행동의 지침이나 판단을 주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상상한 이미지와 문 너머의 사태로 넘어가(초월해) 있다. 나는 그저 열쇠구멍을 통해 그 안을 보려는 나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 수단들은 목적의 밖에 그들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총체는 나의 가능성의 하나의 자유로운 시도와 관련해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이 도구복합을 자기 자신 쪽을 향해 초월함으로써 이 도구 복합을 조직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가 그것으로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질투심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질투심이면서 이 질투심을 인식하지 않는다. 다만, 외적 세계의 이 도구 복합만이, 만일 그것을 내가 형성하는 것을 그만두고 관찰한다면, 나에게 이 질투심을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니는 내가 있지 않은 것으로 있고, 내가 있는 것으로 있지 않는 이상 나는 내가 문뒤에서 엿듣고 있는 것으로서 나를 정의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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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의 등장
갑자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나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런 것이다. 나는 갑자기 나의 존재에 습격을 받는다. 본질적인 변양이 나의 구조 속에 나타난다. 이 변양을 내가 파악하여 개념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것은 반성적인 코기토에 의한 것이다.
먼저 이 경우 나는 나로서의 한에서 비반성적인 나의 의식에 있어서 존재한다. 사람들은 흔히 기술해 온 것은, 바로 나의 이 침입이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보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이 쓰여져 왔다. 이런 형태에서는 그것은 아직 충분히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좀더 잘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대자를 그 고독에 있어서 고찰한 결과, 우리는 비반성적인 의식 속에 하나의 내가 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나는 대상으로서는 반성적인 의식에 있어서만 주어진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에는 내가 찾아와서 비반성적인 의식을 따라다닌다. 그런데 비반성적인 의식은 세계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나는 비반성적인 의식에 있어서는 세계의 모든 대상의 차원에만 존재한다. 그런데 나의 현재화라는 반성적 의식에만 귀속되어 있던 이 역할이 지금 여기서는 비반성적인 의식에 속해 있다. 다만 비반성적 의식은 나를 직접 대상으로 삼는다. 비반성적 의식은 인격을 직접 자신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격은 그것이 타자에 있어서 대상인 하에서 의식에 현전한다.
……
나는 이 자아가 언젠가 주어질 수 있는 한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이 자아가 원리적으로 나에게서 달아나 결코 나에게 속하지 않는 한에서 이 자아를 지향하는 것이다.
……
나는 이런 자아를 하나의 무관한 형상으로서 배척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자아는 내가 그것으로 있으면서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 하나의 나로서 나에게 현전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부끄러움 속에서 (다른 경우에는 오만 속에서)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타자의 시선을 드러내 보이고, 이 시선의 말단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부끄러움 또는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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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바로 “보고 있는 나”의 의식을 구성한다. 즉 나를 보는 시선에 대한 지향적 의식이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의식은 나의 반성을 통한 자의식이 아니라 타인의 의식을 의식하는 것이며 그 대상은 부끄러움(수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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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는 수치심의 자아를 구성한 것이며 그 수치심은 타자의 시선의 대상으로서의 나의 존재론적 상태이다.
부끄러움은 “나는 바로 타자가 시선을 향하고 판단하고 있는 이 대상으로 있다”는 것의 승인이다. 나는 나의 자유가 나에게서 탈출하여, ‘주어진’대상이 되는 한에서, 이 나의 자유에 대해서만 부끄러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본디 나의 비반성적 의식과 나의 시선을 받고 있는 자아의 유대는 인신의 유대가 아니라 존재의 유대이다. 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인식을 넘어서 어떤 타인이 인식하고 있는 “나”다. 더욱이 나는 타자가 나에게서 빼앗아 타유화한 하나의 세계 속에서 내가 그것으로 있는 “나”다. 왜냐하면 타자의 시선은 나의 존재뿐 아니라, 그것과 상관적으로 벽, 문, 열쇠구멍 따위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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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방
J.P. Sartre, No ex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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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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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은 사르트르의 타자의 시선 아래 자아를 —> 대타자의 응시 아래 보여지는 존재로서의 상상적 주체로 설명한다. 라깡의 주체는 대타자의 응시 (시관 충동의 결여)를 대체(방어-향유)하는 봄의 욕망을 가진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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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의태가 생물의 봄이 아닌 보여짐을 통해 태어나기 이전 부터 주어진 것처럼 인간 역시 자신의 자아가 이미 태어나기 이전에 존재하는 대타자의 응시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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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상징계를 넘어서는 대타자 응시를 견딜 수 없는 인간은 그 보여짐을 가리기 위해 상징계의 질서 (팔루스)가 제공하는 이미지 안에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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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실재 그자체를 볼 수 없다. 마치 조리개를 열어 놓은 사진은 그냥 뿌연 흰색으로 되는 것처럼 실재가 주는 모든 감각적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눈의 조리개 (관념의 틀)을 통해 스크리닝하여 이미지로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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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미지는 이미지를 바라보는 (욕망하는) 주체를 구성하고 주체가 흔들리는 경험 - 이미지 너머의 실재와 가까운 충동 (시선-응시)을 보지 못하게 막아준다.
스키모토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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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자를 만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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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상상계에 있고 타인의 자아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무의식적 차원 즉 실재의 차원에서 마주하지만 그것은 인식될 수 없는 것이고 바깥의 자아로서 상징계의 질서가 마련한 그 어딘가의 소통 가능한 타인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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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어가 매개하는 상징-상상계에서의 만남 속에서도 우리는 상대와의 완전히 매개되어 이해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언어가 결코 연결할 수 없는 존재론적 차원의 기분에서 기원한다.
<상황 설정>
서로가 서로를 정립하는 의식의 대결 속에서 우리는 타자를 어떻게 만나고 있는 것일까?
- 사르트르의 실존적 자유
-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
- 라깡의 환상의 횡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