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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 } 철학 S. 3

0. 그들-세계에 빠져있음

현존재 (묻는 인간)의 는 염려로 존재한다.
나는 던져진 세계의 존재양식에 근거해 존재한다. 그것은 말을 통해 나를 만들고 나는 주변의 사물과 타자를 배려하고 심려하면서 그들의 세계 속에 빠져있음으로 존재한다.
그들-세계의 나는 잡담, 호기심, 애매성의 존재 양상 속에서 살아간다.
잡담 - 뒤따라 말함과 퍼트려 말함, 즉 되묻지 않는 담화의 구조 속에서 말되어지고 있음
헤어질 결심 영화 속 사랑의 말: 끊임없이 보고 확인하고 소유하는 말과 숨기고 사라지고 묻고 침묵하는 말로서의 사랑의 불가능성
호기심 - 끊임없이 둘러봄, 즉 잡담의 세계가 보도록 하는 것을 바라 봄
신디셔먼의 사진들
보는 것과 보여져야 할 것(이미지)를 보아지는 것 - 호기심은 보여져야 할 것에만 눈을 둘러 보는 것
애매성 - 묻지 않는 세계 속에서 안다고 믿음, 즉 가장 명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통해 더 묻지 않게 됨
완벽한 이론, 극사실주의 그림, 완벽한 관계, 완벽한 조직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
극사실주의, 더 자세히 정확히 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가장 극단까지 데려가면 우리는 궁극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경영-세계에 빠져있는 나 (성장하는 자아)
경영 = ad-ministration (Business Administaration)
경영 administration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한 행위 - 그 무엇이란, 결국 자본의 확장과 성장 그 자체
자본 성장을 위한 체계적 실천 (매니지먼트, 전략, 리더십, 자기개발…)
국가경영 - 기업경영 - 조직경영 - 자기경영…
경영-세계의 균열
금융적 관점에서의 균열
가치사슬의 균열 (비용 최적화의 기존 가치사슬의 파괴) : 애플, 넷플릭스, 애어비앤비…
매니징 관점의 균열
자기 경영의 균열
균열들이 만들어내는 질문들… 그리고 경영(Administration) 자체에 대한 해체 - 성장전략의 해체 / 가치사슬과 소비구조의 해체 / 리더십 매니징의 해체 / 나에 대한 해체
—> 자본에 대한 도전과 균열 → 조직에 대한 균열 → 관계에의 균열 → 자아에의 균열
“그들”-나 (das-Man)은 “마치 ~ 인듯”한 욕망의 대상을 통해 우리를 유혹하고 모두가 보증해주는 잡담 속에서 안정을 주며, 완벽한 자아를 그리며 우리를 소외시키고, 그 속에 우리를 잡아 가둔다. (유혹, 안정, 소외, 가둠… 속에서 우리는 삶의 반복을 지속한다.)
그러나 완벽할 것 같던 그들-세계는 죽음이라는 해결(피)할 수 없는 사태 앞에서 균열을 드러낸다.

피할 수 없는 균열의 순간 - 죽음

일상에 우리는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해야 할 것(타인의 죽음)또는 끔찍하고 피고하 싶은 것, 나중에 생각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것…등으로 생각한다.
타인의 죽음 - 일상에서의 죽음 (그들의 죽음) 우리는 죽음을 알고 있는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 유능한 판사, 성실하고 예의바르고 겸손하고 사회성이 좋은 인기있는 모범적 인간이다
법을 어기거나 아부하거나 선을 넘는 행동을 자제하고 작은 잘못에도 죄책감을 가지고 양심에 따라 사는 인간이다
예쁘고 귀한 아내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았고, 권태기가 있었으나 사회적 신분상승과 여유로운 경제력을 극복, 새로운 환경과 관계를 통해 활기를 되찾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서재를 정리하다 옆구리를 다치고 그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죽음을 앞두게 됨. 죽음의 위기 속에서 세상이 가르쳐준 해법을 실천해 보지만 전문가인 의사도 가족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통 속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반 일리치는 가족들로부터도 소외되고 스스로에게 있던 자부심 마져도 붕괴되는 경험을 마주한다.
죽음 앞에서 한 번도 자신이 알고 있는 죽음이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나의 죽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섬뜩함을 느낀다.
분명이 모든 인간은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인간 모두가 죽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 이반 일리치는 일반적인 인간의 하나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되는 절대적인 실체다. 나는 나 자신만의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 그리고 장난감과 유모, 수많은 기쁨과 슬픔, 유아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과 같은 나 자신만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나만의 감정과 사고를 갖는 내가 죽는다는 것은 인간 일반이 죽는 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내가 내 차례가 되어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자신을 돌봐주는 집사 게라심만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고 위로를 준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 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을 위해 고생 좀 하는 것이 전혀 힘들거나 괴롭지 않으며 그 또한 언제가 죽을 때가 되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수고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심정이 담겨 있었다.
이반일리치는 괴로움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에 “이제까지 내가 살아 왔듯이 그렇게 편안하고 유쾌하게 살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 목소리는 “편안하고 유쾌하게 살았을 때는 어떤 식으로 살았는가?”라고 다시 묻는다. 이반 일리치는 상상 속에서 자신이 과거의 행복한 순간을 떠올려보지만 어린 시절의 먼 기억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혐오스럽게만 느껴진다.
나의 결혼… 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지, 그것은 환멸이었어. 내 아내의 숨결, 관능, 위선! 그리고 이 생명력 없는 공무, 돈벌이를 위한 노동, 그렇게 1년, 2년, 10년, 20년이 항상 똑같이 흘러갔지. 공직에 몸담은 횟수가 늘어 가면 갈수록 그것은 더욱 더 죽어가는 일이 되었지. 지금까지 내내 나는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산을 오르는 것으로 보였겠지. 그러나 내 삶은 사실은 항상 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 그리고 이제 벌써… 죽음이야!
이반 일리치는 결국 자신의 삶 전체가 모두 허위이고 (타인의)욕망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을 (어쩌면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들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며 용서를 빈다. <용서해줘—> 가게해줘>
죽음을 받아들인 이반 일리치는 죽음은 끝났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4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이반의 죽음 이후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은 “나의 죽음은 아니야”라고 위로하며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떨쳐버린다. 정해지고 익숙한 죽음의 의례는 또하나의 죽음을 경험한 이들에게 그냥 지나가는 것이며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평온하고 유쾌한 일상이 방해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의 장례라는 우연한 사건이 법원의 순조로운 업무를 깰 만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그 어떤 일도 바로 이 밤에 저 일꾼의 네 개의 새 초에 불을 붙이고 있는 동안 카드 한 패를 섞어서 놀이를 시작하려는 우리를 방해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우연한 사건이 우리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이 저녁에 즐겁게 놀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일상적인 ‘서로 함께’라는 공공성은 죽음을 부단히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즉 “사망 사건”으로서 “알고”있다. 가깝거나 먼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이 “죽는다” 모르는 사람들이 매일 매시간 “죽는다”. “죽음”은 세계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주지의 사건으로 만나고 있다. 죽음은 그러한 사건으로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의 성격인 눈에 안띔 속에 남아 있다. ‘그들’은 또한 이런 사건을 위해서 이미 하나의 해석을 확보해 놓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밖으로 말하거나 대개는 조심스럽게 “재빨리”하는 이야기는, ‘사람은 결국 다 한 번은 죽는다. 그러나 우선 이것이 나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남의 일일 뿐이다.)’라고 말하려고 한다. - 존재와시간 51절
죽음을 은폐하며 회피하는 태도가 워낙 질기게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어서, 서로 함께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종종 이렇게 꾸며댄다. : 당신은 이제 금세 괜찮아져 다시 당신의 잘 배려된 세계의 안정된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런식의 “심려”는 심지어 그렇게 말함으로써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위로한다고 생각한다. 이 심려는 그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존재가능을 완전히 덮어버리도록 도와주어, 그를 현존재 속으로 다시 데려오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죽음에 대한 부단한 안정감을 배려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감은 근복적으로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마찬가지로 “위로하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그리고 생명을 다하는 경우에도 공공성은 그 사건으로 인해서 자신의 잘 배려된 만사 태평(무걱정)이 방해되어 동요되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타인의 죽음에서 속수무책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사회적 언짢음을 보게 되는 것이 드물지 않은데, 공공성은 이것에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 존재와시간 51절
나는 죽는다. 모든 사람은 죽기 때문이다. (3단 논법의 진리)
모두가 죽는 다는 진리는 어떻게 보증하는가?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타인의 죽음을 관조함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이해한다.
그것은 단지 누구나 다 겪는 것, 지금은 나와 상관없는 것, 애도(상실을 덮는)해야 할 것으로 애매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넘어간다.

죽을 수 없는 나

그러나 생각해 보자. 죽음은 경험될 수 있는 것인가?
타인의 죽음 :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대신 경험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공동존재 세계 속에서 타인이라는 현존재가 거기 있음을 멈추고 존재자로 바뀌는 경험을 할 뿐이다. 그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에 대한 의미이며 그것의 상실이다.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뿐 그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나의 죽음 : 나는 세계와의 단절로서 죽음을 이해한다. 다만 그 단절을 경험할 수 없을 뿐더러 단절 이후의 죽음 자체를 인수할 수 있는 현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당신이 자살을 기도했다고 하자. 빈틈없이 준비했다. 칼을, 약을, 줄을 골라 달력에서 날을 골라 결행한다. 벤다. 삼킨다. 혹은 목에 걸고 밟고 있던 물건을 발로 찬다.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 당신은 죽어간다. 자 이것이 나다. 나만이 경험할 수 있는 나의 죽음이고 나의 진리이자 나 자신이 내 인생을 끝장내는 용맹하기까지 한 순간이다. 그러나 그 죽음을 향한 일격 후, 양상은 급변한다. 영원한 슬로모션이 출현한다. 거기에서 죽음을 사라진다. 죽음은 사라지고 영생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태가 현실에 출현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순간에 “죽는 나” 자체가 사라져 간다. 죽음의 과정에서 “고유한 나”는 녹아 사라진다. 잿빛 암흑 속에 “이 나”는 내던져지고 그 윤곽은 흐릿하게 퍼져 파선 되어간다. 나는 내 것이었을 죽음을 영영 손에 넣지 못하며 죽음의 미완료 속에서, 영원히 아직 도래하지 않은 죽음 속에서 사라져 갈 뿐이다. ….. 이 죽음을 나는 마지막까지 지켜볼 수 없다. 그 행위의 결과는 “결과라고 할 수 없다”. “죽는 것을 멈출 수도, 죽음을 끝까지 마무리 할 수도 없다” - 사사키 아타루, 야전과영원 p.230
결국 죽음은 완료할 수 없는 행위로서 “나”와 “죽음” 자체가 통체로 사라져가는 사태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슬로모션 속에 끝이 나지 않는 미완으로 경험된다. 따라서 내가 죽었는지 여부는 나는 모른다. 죽은자는 자기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죽음의 영원한 미완으로서의 속성 때문이 죽음은 눈앞의 행위나 사건으로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의 죽음이해는 죽음의 현상을 은폐하면서 죽음을 마치 완결되어야 하는 사건으로 취급한다.
종말은 현존재의 앞에 닥쳐 있다. 죽음은 아직 눈앞에 있지 않은 어떤 것이 아니며, 최소한으로 줄어든 최후의 미완도 아니요, 차라리 일종의 “앞에 닥침”이다. …. 그러나 이것이 죽음을 특징 짓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죽음은 현존재 자신이 각기 그때마다 떠 맡아야 할 존재가능성이다. 죽음과 더불어 현존재 자신이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에서 자기 앞에 닥쳐 있는 것이다. … 그렇게 자기 앞에 닥쳐 있을 때 현존재에서는 다른 현존재에 대한 모든 연관들이 끊어진다. 이러한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가능성은 동시에 극단적인 가능성이다. … 이렇듯 죽음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건너뛸 수 없는 가능성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현존재는 이러한 가능성 안으로 내던져저 있다. … 죽음에 내던져져 있음이 현존재에게 더 근원적이고 더 절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불안이라는 처해 있음에서이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건너뛸 수 없는 존재가능 “앞에서”의 불안이다.
죽음은 이미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처해있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 - 개별화 / 단절 (죽음)의 가능성인 것이다.
불안의 ‘그것 앞에서’에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데에도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세계내부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데에도 없다’는 이 적대성은 현상적으로, 불안의 ‘그것 앞에서’가 세계 그 자체임을 말한다. 이 “아무것도 아님과 아무데에도 없음” 속에서 고시되는 전적인 무의미성은 세계부재를 의미하지 않고, 세계내부적인 존재자가 그자체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세계내부적인 것의 이러한 무의미성 때문에 세계가 그 세계성에서 유일하게 부각되어 나온다는 것을 말한다. p.255
불안은 이렇게 현존재에서, 빠져있으면서 자신을 세계에서부터 그리고 공공의 해석되어 있음에서 부터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아버린다. 불안은 현존재를 그가 그 때문에 불안해하는 그석으로, 즉 본래적인 세계-내-존재-가능을 되던져 준다, 불안은 현존재를 이해하면서 본질적으로 자신의 가능성에 기획투사하는 그의 가장 고유한 세계-내-존재로 개별화시킨다. 그러므로 불안해함의 ‘그 때문에’와 더불어 불안은 현존재를 가능존재로서, 그것도 그가 오로지 그 자신에서부터 개별화된 현존재로서 개별화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존재로서 열어밝힌다.
“그들”을 죽음 앞에서의 불안에 대한 용기가 피어오르지 못하도록 한다. -하이데거-

죽음과 불안 그리고 충동

R-실제계, S-상징계, I-상상계 / J(쾌락향유)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은 인간은 태어나 말을 배우면서 상징화 (거세)되는 과정을 거치며 자아(의미)를 형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계속 놓치는 무엇이 있음을 강조한다.
실제는 항상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게 하는 그런 것이다. 사유하는 주체, 즉 사유 실체인 코기토는 이 자리에 도달할 수 없다” 세미나 11 - 라깡-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상징계의 거세의 순간이다. (엄마의 젖가슴으로 부터의 떨어지는 상실의 순간 아기는 최초이자 완전으로서 가졌던 충동을 억압하고 세계가 명령하는 새로운 욕망을 받아들이는 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상징계-세계가 거세한 주체로서 의미를 생산하는 자아(상상)는 상징계의 의미연쇄(잡담-호기심-애매성) 속에서 잘 살아가는 듯 하지만…
결국 최초의 실재와의 상실을 반복적으로 만나게 된다. (업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그것을 증상이라 부른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그 증상을 (변주하면서) 부른다. 그것은 실재를 결여한 (언어가 완벽하게 덮을 수 없는) 욕망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징계의 언어도 결여-이상을 가정하며 욕망을 만든다. - 팔루스적 욕망)
우리가 말의 연속적 놀이 이전에 있었던 것, 그리고 상징계의 탄생에 선행하는 것을 주체 속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죽음 속에서만 볼 수 있다. - 라깡, 에끄리, 말과 언어의 기능과 장-
인간이 두번째로 마지하는 죽음은 거세된 상징-상상적 자아를 붕괴시키는 순간이다.
증상을 경험하는 자아는 이것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비정상으로서 치료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증상을 실재가 결핍된 자아의 욕망으로 향유하고자 하면 자아는 균열되고 결국 붕괴되는 죽음을 격는다.
인간은 증상(불안…)을 통해 자아를 죽음으로 이끌고자 하며 이는 가장 근본적인 실재를 향한 충동이다.
증상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 (실재)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고 다시 상징계를 횡단하여 새로운 자아 (향유하는)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